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소정의 육체는 불타오르기 직전이었다. 어려서부터 쌓아온 정순한 내공이 받쳐주길 망정이지 진즉에 재가 되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심각한 모습의 수연. 제자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최악의 상황은 넘겨야 했다.
“수연아 어렵겠지만,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네, 사부님. 안 그래도 뒤에서 지켜보는데 너무 안타까웠어요.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해보겠습니다.”
사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수연은 그의 뒤로 다가가 앉았다. 내심 심호흡을 가다듬고 준비를 마쳤다는 눈빛을 사부에게 보냈다.
“조심하고, 여의치 않으면 바로 그만두어도 좋다.”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수연은 신중한 마음가짐으로 그의 무복을 허리 아래까지 내렸다.
바스락.
무복은 열기에 의해 바싹 말라 나뭇잎 바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처음 보는 사내의 등에 손을 대려고 생각하니 그녀의 뺨이 발그레 해진다. 잡념을 떨치려 고개를 휘휘 젓고는 내력을 일으키자 막대한 양의 한기가 수연의 양 손에 맺혔다.
공기마저 얼리는 한기를 품은 손을 등에 가져대 대었다.
치이이익.
열기와 냉기가 맞닿으며 요란한 소리를 뿜어댔다. 뭉글뭉글 거리며 생겨난 운무는 설소정과 수연을 감싸 안으며 신비로움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주위는 촌각을 다투는 상황도 잊고, 잠시 넋을 놓고 봐라봤다.
많은 내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 동안의 성취를 말해주 듯 수연은 제법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반 시진 가까이 지나자 여인같이 고운 설소정의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새어나왔다.
“으으음.”
백지장 같은 혈색도 돌아오고 겉보기에도 이젠 안심할 정도로 회복을 보이고 있었다.
설소정의 정신은 이글이글 불타는 끝도 없이 펼쳐진 서역 너머의 사막 한가운데 있었다. 이대로 죽기엔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의 짧은 인생이 서글펐다.
태어나기 전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빙궁의 후계자로 정해진 삶.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태어났다지만, 그녀의 일상은 힘들고 고되고 외로움의 기나긴 싸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주화입마에 빠져 빙백정에 갇혀 살다시피 하는 그녀의 일생은 언제까지 갈지 기약 없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녀였다.
그래서 정신 줄을 놔도 벌써 놨을 것인데, 그를 이토록 매달리게 하는 이유는 뭘까.
그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닿은 것일까! 죽음의 문턱에서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구원의 손길을 잡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가 열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뿌연 시야가 또렷해지며 나타나는 처음 보는 사내의 얼굴. 황룡세가의 인물은 아닌 듯 했다.
“······누구신지요?”
“휴, 다행입니다. 이제 정신이 좀 듭니까!”
“네, 그러고 보니 그대는 제 생명의 은인이시군요.”
기쁨도 잠시, 어두운 표정의 설소정. 인질이 된 처지야 어쩔 수 없다지만, 구명지은을 입었으니 은인은 은인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여기 수연이 도왔습니다.”
설소정의 뒤에 서있던 수연을 손짓하자 앞으로 나왔다.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아,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별말씀을, 제가 조금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이제 막 여인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또래의 소녀. 지금도 뛰어나지만 머지않아서 대단한 미녀가 될 소녀였다.
본인의 과거 모습에 마음이 착잡해 질수도 있는 상황이건만, 남자로 변해버린 이제는 그 마음도 덤덤하다.
수줍어하며 겸손을 보이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본인은 빙궁의 설소정입니다. 언제고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얼른 몸을 추스르시고 말을 아끼세요.”
가까이서 지켜보던 동치설과 황룡광예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수연은 설소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에게 자꾸만 마음이 가는 것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끼는 이상한 감정. 그것이 동정이든 다른 연정이든 간에 말이다.
이번엔 괜찮지만 얼마 못가서 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한 수연은 사부에게 그를 도와주고 싶다는 눈빛을 보냈다.
‘사부님.’
‘거 참.’
제자의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져 강현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 * *
북해의 얼음 궁전인 빙궁. 그곳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함을 자랑하는 빙백대전.
