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각
벽수무적은 강기가 실린 발로 무릎을 걷어차 거리를 벌렸다.
적표의 손이 울대 앞에서 멈추었다가 뒤로 밀려났다.
잡혔으면 목울대가 뜯겨 나갔을 것이다.
“크으, 정말 좋은 한수로군.”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금나수의 수법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임기응변으로 막아냈다.
적표가 다시 검을 들어 초식을 전개하려 하자 방주의 신형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둘이 부딪쳤다 싶은 순간, 서로가 달려들 때 보다 더 빠르게 뒤로 튕겨났다.
-스스슷
보법을 밟으며 서로를 탐색하듯 하는가 싶더니 방주의 기운이 거세게 바뀌었고, 양손에 형성된 수강은 더욱 짙어졌다.
-우우웅
주변 공기가 공명하듯 울린다. 거칠고 진한 기의 흐름이 방주의 주변을 꽉 채우다 못해 넘쳐난다.
절기를 펼치려는 절대고수 방주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상대하기는커녕 도망치려 할 것이다. 살아 있어야 복수를 하든, 무예를 갈고 닦든 할 게 아닌가.
비무라고 하지만, 실전과 진배없기에 적표는 위험을 직감했다. 비무도 때로는 목숨을 내 놓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물론, 그때가 지금은 아니다.
그 누군가를 꼭 만나서 오랫동안 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가득 채우는 의문을 찾기까지는.
검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물리적인 내공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천인지로.”
적표는 검을 진중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두우우웅
묵직한 검의 울림과 함께 앞으로 신형이 길게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쏘아졌다.
적표와 방주인 벽수무적이 격돌했다.
-콰아아아앙
손아귀가 으스러져라 잡은 적표의 검은 부러질 것처럼 휘었다. 강기의 폭풍에 휘말린 적표는 팔뚝의 옷자락부터 견디질 못하고 갈가리 찢겨 나간다.
‘크읍.’
이가 부러져라 악다물어 보지만 소용없다.
옷자락에 이어서 양 팔에 가느다란 실핏줄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강시의 몸을 가진 단단한 적표의 몸은 검기 정도로는 상처를 입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강기 앞에서는 예외였다.
보통의 무인은 강기에 휩쓸리면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한줌의 핏물로 변해버린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차이는 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
적표라서 지금의 상황을 견디고 있는 것이지, 다른 이였으면 진즉에 영혼을 털리고 세상을 하직 했을 것이다.
“흐음, 아우님. 역시 제법이야.”
“크음, 감사합니다.”
방주는 속으로 흠칫 놀랬다. 자신이야 이 상황에서 말을 해도 큰 무리는 없지만, 부방주인 적표가 저리 대답을 하다니. 웬만한 실력과 내공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짓이다.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방주는 씨익 웃더니 그 상태에서 장법을 다시 방출했다.
-파아아앙
그 충격으로 적표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방주의 권이 다시금 터진다.
“경기파극.”
권의 형상을 한 거대한 강기 덩어리가 쏘아져 오는 것을 보고 적표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었다.
“천인일해.”
검이 강기를 가른다. 세상에 존재치 않을 무시무시한 강기를.
-카가가각
단순해 보이는 일도양단의 검식으로 보이나, 그 안의 묘리와 내력은 단순한 게 아니라는 듯 놀랍게도 가르고 있었다.
너무 강대해서 쉽게 쳐내질 못해 방어에 취약하게 만드는 방주의 독문 무공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방주가 검을 긋고 있는 그 위험한 순간에 적표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큭.”
일반 강시와 달리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자혼 강시 체질의 적표 얼굴이 찡그려진다. 인상이 워낙 험악해 그게 그거지만 말이다.
또다시 방주의 권을 허용한다. 강기를 간신히 해소한 적표는 연신 방어에 치중하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필패였다. 적표는 극히 위험한 공방전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준 의문의 무공을 떠올렸다.
강시 시절에 수련한 바로 그 대나종수인. 수미혼 환요에게 가르침을 받은 무공이었다.
손톱만큼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초식을 떠올리려 애쓰지만 그게 쉽지 않다.
-쿠콰콰쾅
강기가 실린 발 세례에 육중한 거구의 적표가 허공을 떠다니며 기이한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일격이라도 날리려는 듯 경공을 펼치는 방주의 신형이 적표에게 화살처럼 쏘아졌다.
-쉬이이잇, 퍼억
적표의 명치에 권장이 작렬한다.
-스스슥
그때, 기가 잔뜩 실린 적표의 손이 기이한 수법으로 방주의 목을 틀어쥐려고 움직였다.
