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살았다.
하나 있는 피붙이 먹여살리겠다고 온갖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살아오신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에 만족하며 그리 살았다.
김치와 밥 뿐인 식단이라도 하루 세 끼 먹는 것에 감사하며 살았다.
하지만 결과가 이런 것인가.
"이, 이봐요. 괘, 괜찮아요?"
전신에 감각이 없다. 어떻게든 움직여보려는 손가락은 하람의 의지를 매몰차게 외면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만 껌뻑껌뻑 떴다 감았다 하는 것 뿐.
머리에서부터 타고 내려온 시뻘건 피가 그마저도 못하게 틀어 막아 버렸다.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1, 119죠? 그... 제가 사, 사람을 쳤어요."
아스팔트 한 가운데 쓰러진 하람의 옆에는, 40대 초반의 남성이 휴대 전화를 붙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집에서 자신만을 기다리는 옹글옹글한 아이들이 있을텐데.
출근길에 몇시에 들어오냐고 따스하게 미소지어 준 아내가 있을텐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은 닦을 생각조차 못하고, 하람의 옆에 무릎 꿇고 있는 한 집안의 가장.
"미,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아아.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화는 나지 않는다.
성대를 움직일 힘이 있었다면, 입을 오므려 단어를 만들어 낼 쥐꼬리만 한 기운이 아직 몸에 머물러 있었다면, 괜찮다고 말했을지도.
붉게 물든 하늘의 가장자리가 푸르게 빛난다. 핏물이 미처 물들이지 못한 망막의 일부분에 지독히도 푸른 하늘이 덧씌워졌다.
'어머니...'
자신이 잘못되면, 어머니는 어찌한단 말인가.
하나 뿐인 자식만 보고 사시는 가엾은 우리 어머니.
눈물이 흐른다.
사지가 마비되고 눈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몸뚱어리인데, 눈물만은 통제하고 싶었다. 울고싶지 않았다.
"끅. 끅."
하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생명수가 투명한 눈물에 씻겨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물과 핏물이 섞인 피눈물이 땅을 적셨다.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신음은 고통의 산물인가, 슬픔의 비통함인가.
삐용- 삐용-
멀어져가는 의식의 끝자락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울려퍼지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하람은 천근보다 무거운 듯한 눈꺼풀에 힘을 풀어버렸다.
*
"람아! 정신이 드니?"
눈을 반쯤 떴을 때, 타들어 가는 고통을 선사하는 빛줄기보다 먼저 하람의 정신을 깨운 것은 그의 어머니 강예슬의 목소리였다.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귀를 타고 심장으로 내려왔다.
심장에도 이상이 생긴 걸까.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고, 터뜨려 버리려는 듯. 그렇게 심장이 아파왔다.
아니, 아니다. 이건 외적인 고통이 아니다.
"어, 어머..."
"그, 그래. 람아! 엄마야!
어머니를 아프게 했다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
당신보다 자식을 더 사랑해서, 그래서 이런 몰골로 병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에게 가하는 불효에서 오는 고통.
"저, 전 괜찮아... 요."
"흑. 끄흐윽."
결국, 강예슬은 온통 붕대와 기계장치로 뒤덮인 하람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하람은 몸을 일으켜 그의 어머니를 안아주려고 했다. 그녀의 눈물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하람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몸이... 안 움직여.'
전신에 감각이 하나도 없다. 분명 어머니가 흘린 슬픔의 조각이 손등을 적시고 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
검정 세단에 부딪혀 아스팔트에 처박힌 순간부터, 눈꺼풀과 입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전신 마비.
이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그저 이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오는 착각이 아니리라.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울고 있나? 눈물을 흘리고 있나?
하람은 숨을 참았다. 눈을 감고 코로 압력을 밀어 넣었다. 어떻게 해서든 울음을 멈추고 싶었다.
자신이 울면, 어머니가 더 슬퍼할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무너지면, 어머니 또한 무너질 것을 알기에.