빙궁의 궁주 설보광. 그를 호위하는 호법과 좌우로 늘어선 초절정과 고수들로 이루어진 장로들. 그리고 그 대전 앞에 오체투지를 하고 고개를 조아린 예송.
무슨 일인지 북해의 날씨보다 더 한 강맹한 냉기류가 대전에 차고 넘쳤다.
콰아아앙.
빙백석으로 만들어진 얼음같이 반들반들한 바닥이 쩌적 소리를 내며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더냐! 소궁주가 자리에 없다니!”
살을 에는 것처럼 궁주가 쏘아낸 칼날 같은 냉기가 예송의 몸에 닿으니 무복이 쩍쩍 얼어붙는다.
“송구하옵니다. 궁주님.”
“어서 똑바로 소상히 아뢰어 보거라!”
총관 형석빙이 노기를 띠며 빨리 말해보라 재촉했다.
“예, 소궁주님께 필요한 영약과 물품을 가지고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빙백정으로 갔으나 소궁주님이 빙백정 외부로 가셨는지 안보이시고······.”
예송은 십년 가까이 소궁주인 설소정의 수발과 그 외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이번에도 열흘 동안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빙백산에 올랐다.
빙백정에 도착하고 보니 당연히 빙석위에서 주화입마를 치료하고 계셔야 할 소궁주가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혹, 너무 무료해서 잠시 외부에 나갔다고 여긴 예송은 기다렸다.
반 시진이 지나고, 또 한 시진이 지났다. 안 되겠다 싶은 예송은 밖으로 찾아 나섰다. 가까운 곳을 찾아봤으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어렵게 작은 흔적이나마 쫓으니 외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 얼음과 단단한 바위가 파이고, 부서지고 반경 백장이 넘게 황폐해 져 있었다.
아마도 중원 무림인들 짓이라 여겨졌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설, 설마 이들이 소궁주님에게 위해를!’
“소궁주님! 소궁주님 어디 계세요!”
미친 듯이 소리쳐 소궁주를 부르고 찾았으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고 메아리만이 답을 했다.
자신이 감당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에 급히 서둘러 복귀한 후, 위에 보고를 올렸다. 그런 연유로 현재 대전 앞에서 죄인처럼 조아리고 있는 것이었다.
“상고대 대주가 도착했사옵니다.”
빙백대전 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져 터지기 직전에 조사를 나갔던 인물이 들어왔다.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하고 경공술까지 펼치며 들어 온 사내는 정보를 총괄하는 상고대의 대주 감제술 이었다.
궁주에게 예를 갖추려고 하자 어서 빨리 보고하라는 총관의 손짓에 약식으로 예를 취한 후 보고를 올렸다.
“궁주님을 뵈옵니다. 소궁주님에 대한 일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상고대에서 추적 조사한 결과, 소궁주님의 흔적이 중원 무림인들과 조우를 한 후 사라지셨습니다. 십중팔구 소궁주님께서 중원의 무림인들과 연루가 된 것 같습니다.”
“뭣이! 허면 그놈들 짓이란 말이더냐!”
사아아악.
궁주의 분노에 종전보다 더 진한 한기가 대전에 휘몰아쳤다. 궁주뿐만이 아니라 장로들도 같은 마음인 것이다.
당장에 놈들을 얼려 가루로 만들어도 시원찮을 일이다. 가슴은 분노에 타오르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면 그게 더 안 좋다. 총관의 머리는 냉정해야 했다.
“일단, 화용대의 고수들을 보내 놈들을 추적하고 확인을 해야 할 것입니다.”
총관의 말에 양화단 장로가 격양된 목소리를 냈다.
“궁주님, 화용대를 보내 추적을 해도 빨라야 사흘. 확인 후 연락을 받는데 다시 사흘. 그 시간이면 놈들은 중원에 가깝게 다다를 겁니다. 그때는 늦습니다. 그러니 당장에 쫒아가 잡아 죽여야 합니다. 소신을 보내주십시오.”
양 장로의 건의에 장로들이 동조하였고, 궁주도 별반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설 총관이 재빨리 반박의 말을 꺼냈다.