-퍼엉
방주는 적표의 수법에 크게 놀라며 공격을 수비로 급히 전환했다. 권장의 반탄력으로 뒤로 물러난 방주는 목을 한차례 쓰다듬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이거 내 목이 잘 붙어 있나?”
“후욱, 후욱.”
적표도 그 자리에서 멈춰 숨을 고르며 끓어오르는 기를 진정 시켰다.
이번의 한 수가 아니었으면 죽지는 않았겠지만, 방주에게 아주 호되게 맞았을 것이다.
“하하하, 부방주 실력이 전보다 대단해 졌어. 이젠 본좌가 밀릴 정도야.”
방주의 너스레에 적표는 짐짓 생각에 잠겼다 대답을 했다.
“······방주님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주신 덕분입니다.”
‘이제껏 알고 있던 금나수 치고는 많이 다르군. 아무래도 아우의 잊었던 무공을 찾은 것 같은데 축하할 일이야.’
“아닐세, 대단한 한 수의 무공을 잘 봤어. 아우님은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 나는 이만 가보겠네.”
“예, 방주님.”
멀어져 가는 방주의 뒷모습과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며 비무 내용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신묘한 수법인데 이것도 필시 전에 익혔던 무공일터.’
생각을 집중하며 방주인 벽수무적과의 비무를 곱씹었다. 무공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 거리며 일부이지만 기억이 떠오른다.
신묘한 금나수법은 자혼 강시 시절에 궁주의 호위로 있으면서 익힌 대나종수인이다. 대나종수인은 궁주와 소궁주의 호위전대만이 익히는 무공이었다.
오늘도 무공 수련에 여념이 없는 적표를 멀리서 호위하던 복호대주는 부궁주가 일정을 잠시 잊은 것 같아 보고를 올리기 위해 다가왔다.
“······부방주님, 복호대주입니다.”
“어, 무슨 일인가?”
얼굴이 살짝 붉어진 사비왕의 시선은 적표가 아닌, 옆을 보고 있었다.
‘아, 눈을 어디에 두란 말인가!’
“예, 방을 떠날 차비를 하셔야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예, 부방주님. 내일 출발 예정입니다.”
“그럼 준비를 해야겠군. 알았다.”
“부방주님, 무복을 새로 준비 하겠습니다.”
방주와의 비무로 무복은 거의 너덜너덜해져 남아 있지 않았고, 신기하게도 그의 중요 부위만이 간신히 가려 주고 있었다.
“어, 으음.”
적표는 비무 중에 떠오른 무공수련을 끝내고 준비를 위해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준비할 것은 딱히 없었다. 기본적인 것은 벽사방에서 다했고, 개인적인 물품은 몇 가지 없었다.
물욕이 있는 편도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숙명에 물품이라고는 약간의 은자와 한 자루 검, 그리고 기억이 날 때 마다 기록해 둔 무공서적이 전부였다.
방안을 한번 슬쩍 둘러본 적표의 시선이 한쪽에 고이 싸여진 비단보에 머물렀다. 비단보를 풀었다.
-스르륵
그 안에는 낡고 빛바랜 황색의 무복이 잘 개어져 있었다.
무복을 들어 펼치었더니 옷 끝자락에 붉은 수실로 적표라고 수놓아 있었다.
그의 이름을 손으로 슬쩍 매만졌다. 속에서 무언가 벅찬 감정이 솟아났다.
-적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밖에서 수하의 기척 소리가 들려와 적표는 짐을 챙겨 나왔다.
“부방주님, 준비 다 됐습니다.”
“그래, 출발하자.”
“옛, 부방주님.”
복호대주와 표사로 변복을 한 검수들이 주군인 적표의 명에 일제히 움직였다. 복호대가 있기에 이번 표행은 따로 표사와 쟁자수를 붙이지 않았다.
벽사방을 알리는 붉은 깃발을 높이 세우고 방을 나서는 적표 일행을 장로들이 친히 배웅을 나와 주었다.
“헛헛헛, 부방주님. 잘 다녀오십시오.”
“껄껄, 가서 맛난 것도 먹고, 잘 다녀오시게.”
“음, 부방주님. 이제가면 언제 또 오시나. 에헤야 디야. 아, 이건 아니고.”
“벽사방은 장로들이 잘 지킬 것이니, 걱정은 마시고 천천히 즐기다 오시게나. 이건 가는 길에 요깃거리로.”
대신해서 무림맹에 가는 부방주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장로들은 덕담을 해주었다.
“예. 그럼 장로님들. 다음에 뵙겠습니다.”