하지만.
도저히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궤적이 마를 일 없이 계속. 계속.
*
몇 달이 흘렀다.
여전히 눈꺼풀을 제외하면, 빌어먹을 몸은 움직여주지 않았다.
간호사의 도움으로 TV를 보거나 보험사에서 제공해준 음성 인식 전자 북을 통한 책 읽기를 제외하면, 하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루한 일상의 연속.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채 흘려보내는 시간.
자신의 손으로 밥도 못 먹고, 똥오줌도 못누는데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람아."
그럼에도 그가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어머니."
그의 어머니 강예슬. 그녀가 있기에 하람은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병신임에도 악착같이 살아가야 했다.
푸근한 미소에 맺힌 사랑이라는 열매를 이리도 퍼주시는데 어찌 포기한단 말인가. 어떻게든 살아가야지.
"오늘 어땠니?"
"나쁘지 않았어요."
하람은 해맑게 웃었다. 놀이 공원에 처음 간 아이처럼.
엄마 손 잡고 처음으로 산 장난감 자동차를 손에 쥔 철없는 꼬마처럼.
혹여나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그랬니? 엄마는 오늘…."
한동안 어머니의 일상이 이어졌다.
이번에 이름있는 한식집에 새로 취직했다는 생활적인 부분부터, 치근덕대는 손님이 있었다는 소소한 일상까지.
그녀는 종일 병실에 틀어박혀 있는 하람을 배려해 주고 있었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인상과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화법으로 어딜 가든 사랑받을 수 있는 여인.
"...그런데 그 후줄근한 늙은이가 엄마한테 느끼한 미소를 보내는 거야! 그래서 본 척도 안 하고 지나쳤지!"
"하하하."
별것 아닌 이야기조차 재미있는 동화로 탈바꿈시켜 주는 어머니의 노력에 하람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가진 것 없던 삶이 더 박복해졌다.
보험금과 피해 보상금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곧 생활비조차 떨어지고 말 터.
쉴 틈 없이 일해야 어느 정도 생활이 가능한 상황이다. 오늘도 무거운 식기를 들어야 하는 한정식집에서 고된 하루를 마치고 오셨으리라.
허나, 어머니는 강하다 했던가.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힘든 일과에 지쳐 많이 피곤할 텐데도,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웃음꽃과 함께 피어난 어여쁜 얼굴 뒤로 은은한 후광이 비친다.
이것이 어머니라는 존재다.
"우리 어머니 아직 안 죽었네요. 그럼 결국 그 아저씨를 어머니가 차버린 거네요?"
"그래! 바로 그거야! 배는 툭 튀어나와서 머리는 올백으로 넘기고, 젤은 얼마나 떡칠했던지. 머리에 기름이 좔좔 흐르지 뭐니?"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런 남자는 안 됩니다."
"얘는! 엄마는 우리 람이뿐이야."
한동안 훈훈한 대화가 오고 갔다.
솔직한 심정으로, 정말 괜찮은 남자만 있다면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싶었다.
병신이 된 자식은 그냥 두고 가시라고.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놈 그냥 두고 가시라고.
그럼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을 거라고.
'거짓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한마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발 곁에 있어 달라고, 어머니마저 가버리면 너무 무서울 거라고, 외로워 미쳐버릴 거라고. 그렇게 외쳐대고 있었다.
'비겁한 새끼.'
겉으로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이런 생각에 빠져든다.
자신도 몰랐던 자아가 수백 개쯤 되는 듯한 착각과 망상 속에서 하람의 정신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람아?"
"아. 네?"
"괜찮니?"
하람의 얼굴에 나타난 음울함이 강예슬의 슬픔 주머니를 건드렸다.
세상 그 무엇보다 깨끗한 물방울을 흘리기 직전의 어머니. 한 마디만 잘못 말해도 울음 샘이 터질 것처럼 보였다.
