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엄마! 이 자식이야!
집으로 돌아간 나는 다음 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
-I BELIEVE 그대 곁에 없지만.
하은이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야, 강성룡. 너 왜 출근 안 해?”
“공부할 겁니다.”
“너 어제도 치사하게 먼저 가더니 이럴 수 있는 거야?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어?”
“끊을게요.”
욕이라도 한 번 하고 끊을까 하다가 구질구질한 것 같아서 참았다.
-I BELIEVE 그대 곁에 없지만.
소영이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성룡아, 왜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인수인계라도 해주고 그만두는 게 예의 아닐까? 누나들이 너한테 그리 섭섭하게 대한 것 같지는 않은데…….”
“끊을게요.”
이후로도 계속 소영이 누나와 하은이 누나한테 수십 통의 전화가 왔다.
창고에 물건이 어디 있는지, 서류가 어디 있는지, 업체 전화번호가 뭔지 등등…….
저녁 6시.
잠깐 핸드폰 배터리를 교체하는 사이 아영이 누나의 음성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성룡아, 이렇게 관둔다고 하니 누나가 많이 섭섭하네. 오늘 업체 미팅이 있어서 이제야 연락을 받았어. 그래도 성룡이 덕분에 힘들어도 의지하고 버틸 수 있었는데 많이 아쉬워.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동생, 훌륭한 동료였는데 말이야. 조금만 더 있으면 사무실도 옮기고 직원도 충원될 텐데, 누나가 더 신경 쓰지 못해서 이렇게 된 것 같아 많이 안타까워. 우리 성룡이는 똑똑하니까 어디를 가도 인정받고 대우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잘 지내고 연락은 하고 지내자!]
아영이 누나 역시 내가 왜 출근을 안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럴 때 조성민 병장님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어제 마음 같아서는 클럽 문지기 놈을 묵사발을 내주고, 누나들 전화 역시 받지 않으려 했는데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심부름만 시키고, 투덜거리고, 얄밉게 행동한 누나들이었는데 이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공허해 지는 것 같았다.
투바니 쇼핑몰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니 물건이 제대로 나가지 못했는지 컴플레인 글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밤 11시.
-I BELIEVE 그대 곁에 없지만.
소영이 누나에게 또 전화가 왔다.
“성룡아, 엉엉. 미안해 누나가 다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소영이 누나가 다짜고짜 울기 시작했다.
“누나가 뭘 잘못했는데요?”
“이제 커피 심부름도 안 시키고, 얄미운 행동도 하지 않을게. 흑. 성룡이가 다 받아주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 약속할게. 정말이야. 엉엉.”
마음이 약해졌다. 잠깐 화가 나기는 했지만 누나들과 함께 계속 지내고 싶었다.
“알았어요. 지금 다 사무실이에요?”
“응. 훌쩍. 아영이 언니랑 하은이랑 다 사무실에 같이 있어.”
“지금 택시 타고 갈게요.”
“정말? 엉엉. 성룡아, 정말 고마워. 누나가 이제 진짜 잘할게.”
직원 네 명이서 힘겹게 하던 업무였는데, 내가 출근하지 않자 마비가 된 모양이었다. 게다가 외부에서도 일을 해야 했던 누나들과는 달리 나는 사무실 붙박이였고, 거의 두 명 몫의 일을 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했더니 하루 만에 사무실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었고, 예쁜 여자거지 세 명이 창고에서 옷을 꺼내와 포장을 하고 있었다.
***
“성룡아, 누나 커피 한 잔만 부탁해.”
“나도!”
“난 성룡이가 타주는 커피가 제일 맛있더라.”
누나들은 울고 짠 일은 기억나지 않는지, 이틀이 지나지 않아 다시 본색을 드러냈다.
“성룡아, 밥 먹으러 가자!”
단지 변한 게 하나 있다면 이제는 밥을 전부 다 같이 가서 먹는 정도였다.
나로 인해 얼음물 서비스를 시작한 김밥천국은 날씨가 선선해지자 따듯한 보리차가 담긴 물병을 갖다 주었다.
“이모 딸이야? 예쁜데?”
“우와! 정말 예쁘다. 근데 아직 고등학생 같은데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어도 되나?
