『 예쁜 남자 』
W. 린비
01. 이상 가족
우리 집 세 남매는, 생일이 모두 같다.
우선 첫째 오빠 전도준. 그는 부모님이 어린 나이에 사고를 쳐 나은 자식으로, 두 분의 애틋한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영재 소리를 듣더니 방년 스무 살이 되던 해엔 덜컥, 일류 대학에 붙어 집안 어른들에게 경사를 안겨 준 효자 중의 효자.
입학과 동시에 속전속결로 군대까지 다녀와 이제 남은 목표는 오로지 취업뿐인 재학생이었다.
현재 할아버지 내외의 추정 재산 목록 1호이며, 부모님의 가장 번듯한 자식이라고나 할까.
오빠의 흠이라면, 지 잘난 걸 안다는 것이었다.
아니, 남들이 지보다 못난 걸 아는 건가. 충고를 빙자한 무시와 훈수가 마치 짜장과 단무지처럼 일체화되어 있는 인간이었다.
“ 닭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새끼를 극진히 아끼고 뭐든 골고루 먹기도 하지. 그리고 뭣보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물을 많이 먹는다. ”
“ …어쩌라고? ”
“ 닭에게 건강 습관을 배우란 거다. 닭보다 못하게 살고 있단 생각이 안 드냐. ”
정형외과 의사도 아니고 왜 매번 뼈만 때려대는지. 상처 입은 피해자들을 규합하면 아마 나라 하나를 지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네 가지 알뜰한 개재수 같으니.
아무튼.
다음으론 둘째 오빠 전도민. 그는 부모님이 조금 여유를 가졌을 때에 태어나 애지중지 키운 아들로, 자기애가 무척 충만한 채로 성장했다.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예술 방면으로 타고난 수재였다. 뛰어난 무용 실력으로 3년 전 유명 예술 대학에 입학.
역시 완벽해 보이는 이 새ㄲ..아니 오빠의 흠이라면, 자기애만큼 출중한 외모지상주의였다.
내 기준 '외모 집착증을 앓고 있는 나르시즘 환자' 랄까. 오빠는 허구한 날 거울을 끼고 자아도취에 빠졌다.
“ 오빠의 우상은 누구야? ”
“ 10년 후의 나다. ”
이 미친놈은 설상가상 타인에 대한 선호도 남달라서 예쁜 여자의 번호라면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잘생긴 남자와는 일단 친구를 먹고 봤다.
오빠는 그것을 제 예술성에서 기반한 예민함이라 했지만, 그럼 시방 나는 날 때부터 왕성한 식욕에 기반해 이미 세상 음식을 다 먹어봤게.
더 많이 부딪히는 탓도 있었지만, 내게 있어 남매의 좋은 점보단 나쁜 점을 더 많이 떠오르게 하는 생물체였다.
그리고 셋째인 나.
깨어있지 못한 집안 어르신들로 인해 딸이라는 이유로 세상에 나자마자 차별을 받았다.
남아선호사상이라고 들어는 봤나? 완전 구시대 유물인데.
때문에 부모님이 시댁과 의절하고 지낸지가 어언 10년.
자식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신 부모님께 죄송스럽게도, 나는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분야가 전혀 없었다.
첫째처럼 두뇌가 비상한 것도 아니야, 둘째처럼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인물이 출중한 것도 아니야. 남들에게 흔히 있는 성실함조차 없었다.
그로부터 이어진 결과는 수능 대참사. 불과 몇 개월 전 대학 입시를 처참히도 실패하고 현재는 재도약을 준비 중인 재수생이었다.
같은 날에 태어나서 인생 전개 방향은 왜 이리도 다른지. 좋은 유전자는 오빠들이 모두 싸그리 빡빡 긁어 나온 것이 분명했다.
'전' 자, '정' 자, '상' 자 되시는 우리 아버지는 나를 두고 '괜히 낳았나'란 농담을 서슴없이 할 만큼 직설적인 분이셨다.
“ 등 좀 긁어봐라, 딸아. ”
“ 집에 효자손 있지 않아요? ”
“ 불효자 손이 더 시원하다. ”
언제나 이상형을 묻는 물음엔 '니 엄마 반대' 라며 신경을 긁고, 한껏 꾸미신 어머니에게 '어디 병 났느냐' 물어 어머니의 샌드백을 자처하셨다.
어른들은 가끔 우스갯소리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아버지는 다만 표현 못하는 경상도 남자일 뿐이란 걸. 장장 스무 년을 지켜본 결과, 아버지가 어머니를 더 좋아했다. 그러니 애를 셋이나 낳았지.
'김' 자 '선' 자, '자' 자 되시는 어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왕년에 무용을 하시다 웬 산적(아버지라고 한다)에게 납치를 당해 정신을 차려 보니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고, 잠에서 깨어 보니 애가 셋이었다고 했다.
“ 엄마는 아빠랑 왜 결혼했어요? ”
“ 무서워서. ”
“ 왜 무서워요? ”
“ 헤어지자 그러면 꽃 들고 쫓아올 거 같았다. ”
“ 그게 왜 무섭…그럼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
“ 실수로. ”
전래 동화 같은 두 분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자라, 나는 중학생이 되던 해까지 산적 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애가 생기는 줄 알았다.
