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손은 눈보다 빠르다
“야, 강성룡. 너 진짜 죽어볼래?”
소영이 누나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사무실에 찾아왔다. 데뷔 이후 첫 방문이었다.
“누나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고 나발이고! 너 이 계약서랑 사진들 뭐야? 앙!”
“에이. 누나 왔으면 아영이 누나한테 인사부터 해야죠. 유명해졌다고 그러시면 안 돼요!”
“아영 언니 미안. 나 성룡이랑 얘기 좀 하고!”
“…그래.”
소영이 누나의 손에는 투바니 쇼핑몰 전속 계약서 사본과 사진 몇 장이 들려 있었다.
“보신 그대로예요. 누나네 기획사 연습생 한 명을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피팅 모델로 세워주시고, 방송할 때 저희 쇼핑몰 상품 가끔씩 노출시켜 주시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예요.”
“야! 그게 말이 돼?!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렇게 해줘?”
얼굴까지 시뻘게져서 소리를 지르는 소영이 누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민이 남자 친구 생겼다면서요?”
“헉…….”
화를 내던 것도 잊고 소영이 누나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은이 누나에게 듣기로 소영이 누나가 속해 있는 그룹의 멤버 중 한 명이 회사도 모르게 남자 아이돌과 연애를 하는 모양이었다.
“누나.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요. 그래도 명색이 투바니 쇼핑몰 창단 멤버인데 너무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서 신경 좀 쓸 수 있게 도와드리는 거예요. 누나 사장님한테 횡령 자료도 같이 보냈으니 잘 얘기해서 저희 좀 밀어주세요. 요즘 전직 연예인들이 자꾸 쇼핑몰만 차려서 죽겠네요.”
“야, 그거 얼마나 된다고 횡령이야!”
“팬들한테 금액이 중요한가요? 누나가 횡령을 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안 되겠어요. 계약서랑 사진 원본 좀 찾아주세요.”
조금만 밀어주면 적당히 넘어갈 일을 소영이 누나는 화를 자초했다.
소영이 누나를 따라온 매니저가 사무실을 뒤지려 했다.
“소영이 누나, 머리 위 좀 보실래요?”
사무실의 천장에는 얼마 전에 설치해 놓은 CCTV가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얼핏 보니 소영이 누나를 따라온 매니저의 얼굴이 꽤 낯이 익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하굣길에 내 에어맥스 신발을 빼앗아간 놈이었다.
“아영이 언니. 언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CCTV를 본 소영이 누나는 나와는 안 되겠는지 아영이 누나를 걸고넘어졌다.
“소영아, 자초지종을 설명해 줘야 언니가 무슨 일인지를 알지.”
“성룡이가 투바니 쇼핑몰 법인으로 바뀔 때 만든 전속 계약서랑 내 사진들 회사에 보냈단 말이야.”
아영이 누나가 나를 노려보았다.
“소영아, 미안해. 성룡이가 열심히 일하려다 보니 무리수를 둔 것 같아. 언니가 다 해결할게.”
“그렇지? 언니는 몰랐던 거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어. 근데 회사가 많이 힘들어졌어?”
“요즘 쇼핑몰들이 많이 생겨서 조금 힘들어지기는 했는데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영이 누나는 소영이 누나의 전속 계약서를 찾아주었고, 소영이 누나는 받아서 매니저에 건네주었다.
“내가 대표님에게 얘기해서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나 알아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소영이 누나는 노는 것에만 신경 쓰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마음이 여려서 그런지 투바니 쇼핑몰을 도와준다고 했다.
그리고 난 모두가 소영이 누나와 아영이 누나에게 집중하는 사이 쓰레기통에 있던 하은이 누나의 팬티스타킹을 소영이 누나의 매니저 가방에 몰래 집어넣었다.
스타를 할 때 나의 핑거 속도는 평균 600 이상으로 세계 10위 안에 들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팬티스타킹이 어떤 역할을 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강성룡 따라와!”
소영이 누나가 떠나고 아영이 누나는 열이 제대로 받았는지 나를 옥상으로 호출했다.
“누구 마음대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 거야?”
“전 투바니 쇼핑몰의 재무이사로서 전속 계약을 어긴 소영이 누나네 회사에게 합의를 하자고 보낸 것뿐이에요.”
“그 정도 일은 그냥 소영이한테 얘기해서 부탁해도 됐잖아.”
“일개 신인 연예인이 부탁한다고 회사가 들어줄 리 있나요? 그래도 이렇게 밑바탕을 깔아줘야 소영이 누나도 말하기가 편하고,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신경 쓰는 척이라도 하죠. 결정적으로 바빠서 전화도 받지 않는데 무슨 수로 부탁을 해요.”
“그래도 앞으론 그러지 마. 경고야! 동생한테까지 그런 짓 안 해도 될 만큼 잘나가고 있으니까.”
“누나. 우리가 비록 다른 쇼핑몰과는 차별화된 전략으로 선전을 하고 있지만, 금방 따라잡힐 거예요. 차별화된 전략이라고 해봤자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경고라고 했어. 두 번은 봐주지 않아. 성룡이 네가 자기 일처럼 일도 열심히 하고 해서 예쁘게 봐주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야!”
“제가 뭘 잘못한 거죠? 소영이 누나는 명백히 계약서에 나온 사항을 위반했어요.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서로 좋은 방향으로 해결하겠다는데 누나가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되네요.”
“나도 그렇고 소영이도 그렇고 널 직장 동료 이전에 동생으로 대했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누나이기 전에 회사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매혹 쇼핑몰만 보셔도 아시겠지만, 단지 전직 연예인이 차렸다는 이유만으로 한 달 만에 저희 쇼핑몰을 추월했어요. 어떻게 하든 계속 나아가지 못한다면 저희도 언젠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될 거예요.”
“그렇다 해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네가 슬비나 혜지를 못살게 구는 건 어느 정도 그 애들의 멘탈을 다져 줄 필요가 있어서 묵인해 줬지만, 그 이상은 안 돼!”
적어도 공과 사는 구별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다. 아영이 누나는 너무 강경했다.
***
소영의 기획사는 소영의 전속 계약서와 사진으로 대책 회의를 열고 있었다.
성룡이가 보낸 사진 속에는 밤새 술을 먹고 사무실에서 떡실신이 된 소영이의 모습들을 비롯해 다각도로 망가진 모습들이 잔뜩 있었다.
이미지로 먹고사는 연예인에게 이중 계약과 사진들은 큰 타격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소영은 무사히 전속 계약서와 사진 원본을 회수 할 수 있었고, 매니저와 함께 회의실에 도착했다.
“대표님, 계약서 회수해 왔어요.”
“휴, 다행이네.”
“매니저 오빠. 계약서 대표님 드리세요.”
“그래.”
소영의 매니저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계약서와 함께 누군가 신었던 흔적이 역력한 팬티스타킹 한 켤레가 딸려 나왔다. 스타킹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색 액체가 묻어 있었다.
얼핏 보면 로션 같기도 했지만, 상황이 애매했다.
“가방에서 왜 여자 스타킹이?”
“매니저 오빠?”
“아, 아니 저, 저는 모르는…….”
“윤소영 씨 매니저는 남아서 상황 설명 좀 해주시죠.”
소영의 기획사 사장은 무사히 계약서와 사진 원본을 회수 했음에도 성룡이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그리 어려운 제안도 아니었고, 이대로 성룡이의 제안을 무시했다가는 뭔가 사단이 나도 날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