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 중원 무림의 중심인 오랜 전통을 가진 구대문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방파.
무력으로는 최 하위권에 속하지만, 강호 전역에 퍼져있고 쪽수로는 뒤질게 없는 가히 중원 최대의 방파이다.
그들이 지금도 눈앞에 있잖은가. 오만상의 인상은 쉽게 펴질 줄 몰랐다.
개방을 건드려봐야 골치만 아플 게 뻔했다.
털어봐야 건질 거라고는 개뿔도 없고, 때 거지 마냥 들러붙어 난리칠 놈들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주 더러워서 피한다.
“허어.”
어떻게 귀신같이 냄새를 맡았는지 저기 멀리 산채서 나오는 장독기 부채주를 보자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빈손으로 복귀했다간 어디 한군데 부러뜨려야 직성이 풀리는 장독기 장로.
독기가 장난이 아니다.
이름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절로 나는 오만상. 그의 머릿속을 뭔가가 번개처럼 지나갔다.
‘그래. 거지는 과감히 버리고 대신 저 표국 놈들을 잡아야겠구나!’
살 길을 잡은 오만상은 눈을 번뜩였다.
“개방은 조용히 빠져라. 뻗대봐야 서로 피만 볼 뿐이니 어서 갈 길들을 가라. 그리고 그쪽 표국은 상담 좀 해야겠다.”
같잖은 말에 무탁이 한마디 하려는 걸 강현이 나서서 제지했다.
“좋소. 개방은 대호표국과 별 상관이 없으니 보내고 나서 얘기 합시다.”
개방과 마찰을 빚어 문제가 크게 벌어지는 것 보다는 자신이 나서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안돼요!”
“나 소협님, 안됩니다!”
강현의 제안에 화령과 개방도들이 적극 만류하고 나섰다. 그리고 따스한 봄날 같은 표정의 그녀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냉혹하고, 살기마저 감도는 비장한 낯을 하고서 흑룡채 놈들을 향해 섰다.
“강현님, 무뢰배들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화령, 내게 생각이 있으니 맡겨주시오.”
“아니, 그래도 위험할 수도 있는데······.”
말끝을 흐리는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해주었다.
“괜찮으니 걱정 말고 수하들과 먼저 가있어. 금방 따라 갈게.”
“알겠어요. 그럼 몸조심하세요.”
화령은 차마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의 말을 믿고 수하들을 데리고 움직였다.
“소방주님, 나강현님과 표국 분들의 무공이 뛰어나지만 흑룡채 놈들이 작정하고 숫자를 앞세워 덤비면 곤란한 지경에 처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보연이 우려 섞인 걱정을 표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지만 강현님을 믿고 따르는 게 지금으로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보연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흑룡채의 무리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리고 싶으나 참았다. 소방주를 옆에서 본 입술은 앙 다물어져 있었다. 자신이 이러할 진데 소방주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정, 사간의 격돌을 개방이 시발점이 되게 할 순 없었다.
“바쁜 것 없으니 우리 천천히 가도록 하자.”
“예, 소방주님. 거지가 뭐 세상 바쁜 게 있겠어요!”
화령이 걸음을 옮기지만 마음만은 강현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긴 하지?”
“당연하죠. 소방주님.”
화령 일행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부채주님, 오셨습니까!”
오만상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주위를 둘러보는 하는 장독기. 보기 드문 초절정의 고수였다.
마음이 급해 한달음에 달려온 장독기는 멀어져가는 개방의 무리들을 보고 얕은 한숨을 쉬었다. 멀리서도 화령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흐으, 제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만상을 보자 신나게 패주고 싶었지만, 영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서 화를 꾹꾹 눌러 삭였다.
움찔.
이런, 미친 부채주 같으니라고.
장독기가 내뿜는 살기에 오만상은 몸을 떨면서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남은 표국 인물들을 죽어라 노려봤다.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 풀어 봐라.”
불쌍하게 처 맞아 죽은 전임 조장이 퍼뜩, 생각난 오만상은 우선 살고 봐야 했기에 인상을 최대한 작 피고 고개를 돌렸다.
“네, 부채주님. 좀 전에 떠난 저놈들은 다름이 아니라 개방의 거지들입니다. 해서 본 산채와 얽혀봐야 좋을 게 없어 보냈습니다.”
“뭐, 개방의 거지들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장독기는 오만상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제길, 개방이라니. 다시 잡아오라고 하려했더니 재수 더럽게 없구먼.’
무서울 것 없는 장독기도 개방을 건드려봐야 평생 거지들 등쌀에 제명대로 못살 것을 안다.
장독기는 오만상을 보고 잘한 것도 없으면서 뭔 자신감으로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나 혀를 찼다.
