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신랑 하는 걸 봐서. 그보다 먼저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신랑이 나서서 동종회사들을 설득시켜야 해. 팁을 하나 주자면 만약에 발벗고 가만히 있다는 얘기가 들리면 바로 고발 들어간다는 사실. 오래 못 기다려”
아영이가 고개를 숙여 눈을 지긋이 감고 입술을 악문다. 수리가 그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는다.
“도둑놈들. 완전히 독점하겠다는 말이네”
“아니! 윈, 윈 하자는 말이지. 싫으면 감방 가”
“어이 씨! 그만 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진데. 뭐 더할 말이 있어? 없으면 빨리 올라가”
전혀 심각하거나 진지한 면이 없는 장난처럼 던지는 말 하나 하나가 귀에 거슬리고 가슴을 아리게 하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일궈 여기까지 왔는데도 란 하소연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했다가는 도둑질한다고 고생 많았다는 핀잔이 먼저 나올 위인으로 변해 있었다.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냉혈동물로 탈바꿈시켜놨는지 궁금했지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그 과정에 자신도 포함돼 있지 않나 하는 죄책감이 먼저 떠올랐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거쳐 공장으로 갈 때까지 그 사람에 대한 의문이었다.
‘왜 저렇게 변했을까? 원래 그랬나’
수리는 며칠 내내 아영이를 만난 걸 후회했다.
전혀 변하지 않는 그녀에게서 역겨움 같은 게 느껴졌다.
기회에 따라 이 사람 저 사람에 붙어 알랑방귀나 뀌는 그런 사람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더라도 자의가 어느 정도는 갖춰진 사람으로 조금만 변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되돌려 봤다. 아영도 본인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한번도 자신을 깊이 성찰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로는 부족하다는 점도 느끼고 있었다.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지식과 학식을 가진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마음의 양식을 끌어주는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야 회장님과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게 될 것이지만 이대로라면 양아영과 똑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남을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양아영이 울산에 다녀가고 며칠 뒤에 연어는 수리가 보낸 긴장문의 첨부메일을 받았다. 그건 회장님에게 보낸 메일에 참조로 돼 있었다.
매일 내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뜬금없는 사업계획서도 그랬지만 그 속에 적힌 양아영의 이름이 연어를 놀라게 했다.
몇 차례의 출장으로 양아영이란 이름을 끄집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업계획서에는 양아영의 남편인 강성호가 올라 와 있었고 인수합병 계획에는 양아영이 대표로 올라 와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성호의 이름은 이미 도둑놈으로 늘리 알려져 있어 자칫 잘못하면 그 피해가 지금 연어 회사로 불똥이 튀어 신뢰만 떨어진다는 내용과 그 뒤로 그의 횡령에 대한 기록들이 상세하게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외의 중소회사들에 대한 횡령에 대한 기록들도 같이 첨부되어 있었다.
너무 철저한 조사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다시 한번 이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합방의 효과는 대단했고 자연스러웠다. 아주 잠시 이 사람과 멀어져야겠다는 다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제 통화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를 꾹 눌렀다.
“오빠! 뭐 하는 사람이야?”
어젯밤에 어디 가서 잠을 자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 와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앙탈 섞인 다그침과 같은 언성으로 물었다.
“깡패 새끼다! 자식아!”
너무 노골적인 대답이었다. 이건 그렇잖아도 뿔이 나있는 마누라의 염장을 갈갈이 파헤쳐 찢어버리는 ‘그래! 네 보다 훨씬 젊고 예쁜 애인하고 잤다’ 로 들렸다. 능글맞은 능구렁이와 같은 대답에 화가 더 나기 시작한다. 신랑을 젊고 자신보다 몇 천 배 예쁜 여자에게 갈취 당한 기분이었다.
‘그년이 누구야?’ 라고 닦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난치지 말고. 나! 지금 엄청 열 받았어. 지금 농담할 기분 아냐! 숨겨둔 우리 회사 직원이야? 뭐야? 솔직히 말해”
기분을 나쁘게 하는 콧방귀나 헛웃음 같은 소리는 아니지만 휴대폰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말이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허허! 너희 회사에서 용역을 받고 일을 하니 나는 항상 너희 회사 직원이란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니 직원이란 말이 틀리지는 않아. 그런데 보직은 너보다 높으니 반말하지마. 자식이 오냐! 오냐! 했더니 아예 무릎 위에서 장기 투숙하려고 해!”
전혀 진지하지 않은 대답도 그렇지만 단 며칠간의 해후로 예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야한농담까지 섞어가는 말에 나를 그렇고 그런 여자로 취급하나 하는 자괴감부터 먼저 불러 일으켜 어이도 없고 불쾌하기도 했다.
남자란 이런 종자란 걸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은연 중에 잠재해 있던 그리움과 연정에 이 놈도 그런 종류의 남자란 걸 잠시 망각해버렸다는 실수가 후회로 밀려 왔다.
같이 있지 않았던 오랜 세월 동안 이 사람도 이 사람의 세계에 녹아 들어 순수, 정직, 고 지식에서 탈피한 것 같았다.
아니면 그때 뜨거웠던 그 시절에 이 사람의 양날의 칼 중에 한날만 본 자신의 실수였다는 자책도 하게했다.
“그건 그렇고 내 메일 봤으니 물어보는데 그 양아영이 어떻게 할까? 고동우, 김경일이는 이 세계에 절대 발 붙이지 못하게 제거해버렸는데 양아영이는 어떻게 처리해버릴까 고민스럽네. 윤부장님의 처분대로 할까 싶은데 어떻게 할까? 뭉개버려?”
그걸 왜 나한테? 예전에도 그렇게 하지!
왠지 실망과 함께 섬찟함을 느꼈다. 이게 이 사람의 실체였나?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연어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건 연어가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치졸한 그림이었다.
그와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도 과거도 깡그리 무너뜨리는 잔인한 형장의 총성과도 같이 들렸다. 그는 평생을 이런 복수를 그려왔을지 모르지만 결혼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 사람도 양아영도, 이들에 대한 모든 기록들은 뇌에서 깔끔히 삭제하려고 했고 삭제되어 있었다.
가슴도 뇌의 지령을 잘 따라주었다. 간혹 떠오를 때가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지난 번에 만나 해후할 때도 절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떠올리면 마냥 따스했고 그리웠다. 그립지 않았다고 말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복수의 전조를 지난번에 넌지시 비쳐줬는데 어리석게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름대신 후배, 자네만 귀에 거슬렸다.
그게 이 사람의 신호였던가?
또 멀리 그의 곁에서 나를, 나의 곁에서 그를 멀리 보내버리려는 전조의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마음이 편해졌다.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알아서 떠나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 계획들 속에는 자신!
연어라는 사람이 전제로 내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
제발 잊어달라고 간절히 청하고 싶었다.
벌써 불안에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