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난 자격이 없어
슬비를 가르치며 바삐 보내는 사이 어느새 수능 날이 다가왔다.
“성룡아, 300점 밑으로 맞으면 출근할 생각하지 마!”
“그래 맞아, 요즘 보통 300점은 맞잖아!”
“성룡아, 긴장하지 말고 실력대로만 하면 돼. 파이팅!”
“성룡 오빠 파이팅!”
괜찮다는데도 굳이 가족들도 안 따라온 시험장에 누나들과 슬비가 따라왔다.
수능을 본다고 두 달 전부터 얘기를 했는데도 과도한 업무에, 책을 사다 놓고도 한 장도 못 보게 만든 장본인들이 말이다.
누나들과 슬비를 간단히 무시한 후 교실에 들어가서 봉인해 두었던 기억력을 활성화시켰다.
1교시 언어 영역.
비록 책 한 장 보지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 배운 국어 수업 내용이 머릿속에 있을 테고 난 그 기억을 모조리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제법 오래된 기억을 찾으려니 두통이 몰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두통이 조금씩 약해지더니 고 1때부터 고 3때까지 수업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말들이 또렷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정리를 한 후, 답을 적으려고 펜을 드는 순간 1교시가 끝이 났다.
그렇게 5교시 제2외국어 영역까지 난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범인의 능력을 벗어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지만, 기억력을 끄집어내는 데 약간의 버퍼링이 필요하다는 걸 간과했다.
“내가 요즘 웃을 일이 없었는데 성룡이 때문에 웃네, 웃어!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아, 진짜 웃겨 죽겠네. 아! 배 아파!”
비밀로 한다고 했는데, 나의 수능 점수를 어떻게 알았는지 하은이 누나와 소영이 누나는 눈만 마주치면 박장대소를 하며 약을 올렸다.
슬비조차 이를 꽉 물고 웃고 있는 모습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
수능이 끝나고 시범적으로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이 피팅한 사진들이 도착했는데 곳곳에 문제가 보였다.
“아영이 누나 아무래도 이번 옷들은 다시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인데?”
누나들이 섭외한 모델들은 패션모델처럼 키도 크고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었다.
“모델들이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긴 한데 다 너무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건데?”
아영이 누나조차 투바니 쇼핑몰의 장점을 알지 못했다.
“누나, 런웨이를 하자는 게 아니고 리얼웨이를 최대한 살리려고 아르바이트를 쓰는 건데 이렇게 할 거면 의미가 없습니다.”
“뭐, 예쁘기만 한데 왜 생트집이야?”
하은이 누나가 다가오더니 또 시비를 걸었다.
“생트집을 잡는 게 아니고, 고객의 입장에 서서 사진을 찍어 보자고 한 거였잖아요. 근데 죄다 이렇게 키 큰 사람만 뽑아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리고 잃어버린 동생들이라도 찾아오셨어요? 하은이 누나랑 얼굴도 다 똑같이 생겼잖아요.”
“야, 너 말 다 했어?”
“소리만 지르지 말고, 사진을 잘 보세요. 이런 모델들한테는 헌 옷 수거함에 있는 옷들을 입혀놔도 예뻐 보일 겁니다.”
“그러게 이렇게 모아서 보니까 얼굴이 다 똑같이 생기기는 했다.”
“제가 봐도 똑같아 보이는 것 같기는 해요. 언니.”
아영이 누나하고 슬비가 내 편을 들어주자 하은이 누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 아니야. 나 안 했어.”
“누나가 성형수술을 했든 안 했든 관심 없고요. 중요한 건 이렇게 올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누나들이 피팅한 것보다도 못한 결과만 나올 뿐이에요.”
“이 씨! 너 진짜 죽을래?”
“언젠가 죽겠지만, 지금은 아니고요. 슬비 데리고 제가 섭외 갔다 올 테니 누나들이 사무실 좀 지키세요.”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데?”
“저도 투바니 쇼핑몰의 구성원으로 이 정도 권한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나들이 프로모션의 취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키 크고 예쁜 사람만 데리고 와서 입은 피해액이 수백만 원입니다.”
“칫.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첫째, 쇼핑몰에서 가장 많이 나가는 사이즈는 55사이즈입니다. 그렇다면 모델도 55사이즈 체형이어야지 최대한 고객들의 괴리감이 줄어들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 둘째, 같은 얼굴, 같은 몸매의 사람에게 옷을 입혀놓고 사진을 찍을 거면 피팅 모델들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예전처럼 마네킹에 입혀놓는 거랑 뭐가 다르겠어요?”
“그걸 왜 네가 판단하는 건데?”