보리차를 갖다 준 여자를 보고 누나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말도 마라. 저 빌어먹을 년 공부 안 하고 사고란 사고는 다 치더니 이번엔 학교까지 잘렸다.”
가뜩이나 얼굴에 심술이 가득한 이모는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엄마. 나 억울하다니까.”
“이년아!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엄마 도와주러 왔으면 조용히 도와주다가 가면 되지. 학생이 교복 입고 담배를 피워서 그 난리를 부려놓고선 뭐가 억울해!”
“이모.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요즘은 검정고시 봐서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대학교도 다 갈 수 있어. 근데 담배 좀 폈다고 학교 잘리기까진 하지 않을 텐데?”
“그게 가뜩이나 근신 중인데 어떤 염병할 놈이 시교육청, 도교육청에 사진까지 찍어서 올려놔 가지고 학교에 난리가 났었나 보더라.”
이모랑은 아직 어색한 사이였기에 고개를 박고 참치 덮밥을 먹고 있는데, 이모 딸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166cm 정도의 작지 않은 키에 운동화를 신고 있음에도 라인이 살아 있었고, 청순한 것 같으면서도 얇은 입술이 살짝 올라가 있어 섹시 미까지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 얼굴이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잠들어 있던 나의 인지력과 판단력이 급속도로 활성화 되더니 도망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위험에 빠지자 최대한 빠르게 나갈 수 있는 동선이 눈앞에 그려졌다.
“엄마! 이 자식이야!”
이슬비의 외침과 동시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난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정문은 이미 이모에 의해 막혀 있었고, 소영이 누나가 후문을 막고 있었다.
일반인의 범주 밖에 있는 나의 인지력과 판단력도 여자들의 직감보다는 한 수 아래였나 보다. 근데 소영이 누나는 누구 편인지 모르겠다.
“꿇어!”
세상이 어느 시대인데 이모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으라고 하셨다. 난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저 투철한 시민 정신이 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무릎은 조금씩 바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 이 빌어먹을 놈아!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잘 타일러서 보내면 되지! 그걸 사진까지 찍어서 교육청에 보내냐! 이 염병할 놈아!”
난 누나들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사실 누나들만 아니면 내가 굳이 여기서 굴욕을 당할 이유는 없었다. 안 오면 그만인 곳이었다.
“이모 퇴근 시간 전까지만 보내주세요.”
“소영이 누나?”
“성룡아, 너 사람이 그러면 안 돼! 너는 학교 다닐 때 담배 안 폈어? 어쩜 그럴 수가 있니? 실망이야.”
소영이 누나에 이어 하은이 누나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믿을 건 아영이 누나밖에 없었다.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 놨으니 책임지라고 하려 해도 성룡이가 책임지기에는 이모 딸이 너무 예쁘네요. 이모! 그래도 저희한테는 소중한 아이이니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면 해요.”
도와주는 건지, 더 거드는 건지 모를 말로 아영이 누나까지 나를 외면했다.
난 클럽에 이어 누나들에게 두 번째 버림을 받았다.
***
성룡이를 김밥천국에 두고 온 아영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클럽을 다녀온 다음 날 성룡이가 출근하지 않았을 때도 그러더니 오늘도 역시 뭔가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왠지 이대로 계속 두면 진짜로 성룡이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런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잘 다니면 좋고, 못 버티고 나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성룡이 없다는 것은 일이 잠시 마비되는 걸 떠나서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성룡이와 함께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영은 퇴근 후에 김밥천국을 찾아갔고 이모를 설득해 이슬비를 투바니 쇼핑몰에 출근시키기로 했다.
성룡이 마음의 짐도 덜어주고, 그에게 몰려 있는 많은 일들을 이슬비에게 나누어줄 생각이었다.
다행히 이슬비는 쇼핑몰 사업에 관심을 가졌고 미모도 훌륭했다.
게다가 이모 역시 어차피 딸을 이렇게 방치하느니 취직을 시켜주겠다는 말에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인원 정리였다.
그만큼 인건비는 회사 대표에게 있어 가장 부담스럽고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영은 성룡이를 위해서 이슬비를 회사에 데려오는 것에 대해 작은 망설임조차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