"네. 괜찮아요."
그래서 웃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쓰고 있는 가면을 한층 더 두껍게 만들었다.
"그래. 이만 쉬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네. 어머니. 집에 가서 주무세요."
"아니야. 여기서 자고 갈게."
하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침대 밑에서 간이식 침대를 꺼내, 베개를 돌돌 말고 있는 하얀 이불을 펴고 가져온 얇은 모포를 덮고 누웠다.
"잘 자렴."
"네. 어머니. 좋은 꿈 꾸세요."
"그래. 사랑한다."
"......저도요."
이 말을 내뱉기가 왜 이리 어려운 걸까.
*
다음날, 하람은 평소 10시 퇴근하는 어머니를 오후 5시에 보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녀의 옆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치장한 30대 남자가 있었는데, 깔끔한 정장에 하얀 와이셔츠가 완벽하게 어울리는 셀러리맨이었다.
"어머니. 일찍 오셨네요. 옆에 분은 누구시죠?"
하람은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 눈동자를 굴려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까딱 잘못하면 베일 듯한 눈매. 그와는 상반되게 은은하게 걸려있는 입가의 미소.
먼지 한 톨 없는 옷과 꼿꼿한 자세에서, 그가 얼마나 섬세하고 깔끔한 성격인지 알 수 있었다.
"이분은..."
"류하람 군이죠? 반갑습니다. JY그룹의 서이솔이라고 합니다."
강예슬의 말을 끊으며 치고 들어오는 서이솔이라는 남자.
그의 행동에 하람은 불쾌해졌다. 자신 같이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을 사는 놈보다 어머니는 훨씬 더 존중받고, 대접받아야 한다.
"무슨 일이죠?"
하람의 목소리가 자연스레 딱딱해졌다. 어차피 그에겐 무서울 게 없다.
아무리 상대가 대한민국 제일 그룹 JY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아니, 오히려 죽음이 더 반가울 지경이다.
"하하. 이거, 제가 하람씨의 기분을 나쁘게 했나요?"
눈매는 여전히 잘 벼려진 칼과 같은데, 입에선 웃음소리가 난다.
겉과 속이 다른 전형적인 모사꾼.
그것도 한두 명 상대해본 초짜가 아니다. JY그룹의 일원이라면 세계를 무대로 한 전문가들과 크고 작은 암투를 겪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일 터.
그렇다고 해도 하람이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이것 참. 까칠하시네요."
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하람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미 온몸의 감각세포가 죽어버렸을 텐데, 살모사 한 마리가 몸을 기어 다니는 착각이 들었다. 서늘한 감촉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듯했다.
그만큼 강렬한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뭐, 좋습니다. 그럼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 JY그룹에서 한 가지 프로젝트를 실시합니다."
"프로젝트요?"
"예. 선천적으로 장애를 앓고 있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 운신이 힘든, 하람씨 같은 사람들을 위한 희망 전도 프로젝트. 일명 아틀란티스 프로젝트."
"아틀란티스 프로젝트?"
"네. 앉아도 될까요? 조금 길어질 듯하니까요. 어머니도 앉으시죠. 같이 들으셔야 합니다."
하람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서이솔은 이미 손님용 간이 의자를 두 개 가져와 하나는 어머니에게 권하고 나머지 하나에는 자신의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는 상체를 살짝 숙여 들고 있던 무언가를 침대 밑에 내려놓았다.
"자. 자세히 설명해 드리죠. 혹시 SF영화 좋아하십니까? 매트릭S나 아바TA 같은 그런 종류의 영화요."
"...네. 그건 왜 물어보시죠?"
"아아. 질문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일단 제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세요."
마이 페이스를 고수하며 제멋대로 대화를 유도하는 서이솔의 태도에 하람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람이 무언가 반박하려고 입을 오물거리자, 서이솔이 재빨리 말을 이어갔다.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얘기가 빠르겠네요. 아틀란티스 프로젝트는 신체적 결함을 가진 분들을 저희 JY그룹이 우여곡절 끝에 발견한 새로운 세계 '아틀란티스'로 보내드림으로써,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종의 뉴라이프 설계 시스템입니다."
