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기도가 끝나자마자 사제들은 분주했다. 체칠리아는 높은 곳에 올라가 스테인드글라스를 닦으며 창문을 열었고, 그렉과 던스턴은 의자들을 옮겨 넓은 자리를 만들었다. 루카스는 제단과 성소 곳곳의 촛대를 청소했고, 캐서린은 바닥을 쓸고 성소 옆 그릇 굽는 화로에 불을 지폈다. 오늘은 초를 만드는 날이다.
교단에 있어 초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모든 의식의 시작은 초에 불을 붙이는 행위다. 촛불에 잠시나마 영원한 빛이 머물러 사제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또 수행 사제들은 촛불을 통해 영원한 빛과 교감하는 법을 배운다.
사제들은 매달 자신이 속한 성소에 모여 초를 만든다. 초 대부분은 모든 성소를 책임지는 살루티스 중앙 대성소로 전해진다. 중앙으로 모인 초는 급하게 일손이 부족하거나 초를 만들 수 없게 된 성소나 방랑 사제들에게 다시 전해진다. 그다음으로 성소에서 의전에 쓰거나 마을 사람들이나 사제 본인들이 쓸 초를 만든다.
“촛불로 우리와 하나 되는 영원한 빛들이시여, 기뻐하옵소서. 이번 달에도 많은 이에게 빛과 온기를 전할 수 있게 되었나이다. 부디 빛과 온기를 받을 이에게 구원을 바라옵니다.”
본당 사제인 캐서린의 기도를 끝으로 사제들이 화로에서 녹인 푸줏간에서 받아온 기름을 가져왔다. 끓어오르는 기름 냄새가 성소 곳곳에 퍼졌다. 완전히 녹인 기름은 체에 한 번 걸러내고 기본적인 향초를 넣고 저어 냄새를 없앴다. 기름이 굳으면 다시 녹여 체에 거르길 반복했다.
“이제 만들어도 되겠네요.”
캐서린의 말에 모두 화로 바로 옆에 내놓은 투박한 질감의 사기들을 가져와 기름을 둘러싸고 앉았다. 중앙으로 보낼 것과 성소에서 쓸 것은 모양이 모두 같다. 그릇 안에 정해진 양만큼 기름을 넣고 미리 만들어둔 나무 심지를 꼽는다. 천천히 쟁반에 올려 바람 부는 밖에 내놓아 다 굳을 때까지 기다린다.
뒤이어 사제들은 자신이 사용할 초를 만든다. 그렉과 던스턴은 다소 투박한 초를 만드는 편이었다. 캐서린은 그릇을 빚는 자엽(瓷燁) 사제답게 틀에 기교를 넣어 초를 만들었다. 루카스는 가죽장갑을 끼고 손으로 독특한 모양을 잡아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체칠리아는 자신의 몫인 기름에 어제 서랍에서 꺼내온 마른 꽃다발을 넣어 향을 내고 굳혔다. 틀에 넣고 어느 정도 굳으면 나무칼로 기름을 만져 자신이 좋아하는 모양을 낸다. 아르티제 성소에서 가장 화려한 초를 만드는 사제는 늘 체칠리아였다. 체칠리아처럼 화려한 초를 만들고 싶은 어린 사제는 눈을 빛냈다.
“매번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요.”
“나중에 제대로 가르쳐드릴게요.”
캐서린은 체칠리아가 넣은 꽃을 살펴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장미, 로즈메리. 체칠리아, 흡혈귀 사냥을 준비하나요?”
“그렇습니다, 캐서린 사제님.”
흡혈귀에게 유효한 약초는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은 장미였다. 흡혈귀가 장미 덩굴의 가시에 찔리면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낀다. 또 흡혈귀는 장미의 향기를 휘감은 사람의 살결에 이빨을 박을 수 없다. 가시를 부러뜨리지 않은 장미의 줄기와 꽃을 기름에 담가 양초를 만들면 그 연기가 두 역할을 모두 해냈다.
닿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무기를 만드는 체칠리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캐서린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흡혈귀를 향한 그녀의 깊은 원한은 이미 그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시인의 숲 전체를 에어드부르가가 홀로 지배하고 있지만, 한때 많은 흡혈귀가 그곳에 살았다. 그들은 흡혈의 갈증과 저주를 쾌락으로 삼았다. 십 년 전, 그들의 방탕함이 어린 체칠리아의 비극이 되었고, 모든 가족을 잃은 그녀를 거둔 사람이 캐서린이었다.
아르티제 성소는 고결한 인내심을 가진 에어드부르가와 결탁해 쾌락에 물든 흡혈귀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흡혈귀들이 살던 저주받은 숲은 에어드부르가의 것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시인의 숲이 되었다.