“제가 판단한 게 아니고, 고객의 소리에 들어가 보세요. 다 고객들이 불편해 하거나 건의한 부분들이에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지금까지 잘해내고 있거든.”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그건 누나하고 소영이 누나가 워낙에 밑바탕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몸의 라인도 제법 훌륭하고, 그렇다고 빈약하지도 않잖아요. 게다가 기본적으로 웃는 얼굴이라 활기차 보이고요. “
“야! 나 C컵이거든.”
“아이템 착용한 거 다 알고 있어요.”
“이 씨. 너 진짜…….”
“자! 그만들 하고 그러니까 성룡이 네가 하고 싶은 말은 차라리 평범한 사람들을 섭외하자는 거였어?”
“꼭 그런 건 아니고, 얼굴도 예쁘고 날씬하지만 가슴은 작다거나, 얼굴도 예쁘고 가슴도 크지만 다리가 조금 짧은 사람들이요.”
“읭?”
“그렇게 해야 고객들의 괴리감도 최대한 줄일 수 있고, 옷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리가 짧지만, 코디를 통해 다리를 길어 보일 수 있게 연출을 하는 거죠!”
***
슬비를 데리고 압구정 번화가에 있는 커피숍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수백만 원의 손실을 끼친 소영이 누나와 하은이 누나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억울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오빠, 근데 하은이 언니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다음엔 네가 될 수 있으니까 앞이나 봐라.”
“저요? 전 진짜 안 했어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슬비는 영 분위기 파악을 못 했다.
“표정 관리해라, 직장 생활 계속하고 싶으면.”
“네?”
“어렸을 때 말이야. 동네에서 뛰어놀다가 엎어진 적이 있었거든. 근데 동네 꼬맹이들이 내가 엎어진 게 재밌는지 웃고 있더라고. 어떻게 됐을 것 같냐?”
“저 안 웃었는데…….”
“웃는 것보다 더 기분 나빴다. 난 네가 함부로 상상하고 웃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알았냐?”
“…네.”
커피숍에 들어오고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마음에 드는 여자가 지나갔다.
“야, 가서 저 여자 섭외해 와!”
“제가 가요?”
“그럼 내가 가리?”
이왕이면 같은 여자인 슬비가 접근하는 것이 여자들의 경계심을 늦추는 데 좋을 것 같았다.
“오빠, 연락처 받아왔는데 키가 너무 작은데요?”
“160만 넘으면 된다. 나머지는 포토그래퍼가 알아서 해줄 거야.”
슬비가 돌아오고 나서 바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지나갔다.
“저기! 저 여자!”
“누구요?”
“청바지에 흰 와이셔츠 위에 재킷 입은 여자.”
“오빠, 너무 평범하게 생기지 않았어요?”
“그냥 갔다 오지? 저 여자 놓치면 오늘 집에 갈 생각하지 마라.”
요 며칠 잘해줬더니 슬비의 말대꾸가 늘었다. 피팅 모델의 얼굴은 누나들처럼 진짜 눈에 띄게 예쁘지 않은 이상 차라리 평범한 얼굴이 좋았다.
“헉헉. 오빠 다녀왔어요.”
“그래. 저기 노란 옷 입은 여자.”
“…네.”
“저기 긴 생머리.”
“네.”
“저기 여자 세 명중에 가운데 여자.”
“네.”
“저기 남자랑 팔짱 끼고 가는 여자.”
“네.”
두 시간 정도 캐스팅을 한 끝에야 필요한 모델 세 명을 모두 섭외할 수 있었지만 섭외가 끝난 것과 관계없이 슬비는 하루 종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계속 뛰어다녀야 했다.
슬비는 이날 하루, 열일곱 개짜리 계단을 97번 왕복했다. 100번을 채울까 하다가 커피숍에 있던 사람들의 눈총이 너무 따가워 봐주기로 했다.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슬비였지만, 난 인생 선배이자 직장 선배로서 표정 관리 못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면 어떻게 되는지 충분한 교훈을 남겨주었다. 알아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성룡이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고 아영은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성당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성룡이가 시험을 망치게 해달라고.
아영은 성룡이가 힘들까봐 일부러 슬비를 데려와 놓고선 또 성룡이가 공부를 할 시간이 없게 하은과 소영이가 일을 떠넘기는 걸 적당히 방치했다.
설사 방해를 하지 않아도 그리 좋은 성적을 내기는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걱정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하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성당까지 찾아왔다.
애써 거부하려 했지만 아영은 알고 있었다.
성룡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이 그저 친동생 같거나 직장 후배를 바라보는 마음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난 자격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