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주차장 앞 차안에서 해주와 유란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차 있었어?”
“아니.”
“그런 이건 뭐야?”
“빌렸어. 필요할 것 같아서..”
“그 자식 돈 많아. 한 대 사달해.”
“치.”
해주가 슬쩍 웃는다.
“내가 돈이 없어서 차가 없는 줄 알아? 아니야. 구지 필요성을
못 느꼈어. 그동안 놀고먹기도 했고..”
“어쨌든 있으면 편하잖아.”
“그건 그래. 그래서 생각 중 일이 많아지면 시간이 촉박해질
테니까..”
말이 없는 유란이다.
“그 사람이 첫사랑이야?”
해주가 슬쩍 유란을 살피며 묻는다.
“뭐가 궁금한데?”
“아니, 그냥..”
“어. 첫사랑이야.”
해주의 눈빛이 흔들린다.
“우리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처음 감정을 깨닫고 느꼈을 때
그 사람에게만 꽃이게 돼있어. 하지만 상대방이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자신만 힘들어지지. 웬만하면 같은 종족끼리 사랑을
하는 게 옮은 것인데 찬은 그렇지가 않았어. 아무리 매달리고
애원해도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애야. 그래서 더 집착이
가고 욕심이 생겼나봐.”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잊을 수 있었냐고? 네가 들으면 놀랄 일인데..”
유란이 다시 말을 머뭇거린다.
“말해.. ”
“어, 나왔다.”
순간 유란의 눈길을 따라가니 그 의사가 또 다른 상자를 들고
빠르게 운전을 하며 병원을 벗어난다.
“너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찬이 어딘 줄 말하지 않았어?”
“그게..”
해주가 잠시 멈칫하다 피식 웃는다.
“나 대신 그가 갔다 와서 말을 안 해주네. 증거만 쑥 내밀고
입을 닫았어. 내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걱정 되나봐.”
“원래 그 녀석이 그래. 자신의 것은 죽어라 지키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아주 매몰차게 돌아서..”
“사람도 그래. 누구나 다 그런거야.”
“치, 지거라고 편드는 것 봐.”
“내거? 내건가? 그런가...”
해주가 희죽 웃는다.
내거라는 소리 듣기 좋은 말이다.
누군가 온전히 내거가 된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터.
설찬이 골목골목을 다니며 주위를 살핀다.
다급하게 한 곳 한 곳 들어가 보며 마음에 드는 곳이 없는지
인상을 쓰는 설찬이다.
잠시 후 설찬이 누군가와 함께한다.
부동산 중개업자다.
차라리 그를 통해 찾는 것이 더욱 빠를 터..
설찬이 모자를 눌러쓰고 그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닌다.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
한적하고 조용하고 될 수 있으면 주위에 집들이 떨어져
있으면 하는 게 설찬 마음이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마지막 한 집이다.
까다로운 상대를 이끌고 돌아다니는 것도 이제는 부동산
업자도 지치는지 자꾸만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돈을 부르는 데로 주겠다는 설찬의 말 때문에
마지못해 다녔다.
하지만 이 집에 이젠 마지막 일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한 듯 소개 시켜준 집은 설찬의 눈길을 끈다.
작은 공터 산을 등 뒤로 아담한 주택이 모습을 보인다.
주위에는 아무런 건물도 없고 누군가 살았던 흔적은 있지만
꽤 근사하다.
도로를 한참이나 지나야 사람들 발길 소리가 들리고 길가
끝에 있기에 지나가는 차들도 보이지 않는다.
넓은 지붕으로 가려진 그 집은 뜨거운 햇살도 막아주기
좋았고 비가 내린다 해도 해주가 손을 내밀며 즐길 수 있게
안정적인 집이다.
큰 나무들만 심으면 정말 환상적인 집이 될 것이다.
해주도 분명 만족할 것이며 생각지 못한 손님들이 들이 닥친다
해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아 더욱 만족한다.
설찬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자신이 그토록 찾던 주택이었다.
마치 산속에 있던 그 집을 외형만 바꾼 채 가져다 논 것처럼
너무나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직접 주인이 살려고 지은 건데 얼마못가.. 하여튼 수맥이
안 좋다나 뭐라나 그래서 사려는 사람들이 없던 곳입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이 집이 마지막이라서..”
“계약하겠습니다.”
“네..네?”
“마음에 듭니다. 조금만 손을 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 근처 땅까지, 저 끝에서 이 끝까지 땅을 다 사겠어요.”
설찬이 손짓을 하며 당장 계약을 하자는 것이다.
“지금.. 지금이요?”
“왜 안 됩니까?”
“아니 너무 서두르다 나중에 다시 물린다 하시면..”
“그럴 일 없습니다. 계약서 쓰겠습니다.”
"아니 집안도 좀 살펴보고 그래도 늦지 않은데..“
부동산 업자가 급히 서두르는 설찬을 보며 문을 잽싸게 열고
마당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아무리 내가 업자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습니다. 집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니까요. 아내분이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안도
살피고 방도 보셔야지요..”
아내분이라... 꽤 듣기 좋은 말이다.
해주가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짜릿한
흥분이 든다.
집안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타야 될 것 같다.
다행인지 아닌지 거실 창가가 앞 쪽에 있지 않고 산을
보이며 뒤로 놓여있다.
그것도 마음에 든다.
그늘이 질 터이니 구지 햇살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을 나눠도 애써 가리지 않아도 된다.
사랑... 또 다시 설찬이 짜릿함을 느낀다.
보고 싶다. 내 몸이 반응을 한다.
해주를 원하는 시간이다.
몇 시간씩 만나지 못하고 떨어져 있던 것이 이제 한계에
다 달았나 싶다.
“괜찮습니다. 집안은 아내가 와서 보고 인테리어 좀 하면
되니까..”
그제야 안심하는 듯 부동산 업자가 이게 웬 떡이냐며 쭉
찢어진 입을 감추지를 못한다.
“그죠.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곳이 조용하게 살기에는 딱 이죠.
산이 있어 공기도 좋고 사람들 발길이 없으니 더러운 쓰레기들
도 없고.. 뭔 놈의 사람들이 오히려 무섭다고 쳐다도 안 보니
은근 애물 단지였답니다. 그래서 가격도 저렴하고..”
“네.”
짧게 대답하는 설찬의 눈치를 살피며 혹여 마음이 바뀔까
후다닥 계약서를 쓰러가는 부동산 업자다.
설찬이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주택이다. 이 집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해주와 함께 영원을 살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영원은 없어.”
해주의 말이 자꾸 설찬을 뒤집는다.
“인간의 사랑은 우리와는 달라.”
유란이 말이 또다시 설찬을 흔든다.
“아니, 영원은 존재할 수 있어.”
설찬이 무슨 생각인지 몇 번이고 되새긴다.
차안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해주다.
유란이 그 의사를 따라 지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이내 몇몇의 남자들을 거늘고 한 노인이 지하실로
들어간다.
따라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세한건 유란에게 듣고 마지막을 확인 한 뒤 기사를 터뜨리면
한 사건이 또 마무리가 된다.
갑자기 한숨이 터져 나온다.
언재부턴가 자신을 지시를 내리고 설찬과 유란이 모든 것을
따른다.
위험을 감수하며 숨은 비밀을 캐는 것이 기자가 할 일인데
그 재미가 없어졌다.
몸으로 부딪치고 이겨내고 그 승리감을 느끼는 게 해주가
유일하게 즐기는 낙이었는데 이젠 차안에서 이러고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또 다시 한숨이 터져 나온다.
안 되겠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번 사건이 끝나면 설찬과 결단을 내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