그러나 체칠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에어드부르가마저도 결국 똑같은 흡혈귀다. 계약의 조건으로 아르티제의 사제들은 에어드부르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에어드부르가가 시인의 숲에서 나오지 못하게 숲의 가장자리에 장미를 심었다. 또 외지의 흡혈귀 사냥에 원조하러 나가기도 했다.
집필이 한창이라 사냥에는 나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캐서린은 체칠리아의 깊은 원한을 볼 때마다 생각에 잠겼다. 체칠리아는 캐서린의 다음을 이을 새 세대의 본당 사제다. 캐서린은 늘 그녀의 복수심 때문에 자신의 결정이 옳은 일인지 고민해왔다. 아직 그 결정을 되돌리는 일은 없었지만.
앞으로 수십 년을 이끌어 나갈 본당 사제에 어울리는 나이와 경력을 갖춘 사제가 그녀밖에 없었던 점도 있지만, 체칠리아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날이 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시인의 숲으로 가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체칠리아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계속해서 초를 만들었다. 캐서린은 체칠리아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평소보다도 더 많이 초를 만들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혹시 그것인가. 캐서린은 초하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만약 체칠리아가 그 일에 눈치를 챈 거라면. 캐서린은 차라리 안심이라고 생각했다. 뭐가 일어나든 성소의 일이라면 아직은 캐서린이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기를, 그녀는 바랐다.
양초를 다 만들면 으레 해가 지기 마련이다. 다가올 보름에 중앙으로 보낼 초를 창고에 넣어두면 그날 사제들의 할 일은 끝이다. 다 같이 저녁을 먹은 사제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캐서린은 본당 사제의 집무실에 들어갔고, 피곤해진 그렉은 먼저 들어가 잠을 청했다. 루카스는 성소를 나와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체칠리아는 자신이 만든 장미 향초를 사제들의 방에 하나씩 놓았다. 그녀는 반쯤 열린 그렉의 방에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가 그의 책상 위에 초를 올려두고 촛불을 켰다. 은은한 장미 향기에 그의 잠자는 얼굴이 편안해졌다. 체칠리아는 안심한 듯 방을 나왔다.
체칠리아는 닫혀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던스턴이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체칠리아는 장미 향초를 던스턴의 손에 올려 주었다.
“한동안 이걸 방에서 피워주셨으면 해서요.”
“흡혈귀 사냥할 때 쓰려고 했던 것 아닌가요?”
“그러니까, 피워달라고 하는 거예요."
체칠리아의 대답에 던스턴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흡혈귀는 영원한 빛의 신성한 휘광을 버티지 못한다. 대부분의 저주가 그렇다. 영원한 빛을 모시는 성소는 더더욱 그렇다. 그 견고한 방어가 깨지는 일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체칠리아는 진지하게 그 미약한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었다. 던스턴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렉에게 흡혈귀의 잔향이 묻어 있었어요. 분명 흡혈귀가 그를 노리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예요."
“어쩌면 흡혈귀가 자신을 감추고 나타났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곧잘 숨기니까요.”
던스턴은 자신이 무엇을 하면 되는지 체칠리아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던스턴 사제님께서는 평소대로 그렉과 함께 있어 주세요. 필요한 것은 제가 다 알려드리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작업실인 별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루카스는 앉아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그들이 보였다. 그는 흔히 축복이라고 불리는 체질을 타고났다. 오랜 시간 교감과 훈련을 거치지 않아도, 그는 영원한 빛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모습을 숨겨도 그의 눈에는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허락받은 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통제할 수 없다.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영원한 빛을 섬기는 새벽녘 교단의 사제로서는 불경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에 올바른 일을 한 성인들이라도 죽은 자는 죽은 자다.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너무나도 흐렸다.
“무엇을 고민하고 있느냐.”
독특한 음색을 가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스는 눈을 떴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의 눈이 전에 없이 커졌다. 루카스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영원한 빛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헛것을 보고 있나.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또렷하게 보는 자신의 눈을.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가 너를 찾아온 이유가 네 그 눈 때문인데.”
루카스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참아왔던 숨을 내뱉듯 그는 그녀의 이름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안 되느니라. 아직은 말이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때문입니까. 지금 이 성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혼란이.”
“비슷한데, 좀 다르다. 사정이 복잡하구나.”
그렇게 말하자마자 영원한 빛인 그녀의 몸이 흐려졌다. 그 아이가 부르고 있어.
“그 아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것을 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구나.”
영원한 빛은 잿빛 가루가 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작업실의 작은 창문으로 바람이 불었다. 루카스는 작업실에서 나와 바람에 흩날린 가루가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시인의 숲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