다른 여자 아이들이 너도 나도 공주님 놀이를 하며 왕자님을 기다릴 때, 나는 산적을 기다렸다. 어떤 산적이 나를 데리러 올까. 그는 빨간 망태기를 매고 있을까, 파란 망태기를 매고 있을까.
그런 순수한 동심을 가지고 있던 열 세 살의 어느 여름 날, 라한 오빠를 만났다.
오라한. 그는 둘째 오빠의 친구로, 처음 만났을 당시 열여섯이었다.
오빠는 그 때 거대한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털며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서는데, 나는 산적이 자신의 딸을 보내 나를 잡으러 온 줄로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의 오빠는 디즈니 공주들도 울고 갈 미녀 상이었으니. 세월이 흐르며 체격이 점차 남자다워졌지만 눈 코 입은 여전히 곱상했다.
라한 오빠는 대기업 임원인 아버지 밑에서 해외를 돌아다니며 성장했다고 했다. 한마디로 금수저.
남들은 부러워 배를 찢는 그 수저를 오빠는 냅다 걷어차고 열여섯 무렵 우리 집으로 가출을 했다(본인은 아직도 ‘출가’라고 우긴다).
그리곤 돌아가지 않은 지가 어언 7년. 출가와 동시에 학업을 때려 치는 바람에 오빠는 대학은 고사하고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살길을 찾겠다고 쇼핑몰 모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오빠는 그곳에서 일을 배워 창업을 한 후 대박이 났다.
현재는 잘나가는 인터넷 쇼핑몰의 사장으로, 소수의 팬 덤까지 거느리며 멋드러지게 살아가고 있었다.
오라한의 흠이라면, 유년시절을 유복한 집안에서 보내 경제 개념이 보통의 이들과 다르다는 것.
나와 오빠들에게 밥을 사는 건 고사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덜렁덜렁 내주어서 내가 대신 되받아온 적도 있었다.
그러다 한 방에 훅! 간다는 내 역성에 라한 오빠는 '지금 내게 내조하는 거니' 라는 시덥잖은 드립을 날리다 날아간 내 주먹에 코피가 터졌었다.
이토록 선머슴인 나를 라한 오빠는 '삐삐' 라 불렀다. 첫만남 당시, 내가 스트라이프 양말에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었어서.
그건 내가 낮잠을 자는 사이 둘째 오빠가 쳐놓은 장난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쪽팔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남자 사람 앞에 그런 추한 몰골을 하고 섰다니.
둘째 오빠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라한 오빠에게 막내 동생이 정신 장애가 있노라고 귓속말을 했었다.
나는 우리가 만난지 일 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야, 왜 그 날 라한 오빠가 나를 보며 눈가를 적셨는지 알게 되었다.
아, 생각하다보니 열이.
잠시 흥분해서 잊을 뻔 했는데, 현재는 우리 삼남매의 생일 축하 파티 중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해외여행을 가신 지라 거실로 오빠 세 마리와 내가 모여 앉아 부모님께 화상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축하와 감사 멘트가 오간 후, 도준 오빠가 화면에 대고 말했다.
"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
생일 선물을 바라는 노골적인 멘트라는 걸 나는 알았다.
도민 오빠도 말했다.
"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아버지. "
여행 선물을 어필하는 염치 불구 멘트라는 걸 알았다.
심술이 난 나는 벽에 대고 외쳤다.
" 사랑해, 삼겹살! "
" 삐삐,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
라한 오빠가 팩, 돌아앉은 내 목덜미를 끌어다 화면 앞에 데려다 놓았다.
씨, 이거 놔! 나는 오늘 같은 날 그냥 사라져버리고 싶어! 이 놈의 집구석에서 증발해버리고 싶다고!
그 쯤 지구 반대편으로부터 어머니의 부름이 들렸다.
- 딸.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답했다.
" 네. "
- 생일 축하한다.
" 감사해요. "
- 너 예전에 그거 기억 나냐. 우리 어렸을 때 같이 목욕했던 거.
지난 시절을 끄집어내신 걸 보니 어머니께서 감동적인 대화 모드를 시작하시려나 싶었다.
- 그 때 니가 욕조에 똥 쌌었잖니, 딸.
" …… "
- 내가 그거 뒤치다 거리 하느라고 엄청 고생했었는데,
" …… "
- 그런 네가 벌써 이만큼 자랐구나.
친오빠라는 생물체들은 벌써 끅끅대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라한 오빠는 그런 적이 있었냐며 놀라고.
1절만 해도 멘탈이 너덜너덜해질 판인데, 아버지가 2절을 거드셨다.
- 우리 딸. 요즘에도 잘 싸고 있지?
저래 뵈도 아버지는 고을에서 제일가는 로맨티스트였다고 했다. 그게 서울 여자들한테 먹혔는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이게 우리 집이었다. 우리 가족. 참으로 도란도란 즐거운 생일날이지 않은가. 이만 해도 눈물 나도록 즐거울 일인데, 앞으로 더 파란만장한 나날이 펼쳐질 계획이었다.
...나의 재수 기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