“쯧쯧쯧. 뭘 잘했다고 그러고 있나. 인상 펴라”
“예, 옛! 그런 것이 아니라······.”
장독기는 남아 있는 무리들을 슥 훑어보다가, 됐다고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사내들이 서 있는 중간 중간에 검은 천으로 눈 밑까지 가린 여인들이 보였다. 남은 얼굴의 일부분만 봐도 상당한 미인임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었다.
‘무공은 어떤지 몰라도 표사로 썩기엔 너무나 아까운 얼굴들이군.’
* * *
강현은 앞에서 버티고들 있는 흑룡채 무리들을 무심히 살펴봤다. 인상을 쥐락펴락 하고 있는 놈부터 살기와 독기를 버무린 놈까지 다양했다.
하나같이 꼴에 음탕한 눈으로 수하들을 쳐다보는 더러운 눈길을 보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말로 해서는 고분고분 들을 것 같지는 않으니, 차라리 통행세를 주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강현은 전낭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묵직한 은자가 손에 잡혔다. 그때 흑룡채 무리 중에 하나가 나섰다.
“크흠, 길게 말할 거 없이 통행세는 머릿수대로 내는 게 관행이니 그렇게 아시고 계산을 치루시오. 그러면 나 오만상의 이름으로 보내 주겠소.”
“흐음, 알았소이다.”
은자 세냥 정도면 충분하다 싶어 꺼내려는데 상대가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요새 시세가 많이 올라서 금자로 계산하시오.”
“뭣이! 금자로 계산을 하라고!”
강현은 금자로 계산하라는 말에 기가 막혀 놀랐다.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아니, 금자가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이것들이 아주 작정을······.”
터무니없는 말에 어이가 없어 하는 때에, 옆에서 천둥이 흑룡채의 무사 한명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 상황에 말을 멈추었다.
-크르르릉
“헙!”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시던 무사는 천둥의 맹수를 능가하는 기세에 놀라 움찔하며 뒷걸음을 쳤다.
오만상은 부하의 덜떨어진 모습에 속으로 개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고 혀를 찼지만, 상대를 겁박하고 있는 중이라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금자를 치를 형편이 안 되면 다른 방법도 괜찮소이다. 험험.”
“그 방법이 무엇이요?”
방법이 무어냐고 질문을 하니 험악한 인상을 지우고, 썩은 미소로 환하게 웃으며 친절함을 보여준다.
“허허, 귀하의 표국에는 굳이 여 표사들이 필요치 않을 것 같은데 험한 표행에 고생시키지 말고 흑룡채에 머물게 하는 게 괜찮을 것 같소이다.”
말을 지껄이는 놈의 시선은 옆의 수연에게 가 있었다.
강현은 적당히 주고 갈 길을 가려 했는데 같잖은 소리로 그러질 못하게 만드는 상황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들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구나.
“이 은자를 받던지 아니면······.”
금자도 아니고 은자 하나를 내밀며 받으라고 하니 오만상은 기도 안차 물었다.
“아니면?”
“아니면, 처 맞든지!”
오만상은 자기가 말을 잘 못 들었나 하고 귀를 후벼 팠다. 역시나 더러운 귀지만 잔뜩 묻어 나왔다.
“퉤! 고분고분 굴면 곱게 보내 줄려고 했더니 말로해선 안 되겠군.”
스으.
진한 살기를 쏟아내며 내력을 일으키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장독기 앞에서나 하수였지 그도 어디 내놔도 꿇릴 것 없는 초 고수였다.
강현은 오만상의 살기를 담담히 받아냈다.
그러자 오만상은 물론, 뒤에 서 있는 장독기도 다소 놀란 얼굴을 보였다.
그의 눈엔 안차도 실력은 좋은 편이기 때문이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짙은 살기를 받고도 눈 하나 깜짝 않는 것도 놀랍지만, 주변의 수하로 보이는 인물까지도 멀쩡하다니.’
장독기는 불현 듯 찜찜함을 느꼈지만 애써 지워버렸다.
오만상은 속으로 살짝. 아니, 좀 놀랐다. 이 길을 지나는 장사치들은 말할 것도 없고, 표국의 어진간한 표두들도 자신의 살기를 이 정도로 버티는 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헉, 뭐 이런 놈들이 있나. 표국의 표사들이 맞기는 한가! 그리고 저 놈의 개새끼까지 멀쩡하다 못해 노려보다니. 제길.’
오기가 발동한 오만상은 내력을 더 끌어 올렸다. 살기는 이전보다 짙어져 같은 편인 부하들까지 살기의 영향을 받았다.
수연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걸 본 오만상은 옳다구나 하고 좀 더 내력을 쥐어짰다.
스으으.
계진상은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오만상을 슬쩍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우, 저러다 칼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뒈지는 게 아닌 가 몰라!
