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누나, 돈 있으면 만 원만 줄래?
1999년.
스타크래프트의 붐으로 PC방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고, 어렸을 때부터 유독 게임을 좋아했던 난 스타크래프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만 오리지널 시절부터 스타를 즐겨왔던 친구들에 비해 늦게 시작한 탓인지 매번 쓰디쓴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하교 후 한 판에 1,000원씩 걸고 하는 내기 스타가 유행이었던 그 시절, 매일 난 친구들의 지갑을 부풀려 주기에 바빴다.
학교 성적을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 진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난 리플레이 동영상도 보고, 스타 고수가 있는 PC방을 수소문해서 스타를 배웠다.
하지만 친구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는지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내내 단 한 번도 나에게 승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2학기가 시작되었고, 스타를 같이 하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공장에 취업을 했다.
나 역시 공고 졸업을 앞두고 있었지만, 공장에 다닐 생각이 없었기에 PC방에 위장 취업을 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PC방에는 스타크래프트 LEADER 순위 3위의 유저가 있었고, 난 그에게 6개월간의 트레이닝을 받고 나서야 준프로급의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친구들은 이미 스타를 접고 노블레스라는 게임으로 갈아탔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타를 아예 안 한건 아니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친구들을 상대로 이기는 건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스타크래프트 전적: 9,458승-4,854패-1무]
아시아 채널 아쿠아 길드의 길드마스터.
난 국민 맵인 헌터와 로스트템플에서 세 종족 모두의 빌드를 이해하고,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서 무패의 행진을 이어갔다. 하지만 친구들이 떠난 스타크래프트에 더는 흥이 나지 않았다.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 사이 어느새 졸업을 하게 되었고, 나 역시 자연스레 친구들을 따라 노블레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노블레스는 그동안 내가 해왔던 스타크래프트, 철권, 더킹, 스트리트파이터 같은 게임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노블레스는 게임이 아닌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있는 사이 노블레스의 여섯 번째 서버인 발록에서 성혈맹인 해적혈맹에 가입 할 수 있을 만큼 고수가 되어 있었다.
해적혈맹은 적어도 레어급 이상의 아이템을 착용하고, 30레벨 이상의 고 레벨이 되어야만 가입할수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사냥을 하며 레벨을 올리고 장비를 모아야 했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방법이었다.
어떠한 전략이나 컨트롤 없이 순수 노가다를 한다는 건 나의 뛰어난 머리와 통찰력에 대한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친구들의 수준과 빨리 가까워지기 위해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하여 먹자, 사기, 낚시를 했다. 노블레스는 그동안 나도 몰랐던 나의 숨겨진 능력을 알게 해주었다.
남들이 힘들게 잡은 몬스터에 붙어서 토글만 누르고 있다가 아이템을 훔쳐 먹었고, 교묘한 심리전으로 상대방이 알아서 장비를 갖다 바치게 했으며, 뛰어난 언변으로 경비병 앞에서 날 죽이게 만들어 상대방이 아이템을 드랍 하게 만들었다.
정말 매력적인 게임이었다. 친구들이 일주일 내내 사냥을 해서 모은 금액을 난 나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단 한순간에 모을 수 있었다.
친구들의 부럽다는 눈빛을 볼 때마다 남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너 그러다 칼 맞는다.’
친구들은 어지간히 부러운지 나에게 질투 어린 말을 쏟아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타고난 재능이 다르니 말이다.
노블레스를 함에 있어 난 타고난 천재였지만, 그렇다고 노력 없이 이루어진 대가는 아니었다.
나의 낚시와 사기 패턴이 알려지면 다른 새로운 방법을 다시 연구했다. 사기 패턴이 알려지는 것보다 내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항상 한발 빨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PC방 아르바이트를 유지했던 난 하루에 열두 시간씩 사기, 낚시, 먹자를 했다.
‘너 그러다 경찰에 잡혀간다. 적당히 좀 해!’
친구들은 아직 어려서 그런지 법에 대해 잘 몰랐다.
내가 하는 행동은 다른 유저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분명했지만, 법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노블레스의 약관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피해를 주는 행위를 방지한다고 나와 있었지만, 그 정도 약관은 얼마든지 피해내면서 할 요령이 있었다.
하지만 노블레스로 인해 즐거웠던 시간은 고작 1년이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이유로 군대를 가야 할 날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
2001년 5월 현역으로 입대하였다.
군대 생활을 했던 2년 2개월은 21년을 살아오며 겪었던 그 어떤 험난한 시련과 아픔보다도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 2년 동안 매일 PC방에 앉아서 게임만 했던 내 무릎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고, 훈련소 입소와 동시에 급격하게 늘어난 운동량으로 다리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군대라는 곳은 아파도 충분히 쉴 수 없었고 처방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배가 아파도, 머리가 아파도, 무릎이 아파도 의무실에서 주는 약은 항상 똑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며 모두 버텨낸 결과, 그동안 나에게 부족했던 인내심이라는 것을 배워 무사히 제대할 수 있었다.
언제나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게, 군대는 나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무 원망 없이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보며 내가 얼마나 헛된 일로 인생을 낭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인생의 방향을 혼자 결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생각 없이 살아왔던 내게는 더더욱이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조언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내게 그런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패싸움을 일삼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군대 가기 전까지는 게임에 빠져 있던 나를 더는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도 말이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네 인생에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으마.’
중학교 시절, 한창 방황의 시기에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내 인생에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던 그 약속을 아버지는 지키셨고, 그 어떤 관심과 일체의 지원도 해주지 않으셨다.
어머니 역시 삼시 세끼 밥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부모된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군대를 제대했으니 일자리를 알아보려면 차비라도 있어야 하는데 주머니에 천 원짜리 한 장조차 없었다.
한참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고 있는데 마침 대학교 졸업반이던 누나가 예쁜 투피스 정장을 입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나, 돈 있으면 만 원만 줄래?”
“…….”
차비라도 얻을 겸 말을 건넸지만 내 말은 나만 들리는지 누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
7년 전이었다.
강선옥이 동생 성룡이와 말을 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선옥은 지금이라도 다시 집으로 들어가 만 원을 줘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끝내 발길을 돌리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화해를 하기에는 동생 성룡이와 쌓인 앙금이 너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