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가 마저 밥을 먹는다.
“여전히 국밥집이네.”
어디서 듣던 목소리가 해주 귓가를 맴돈다.
슬쩍 스치는 향기도 해주의 코끝을 간지럽힌다.
자신 앞에 유란이 환하게 웃으며 쳐다본다.
“뭘 그렇게 멍해?”
“어, 어.. 웬일이야?”
“웬일이냐고? 못 올 때 왔어? 말투가 왜 그래? 간만에 봐서
좋았는데 그새 기분 나빠지려 해. 뭐야..”
유란이 입을 쭉 내밀고 고개를 돌린다.
“아니, 내말은 내일 오는 게 아닌가 해서.. 무슨 일 있는 줄 알
고 놀랐잖아.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야.”
유란이 피식 웃는다.
“생가보다 일이 빨리 끝났어. 천천히 올까 했는데 혹시 나없는
사이에 또 무슨 일이라도 터질까봐.. 자꾸 신경 쓰이잖아. 네가.”
“아.. 그래.. 그랬구나..”
해주가 애써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뭐야... 이제 정말 끝이네..”
혼잣말을 하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는 해주를 보며
유란이 쳐다본다.
“뭐가 끝인데?”
아, 맞다. 이들은 모든 소리를 듣는다.
“아니야. 잘 왔어.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해주가 유란을 바라보며 뒤늦게야 환하게 반긴다.
“치, 빨리도 반긴다. 근데 왜 혼자야? 그 녀석은? ”
“그 녀석? 누구? 준영? 아님 우리 자기?”
“자기...웃겨. 언제부터 자기가 됐어? 하여튼 꽁냥거리는 건
여전하구나.”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는 해주다.
“준영인 요즘 바빠서 정신 없구, 그 사람은 일이 있어서 좀
늦을 것 같아. 아니다 아마 올 때 된 것 같은데..”
“꼬마는?”
“꼬마? 아.. 부모님한테 갔어. 그동안 준희가 힘든 일이
있었거든.”
“무슨 일 ?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유란이 의외로 준희에게 관심을 갖는다.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처음 만난 둘이었지만 싹싹한 준희 때문에 유란도 마음 열기
쉬웠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친구가 생긴다는 것은 인간이나 아니나 행복한 일이다.
“뭔데? 무슨 일이냐니까?”
유란이 걱정스런 마음에 해주를 닦달한다.
뭐라 말할까..
분명 사실대로 얘기한다면 아마 그 남자는 유란에게 목을
뜯길 것이 뻔하다.
아무리 차가운 구치소에 몸을 숨기고 있어도 어떻게 해서든
유란은 자신이 직접 나설 게 눈에 훤히 보인다.
“그게.. ”
해주가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점점 유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해주가 목이 타는지 물을 마시며 유란의 눈치를 살핀다.
“그래서? 그래서 그걸 가만 놔뒀어? 찬이는 그 녀석을..
하긴 그 자식이 뭘 어쩌겠어.. 내가 있어야 했는데..
하루만 늦게 갔어도 됐는데.. 그런 놈은 내 손에 확
죽었어야 했는데..”
유란이 주먹을 불끈 쥐고 매서운 시선을 보인다.
“걱정 마. 지금은 괜찮아 졌어.”
“괜찮아 지긴.. 평생 마음에 남는 거야. 그 공포랑 두려움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나 같은 것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해.
내가 원한 건데도 그 무서움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고..
준희 기집애가 얼마나 여린데.. 지 오빠 걱정 할까봐 내색을
안 하는 것뿐이야. 뻔해."
유란이 정말 진심으로 준희를 걱정한다.
“알아. 알고 있어.”
어느새 준영이 자신들 옆에서 모습을 보이며 피식 웃다가
앉는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해주가 불쑥 나타난 준영을 보며 묻는다.
“쭉. 아까부터 쭉.. 죽었어야 했다는 소리까지 다 듣고
있었어.”
“근데 왜 그러고 있었어?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좀 하지.
남 얘기 몰래 듣는 거 나쁜 버릇이야.“
해주가 슬쩍 흘겨본다.
“남 얘기? 남 얘기 아니거든. 내 얘기거든. 말은 똑바로 하자.
지들이 나 몰래 얘기하고선 내 탓이야.”
준영이 툴툴대며 물을 마신다.
“하여튼 뭐든 간에 기분 나쁘지 않네. 준희한테 든든한 언니가
생긴 거잖아.”
유란을 쳐다보는 준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뭔가... 지금 이 상황은...
해주가 그 둘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쳐다본다.
“됐거든. 누가 언니한데? 지 맘이야.”
유란이 어색한 듯 준영의 눈길을 파한다.