적표는 수하들과 표물을 가지고 숭산 소림사로 향했다.
표행길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적표를 보고 사파라고 날뛰면서 이름을 알리겠다고 협객 흉내를 내며 달려드는 골치 아픈 무리들이 가끔 있는 것 말고는 말이다.
중간 중간 시간이 날 때면 수련을 하던 적표가 복호대주와 수하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검식을 수련하라고 전해주었다.
“아아, 부방주께서 우리에게 상승무공을 전수해 주시다니, 이 은혜는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뜬금없는 주군의 행동에 감복하여 복호대는 이후로 미친 듯이 수련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무생각 없이 행한 적표의 선심에 복호대는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로 보답했다.
어느덧 적표는 숭산에 있는 소림사에 도착했다. 소림사 정문은 갓 약관을 넘긴 승려 여럿이서 지켜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벽사방의 깃발을 알아보고 마중 나온 스님 하나가 적표 앞에 서더니 말문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파의 중심인 소림사에 사파의 마두라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허업, 어째서 사파의 마두가 같이 소림사에 왔지. 아아, 빨리 사형께 말해야 하는데 왜 이리 몸이 말을 안 듣지.’
허옇게 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승려를 보고 눈치 챈 복호대주가 나서서 말을 꺼냈다.
“스님. 벽사방에서 왔습니다. 길을 안내해 주시지요.”
“어엇, 시주님. 실례했습니다. 이, 이리로 가시지요.”
안내를 맡은 무심은 적표를 보고 놀란 마음에 진정되지 않는 가슴 뜀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내당으로 떨리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어떻게 내당까지 안내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승려 무심은 열심히 불호를 외며 자리로 돌아갔다.
공물을 전달하는 것을 확인한 적표는 방장스님을 찾아 대웅전으로 향했다.
-똑똑똑, 똑데구르르
방장스님이 불경을 다 마치기를 앉아서 기다리는 적표는 경내를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코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을 지나갈 때면 사람들이 오금이 저려 넘어지기 일쑤였고, 어떤 여인은 그 자리에서 놀라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딸꾹, 흐윽, 흑. 어, 엄마!”
영문을 모르는 적표는 아이가 지나가는 걸 보고 나름 친근하게 히죽 웃어줬다.
“히익, 끄끅.”
아이는 눈을 뒤집고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넘어갔다.
그때, 시끄러운 소리에 목탁 소리가 멈추었다.
“어허, 왜 이리 밖이 소란스러운고?”
소림 방장의 소리에 적표는 고개를 돌렸다. 바로 코앞에서 방장과 적표의 시선이 마주쳤다.
“헛, 아미타불, 어찌 불경스럽게도 경내에 마인(魔人)이 출몰했는가. 오오, 부처시여!”
불호를 외며 개탄하는 소림방장인 수염이 허연 정동(情洞) 스님은 목탁이 부서져라 열심히 쳐댔다.
방장이 그러거나 말거나 무심한 적표는 품안에 넣어둔 서찰을 꺼내어 공손히 내밀었다.
“여기 방주님이 보내신 서찰이옵니다.”
보기완 다른 차분한 행동에 방장이 진정하며 물었다.
“아미타불, 이게 뭔가?”
“방장님, 이 서찰은 벽사방의 방주이신 벽수무적께서 전하라 하신 서신이옵니다.”
“벽수무적이라고! 이 서찰을 전해 준 시주는 누구인고?”
“예, 부족하나 저는 벽사방의 부방주를 맡고 있는 적표라 하옵니다.”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미소를 보이는 방장이었다.
“허허허, 벽사방의 부방주를 몰라 뵈었군. 이젠 나이를 먹은 게야. 나무아미타불.”
미안함을 불호로 때우며 건네받은 서찰을 펼쳐들었다.
“으음······.”
서신의 내용은 이랬다.
-존경하는 방장 스님. 아니, 사형께 문안 인사 올립니다. 사형이 부처님의 은덕으로 무탈하기를 바라옵니다. 이 서신을 전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부방주이면서 제 아우이기도 한 적표가 지난 기억을 잃고서 번뇌에 쌓인 것 같습니다.
부디 사형의 넓으신 아량과 불심으로 본 아우의 번뇌가 조금이나마 씻기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무림맹에 아우를 보내기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정동 방장은 낮게 불호를 외며 씨익 웃는 적표를 봐라봤다.
“과연, 인상에 번뇌가 참으로 많이 쌓였구나. 아미타불.”
이로써, 적표는 벽수무적의 배려로 난데없는 절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