말이 씨가 되려는지 오만상의 입가에 게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끄르륵.
다행히 죽기 직전 강현이 말을 꺼내 오만상을 살려줬다.
“언제까지 더러운 인상을 보고 있어야 하나? 싸움을 얼굴로 하는 거라면······, 내가 졌다!”
“푸훗, 큭큭큭.”
수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웃자 웃음은 빠르게 전염되었다.
“크큭, 낄낄낄.”
계진상과 몇몇 녹림의 무리에서도 참지 못한 웃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
“커어어억.”
오만상은 토하듯 크게 숨을 내뱉고 재빨리 내력을 다스려 안정시켰다.
강현은 웃으면서도 예의 주시를 하고 있는데 오만상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부지불식간에 뽑혀 나오며 허공을 격하고 찔러왔다.
쉬이잇.
상황은 우스웠지만 그의 검은 우습질 않았다. 쾌검의 달인답게 오만상은 검은 준비 동작도 없이 빛처럼 빨랐다.
콰창.
강현이 나서기도 전에 부영이 섬전처럼 몸을 움직여 검을 막았다. 회심의 일검이 막혀 당황할 만도 하건만, 연이어 검을 찔렀다.
콰각, 카가각.
둘 다 검이 어찌나 빠른지 검은 보이질 않고, 허공에 빛 무리가 가득했다.
순식간에 수십 합의 공방을 펼친 오만상의 혈기는 빠르게 식어갔다. 그리고 부영에 비해 내력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호기롭게 나섰지만 검을 섞을수록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절실히 느꼈다.
후회는 빨랐다.
‘젠장, 괜히 나섰네. 뭐 이런 거지같은 경우가. 녹림생활 이십년 넘게 지내온 동안 이런 놈은 처음이구나.’
쐐애액.
계진상이 돕기 위해 부영의 다리 쪽으로 단검을 날렸다. 부영이 단검을 막는 틈을 이용하여 오만상은 뒤로 훌쩍 빠졌다.
뒤에서 보다 못한 장독기가 내력이 실린 웅혼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녹야방진(麓惹防進)을 구성하라!”
만만히 볼 상대들이 아님에 녹림의 검진을 발동시켰다.
평소에 검진 훈련은 열심히 했는지 재빠르게 진을 형성했다. 흑룡채의 녹림도들은 경시할 수 없는 실력을 봤기에 진중한 자세로 장독기의 지휘아래 검진을 구성하며 압박했다.
강현은 지도 한 몫 한다고 알짱거리는 천둥을 뒤로 몰고, 마주 검진을 발동시켰다. 검진은 표국들 사이에서 주로 익히고 사용하는 자왕승검(資王勝劍) 검진이었다.
내력이 상당했기에 검진이 우웅거리며 울렸다.
개진을 알림과 동시에 서로간의 검진이 격돌했다.
콰차차창.
강현이 중심에 서고 부영과 민경이 앞에서 검진을 이끌었다.
자왕승검 검진은 자체로는 위력이 약하지만, 서로간의 보완을 하며 도움을 주기에 무공이 대체적으로 약한 표사들이 펼치기에 적합한 검진으로 유명하다.
쉬카칵, 휘리리릭.
검 끝이 명치를 노리고 파고들자 강현은 오히려 앞으로 한 발 나아가며 타점을 흐렸다.
검을 비껴 치고 몸을 반 바퀴 돌리자 생겨난 상대의 허리에 수연이 검을 찔렀다.
“크윽.”
뒤로 주춤 물러난 녹림의 검수 턱을 후려쳤다.
빠각.
이빨과 핏물이 공중으로 후두둑 튀고 검수도 허공에 뜨며 뒤로 날아갔다.
“크어억!”
당연히 우위를 점할 줄 알았는데 부하들의 몸에서 피가 뿌려지고 검상들이 늘어가자 장독기는 내력을 더 끌어 올려 검을 날렸다.
장독기 앞의 검진이 위태롭게 보여 검진의 변화를 준 강현은 그쪽으로 몸을 옮겨 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수연이 대신했다.
쩌엉.
“변변찮은 실력으로 도적질 하느라 고생하는구나. 넌 특별히 내가 상대해 주지.”
검기가 가득한 검을 강현이 도발하며 무리 없이 막아서자 장독기는 내심 크게 놀랐지만, 지기 싫어 큰 소리를 쳤다.
“이봐, 애송이. 어깨위에 목이 온전하게 남아서 표사 질이라도 해먹고 싶으면 당장 칼을 버리고 꿇어라. 목숨만은 살려주지 어떠냐?”
“그래! 누구 목이 남나 검으로 답을 해주마.”
-슈우우욱
피할 틈도 없이 찔러오는 강대한 내력이 실린 검에 장독기는 대경실색(大驚失色)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