서이솔의 말에 하람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이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새로운 세계? 아틀란티스?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헛소리였다.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병신에게, 희망이라는 탈을 쓴 고통을 주기 위한 사기꾼임이 분명해 보였다.
제2의 인생이라는 꿈만 같은 개소리를 내뱉고 있는 서이솔을 보며, 하람은 욕지기가 치미는 걸 겨우 참아냈다.
"당신이 보기에는 내가 멀쩡해 보입니까? 아니면, 몸이 이렇다고 해서 정신까지 병신으로 보여요?"
"예?"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서이솔의 표정에, 결국 제대로 꼭지가 돌아버렸다.
"새로운 세계고 나발이고, 내 손으로 밥도 못 먹습니다. 똥오줌도 못 가려요. 못 움직인단 말입니다. 종일 눈만 깜빡이는 삶을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잠드는 순간에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바라고, 깨어날 때면 어떻게 하루를 버틸지 고민하는 삶을 살아 보셨어요?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보셨냐 구요. 제일 지독한 게 뭔지 아세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한 정신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휘둘릴 만큼 정신 빠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오열과도 같은 하람의 외침에 옆에 있던 강예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버렸다.
치부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했다. 끝까지 숨기고 싶던 추한 모습을 어머니께 보이고야 말았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그러니 이만 가주세요. 꺼지시라고요."
"아아, 뭔가 오해가 있으시군요. 하람씨는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람씨를 정신병자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서이솔은 난감한 듯 손사래를 쳤다.
하람은 답답함을 겨우 밀어 넣고 분노를 꾹꾹 담아 질문했다.
"그럼, 뭐죠?"
"조금만 참고 들어주세요. 하람씨는 저희가 개발한 차크라 볼텍스(Voltex)라는 장치를 사용하게 될 겁니다. 이 장치를 사용하면 하람씨의 '의식'만 아틀란티스로 이동하게 됩니다. 차크라 볼텍스가 하람씨에게 그곳에서 생활할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줄 거에요. 쉽게 말하면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S, 혹은 아바TA 처럼요."
하람은 당장에라도 이 사기꾼의 멱살을 틀어쥐고 차가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다른 세계로 의식만 이동한다?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는 시늉이라도 할 것 아닌가.
"못 믿으시겠죠? 이해합니다. 현재 우리의 기술력으로는 의식을 다른 세계로 보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죠. 아니, 애초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도 어렵죠."
"그걸 아시는 분이 이런 사기를 칩니까? 사기꾼이세요?"
하람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생각할수록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꿈도, 희망도, 살아갈 의지도 없는, 죽지 못해 사는 병신에게 왜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하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눈을 부라렸다. 실핏줄이 터지는 바람에 눈이 벌겋게 물들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그렇죠. 흐음. 좋습니다. 하람씨를 이해시키기 위해선,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듯하군요.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서이솔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오른편에 내려놓았던 은색 아타셰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탈칵 탈칵 소리를 두 번 내며 열린 아타셰 케이스 안에는, 목에 걸어서 사용하는 블루투스 이어폰과 흡사하게 생긴 장치가 들어있었다.
뻑뻑한 검정 스티로폼 사이에 파묻힌 장치를 꺼내든 서이솔은 오른쪽에 달린 전원 버튼을 누르더니, 하람의 머리를 살짝 들고 목에 장치를 걸어주었다.
"이게 뭐죠?"
서이솔은 하람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주위의 시선을 차단할 수 있는 개인용 커튼까지 빙 둘러친 후에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이솔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려있었다. 이번에는 눈꼬리가 슬쩍 쳐지는 걸 보니, 진짜로 웃는 듯했다.
그가 말했다.
"직접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