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성룡 씨 커피 한 잔만 부탁해
“성룡 씨 커피 한 잔만 부탁해.”
피팅 모델 중에 한 명인 정하은이 출근한 지 이틀 만에 나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시켰다.
나이는 스물네 살이고 피팅 모델이라 그런지 얼굴도 제법 예쁘고, 몸매도 꽤 괜찮았다.
근데 중요한 건 일체의 동의나 양해도 없이 나에게 말을 놓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커피 심부름을 시키면서 말이다.
난 이 어이없는 상황에 판단을 하지 못하고 이아영 대표님을 바라봤다.
“막내야, 나도 한 잔 부탁해.”
‘막내…….’
이아영 대표님은 그래도 대표인지라 조금은 더 현명하고 바른 결정을 내려주실 줄 알았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인 것 같았다.
적어도 회사의 대표라 하면 공과 사를 구분하고, 격식 있는 호칭을 사용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군대를 가기 전이라면 여자사람의 커피 심부름을 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어느 정도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기로 결심을 한 나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커피 두 잔을 타서 대표님과 정하은에게 가져다주었다.
“막내야! 누나는 왜 안주는데? 사람 차별하는 거야?”
대표님과 정하은에게 커피를 갖다 주자 간판 모델인 윤소영이 귀여운 척을 하며 투정을 부렸다.
이번에도 나의 호칭은 막내였다.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분명히 내가 커피를 타러 탕비실에 들어가는 걸 봤을 텐데, 한 번에 시키지 않고 두 번 일을 시키는 윤소영이었다.
“소영아, 하은아. 밥 먹으러 가자.”
“막내야, 사무실 잘 지켜.”
12시 점심시간이 되자 대표님과 정하은 그리고 윤소영 셋이서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회사에는 전화를 받아야 했기에 사무실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네 명의 직원이 있으니 식사는 두 명씩 번갈아 다녀오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아영 대표님은 나만 혼자 사무실에 남겨두고 나가셨다.
“막내도 밥 먹고 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대표님과 정하은, 윤소영이 들어왔고, 난 혼자서 밥을 먹으러 나가야 했다.
혼자 식사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뭔가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도 점심은 먹어야 하니 사무실 앞에 있는 김밥천국에 들어가 불고기 덮밥을 시켰다.
그런데 일하는 아주머니인지, 사장님인지 TV를 보고 있으면서도 물과 김치를 갖다 주지 않았다.
“아줌마, 여기 물이랑 김치 좀 주세요.”
TV를 보고 있던 아주머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정수기 위를 바라보셨다.
[셀프 서비스]
‘성룡아, 모든 사람에게 고개 숙이는 게 싫으면 적어도 갑과 을을 구별해서 처신을 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는 선임들이 갑이고 네가 을이다.’
조성민 병장의 말에 따라 이아영 대표님과 정하은, 윤소영은 나에게 갑이었다. 하지만 김밥천국에서는 내가 갑이었다. 누가 뭐래도 손님은 왕이다.
“셀프인데 뭐 어쩌라고요? 셀프가 뭔지 몰라요? 고객들이 직접 물을 갖다 먹는 대신 사장은 그 아낀 인건비만큼 고객에게 돌려주는 게 셀프 서비스인데, 밑반찬이 잘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곳에 비해서 싼 것도 아니고, 바빠서 못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아줌마는 TV 보고 있으면서 손님한테 직접 갖다 먹으라고 하는 건 아니죠?!”
나의 고함과 함께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지만 난 괘념치 않았다.
“이 총각 보세!”
“보긴 뭘 봐요. 물이랑 김치 가져오세요. 선진 문화의 서비스를 하려면 적어도 그 시스템에 대해서 공부부터 하세요. 종업원은 놀면서 고객들이 알아서 갖다 먹는 게 셀프 서비스가 아니고, 바쁜 종업원들을 위해 고객들이 수고스럽더라도 직접 갖다 먹는 대신 그만큼 고객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셀프 서비스입니다. 아시겠어요?”
식당 안에서 큰소리를 내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불편해 했고, 그제야 아주머니는 불만스런 얼굴로 물과 김치를 갖다 주었다.
***
쇼핑몰에 취직한 지 이틀이 지나고 나는 다시 한 번 남의 돈을 먹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퇴근 후 무거운 어깨로 집에 들어오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왜 나만 빼고 계속 밥을 먹는 거지?’
오늘도 역시나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던 가족들은 내가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침묵에 들어갔다.
“누나.”
“…….”
단지 누나를 부르는 것만으로 식탁에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누나는 오늘도 역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안해.”
“…….”
“…….”
아버지와 어머니는 놀란 듯 나를 바라보셨지만 눈빛에는 조금 전 내가 한 말에 대한 불신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누나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들리지 않는지 젓가락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게냐?”
아버지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보셨다.
“안 아픈데요…….”
“그런데 왜 그러는 게냐? 아침에도 일찍 나가는 것 같은데 어디를 나가는 거고?”
“취직했습니다.”
“…….”
“…….”
아버지는 또다시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난 내 대답에 대해 뭔가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오늘도 입을 닫아버리면 앞으로 관계를 회복하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어렸을 때 누구나 겪는 방황의 시기에 조금 방황을 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군대라는 곳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워 이제는 조금 변해보려 합니다.”
“네가 말하는 방황의 시기를 누구나 겪기는 하지만 너처럼 어머니한테 욕을 하고, 누나를 때려서 입원을 시키지는 않지.”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거다. 그냥 화가 나서 추임새로 혼자 ‘시발’이라고 한 적은 있지만, 어머니에게 욕을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누나가 입원을 했었다는 것은 오늘 알았다. 중학교 때 하도 잘난 체를 하며 잔소리를 하기에 딱 한 대 쥐어박은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날 이후로 누나가 며칠 안보인 것 같기는 했다.
“어렸을 때 일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네게 한 번 더 기회를 줘도 되겠느냐? 믿어도 되겠느냐는 말이다.”
“물론입니다.”
기회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버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은 다음 날 아침부터 내 침대 옆에는 만 원짜리가 한 장씩 놓이기 시작했다.
***
성룡이의 이력서 내용이 내심 걸렸던 이아영 대표는 결국 이력서를 윤소영과 정하은에게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성룡이는 아닌 것 같아 동생들과 상의한 후 출근하라고 했던 말을 번복하려는 것이었다.
“풉.”
“재밌는 아이네!”
예상대로 정하은과 윤소영은 이력서를 보더니 바로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너희가 생각해도 이 사람은 아닌 것 같지?”
“왜 언니는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나는 재밌을 것 같은데?”
“나도 뭐!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어차피 당장 사람이 급한데 찬물, 더운물 따질 때가 아니잖아.”
“…….”
하지만 정하은과 윤소영은 이아영 대표가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니, 일단 일 시키고 막 부려먹으면 되지! 못 버티면 알아서 나가겠지.”
“그래 언니, 괜히 출근하라고 했다가 나오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런가? 너희들이 그렇게까지 얘기하니 그럼 일단 일 시켜볼까?”
“오케이!”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