그나저나 해주의 즐거움은... 해주의 중독은 여기서
끝이 난 것이다.
갑자기 모든 기운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너, 말해봐?”
유란히 해주의 냄새를 맡으며 코끝을 찡그린다.
“뭐.. 뭘?”
해주가 얼떨결에 말을 머뭇거리며 쳐다본다.
“달라졌어. 네 냄새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단 말이야.”
“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해주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준영이 그런 해주를 살피다 이내 희죽 웃으며 헛기침을 해댄다.
“뭐야 넌 또?”
해주가 준영에게 눈길을 돌린다.
“내가 뭐?”
“나, 멀쩡하거든. 냄새라는 게 틀려 질수도 있는 거지. 향수를
뿌렸던가.. 비누를 바꿨던가.. 별거 다 트집이야.”
이번엔 해주가 또박또박 말을 이어간다.
“쓸데없는 생각 마. 준영이 너도 그렇고.”
“아니, 이건 아니야. 넌 분명 속이고 있어.”
“그만하지.”
갑자기 설찬이 들와 인상을 쓰며 해주 곁에 앉는다.
준영이 슬쩍 비켜 앉는다.
“말도 없이 왔다 갔다 잘한다? 언제 온 거야?
예정은 내일 아니었어?”
“이것들이 진짜 쌍으로 놀고 있어. 내가 언제오든 무슨
상관인데? 못 올 때 온 것처럼 말하네?”
“아니, 아니야.”
해주가 재빨리 유란을 살피며 설찬에게 그만하라는 듯
눈짓을 준다.
설찬이 팔짱을 끼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유란을 쳐다본다.
“도대체 내 집은 언제까지 들락거릴 건데? 분명 내 집이야.
주인 하락 받고 오는 건 당연한거 아닌가?”
설찬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든다.
“네 집? 웃겨. 거기는 내 집이기도 해. 잠시지만 내가 머물 던 곳,
내가 다시 태어난 곳. 내 집이야. 싫으면 네가 딴 집을 찾아.
난 계속 쭉 내 맘 데로 들락거릴 거니까.”
준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설찬이 그런 준영을 차갑게 쳐다본다.
“맞는 말이네. 다시 태어난 곳. 잠시 머물던 곳. 그럼 집이 맞잖아.
고향이라고 해야 하나?”
준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장난스레 농담을 한다.
그러고 보니 준영이도 많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거리감을 두고 눈치를 살피더니 이제는 겁 없이 설찬을
놀려댄다.
설찬이 갑작스레 준영의 의자를 밀쳐낸다.
유란이 재빨리 준영의 의자를 자신에게 끌고 와 앉힌다.
정말 잽싸다. 정말 한순간에 움직임이다.
준영이 자신도 놀랐는지 잠시 멈칫하다 설찬에게 희죽 웃어
보인다.
“아주 쌍으로 놀고 있어. 웃겨.”
해주가 뽀로통한 표정으로 설찬 옆에 붙어 앉으며 그들을
흘겨본다.
“네들 우리 자기 함부로 건들지 마. 언제부터 그렇게 죽이
맞았다고 아주 대놓고 장난질이야.”
해주가 설찬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그리곤 그의 손을 잡으며 마음을 달래는 듯 만지작거린다.
“쌍으로 놀고 있는 건 니들이야.”
유란의 행동은 자신도 모르게 나온 것이다.
준영이 넘어질까 싶은 마음에 생각지 못한 행동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멋쩍은 듯 유란이 고개를 돌리자 준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바램에 다시 또 고개를 해주에게 돌린다.
준영이 물을 마시며 일어난다.
“갈랜다. 잠시 들린 건데 봤으면 됐지.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
준영이 손을 슬쩍 들어 보이고 주방 할멈에게 인사를 한 뒤 문을
나선다.
유란이 빤히 해주와 설찬을 쳐다보다 일어난다.
“오늘 안 갈 거야. 할 말 많은데 참는다. 나중에 얘기해..”
유란이 무언가 알고 있는 듯 애매한 말을 하고 준영의 뒤를
따라 나간다.
“우리도 갈까..”
해주가 주방 할멈에게 인사를 하고 박씨에게 무언가 속삭인다.
“아저씨, 내일 일찍 갈게요. 그때 봬요.”
인사를 나눈 뒤 해주는 설찬의 손을 잡고 밖을 나선다.
그새 캄캄한 어둠이 깔린 골목이다.
비가 오려나 달무리가 지어 흐릿한 그름이 그 주위를 감싼다.
설찬이 갑작스레 해주를 안아든다.
“왜...”
말할 틈도 없이 건물 사이사이를 건너가며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는 설찬이다.
그 뒤를 어느 샌가 나타난 하랑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