“그건 위험합니다. 그들은 중원을 대표하는 문파들의 인물들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전면전을 벌여야합니다. 중원과 전면전이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빙궁은 아직 중원을 치기에는 무력이 부족하니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으음.”
“허허. 참.”
작은 탄식과 헛웃음들이 들렸다. 그들도 총관의 말을 모를 리 없었다.
“설총관, 허면 소궁주를 납치한 저 갈아버려도 시원찮은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자는 말인가! 으드득.”
대장로 곽재무가 눈을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소궁주님을 빼앗기고도 전면전이 두려워 발을 빼면 저들이 빙궁을 얼마나 우습게 볼 지 훤합니다. 최대한 빨리 소궁주님을 모셔오고 이참에 중원 무뢰배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대세는 중원 무림맹의 무뢰배들을 응징하자는 방향으로 흘렀다.
최종 결정은 당연 궁주의 몫이다. 궁주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신중하길 바라는 총관과 허공에서 시선이 맞닿았다.
“으음······.”
현재 무력이 열세에 놓였다고 꼬리를 내렸다가는 빙궁의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가 없어진다. 빙궁도 중요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설소정이 중요했다.
소궁주란 신분 때문에 지금까지 고난의 시간만을 견디어 낸 것도 모자라 중원에까지 끌려갔으니, 대의를 생각하기엔 그의 부정이 너무도 컸다.
굳게 다문 입술이 열렸다.
“빙궁의 앞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결정을 하려한다.”
궁주는 말을 잠시 끊고 장로들을 둘러봤다. 그 만큼이나 그들도 이미 단단히 각오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궁주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전대 궁주께서 그러하듯 본 궁주도 중원의 영토를 밟으려 한다. 시기가 이른 감이 있지만, 장로들은 최고의 전력을 준비하고 총관은 본 궁의 역량을 총 동원하여 주길 바란다. 중원인에게 빙궁의 분노를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궁주님, 명을 받듭니다!”
빙궁은 강호무림에 피바람을 일으킬 출사표를 던졌다.
* * *
천마교. 중원의 사파를 아우르는 것도 모자라 세외라 칭할 수 있는 밀궁과 한배를 타게 되어 더욱 강력해진 무력.
그 무력을 발판 삼아 중원 접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중원과 세외의 정보를 담당하는 정마단(情魔團)은 밀궁과 합쳐지는 시점에 정보 조직을 더욱 늘렸다.
시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정파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반대로 역공작도 펼치느라 정마단은 창단이후 가장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천마교 정마단주 고사입. 단원들이 정보를 분류 취합해 중요한 것만 추려서 올려 보낸 것이 한 뭉치. 두통으로 인해 손으로 관자놀이를 쿡쿡 찌르고 검토하던 중 수하가 새로운 정보를 가져왔다.
“단주님. 일급 정보 두 가지입니다.”
“일급정보?”
수하가 가져온 일급정보 문서 하나를 집어서 이상 유무를 살펴본 후 내용을 읽어갔다.
무림맹 행사인 팔대고수전에 위장 잠입한 단원이 보낸 내용이었는데 북해 빙궁과의 사이가 고수전의 일로 인해서 극도로 사이가 나빠졌다는 보고였다.
둘을 잘만 이용하면 큰 성과를 볼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이었다. 지금은 사태가 더욱 진전이 되었을 것이다. 간만에 제대로 된 정보로 두통이 훅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또 다른 문서에는 밀궁과 관련된 정보였다. 밀궁에 관한 정보는 수집 자체도 극비였다. 괜한 의심을 살 경우 중원을 손에 넣기도 전에 협약이 깨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밀궁 상층부에서 극비리에 강호에서 잠적한 전대 궁주의 식솔들을 찾는 중 이라는 보고였고, 또 하나는 수준 높은 강시전대가 종적을 감추었기에 추적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전대 궁주의 식솔과 도주한 강시라.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아주 흥미 있는 내용이었다. 분명 전대 궁주의 식솔들은 현 궁주에게 반감이 있을 터. 당장은 아니지만, 후일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강시는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술법사에게 종속되기 마련이다. 술법사가 배신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혹, 강시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엄청난 정보에 흥분한 단주는 못 견디고 자릴 박차며 집무실을 빠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