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의 이야기 **
내 호텔 방안, 벽 한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유리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여름날 아침의 선명한 햇빛이 너무 좋다. 언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정말 오래 살기는 살았구나 하고 생각한다.
아침 10시.
호텔의 비즈니스센터에서 촬영이 시작된다. 우리는 벌써 모든 촬영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다. 모두 어제 저녁 잠을 푹 잤는지 얼굴에 번지는 웃음이 어제보다는 여유롭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혼란스럽다. 정말 모두의 소나무 영혼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물어도 그게 뭐냐는 반응이다. 내가 정말 하룻밤 꿈을 꾼 것 같다. 내 주술이 통했을 리가 없다. 사라졌던 힘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아무런 징후도 없이 다시 나타난단 말인가.
이런 잡다한 생각을 오래 할 수가 없다.
어제 오후 장소 추천인이었던 댄형의 진행으로 시작한 방송은 제작진에게서 장소가 적힌 카드를 받자마자 곧바로 나와 효기에게로 진행이 넘어온다. 같은 장소를 추천한 사람이 나와 효기인 것은 이미 눈치를 챘다. 멤버들도 다음 우리가 향하는 곳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제작진이 건네는 카드를 받고 추리 하는 척을 해본다.
“국보 제225호, 이곳의 이름은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효기가 제작진이 건넨 카드를 읽는다. 다들 핸드폰을 꺼내 들고 검색에 나선다.
댄형이 제일 먼저 대답한다.
“창덕궁 인정전이군요!”
일월오봉병이 옥좌 뒤에 있는 곳. 내가 눈이 가려진 채 왕을 만난 곳. 그동안 두려움에 한 번도 다시 찾아 가보지 못했던 곳. 그렇게 몇백 년이 흘러도 두려움에 창덕궁 안으로 한 발짝 걸음을 들여놓지 못한 곳으로 팀원들과 같이 간다.
나와 같이 창덕궁을 향하는 멤버들은, 몇백 년 전 그날 나에게 영생을 명령하던 왕이고, 그 왕이 가지고 오라고 명했던 소나무 영혼들이다. 이번에는 궁 안으로 들어가 보자. 모두와 함께니 두려워 할 것 없다고 혼자 마음을 다잡는다. 어쩌면 우리의 답이 이곳에 있을 수도 있지 않으냐며 나를 다독인다. 다독이는 것만으로 안된다. 모두가 기다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면 궁에 들어가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나 자신을 밀어붙여 본다.
효기와 나의 진행에 댄형이 끼어든다.
“사실 나 여기인지 이미 알고 있었어. 내가 여기랑 선유도 두 곳을 적어 냈었는데, 제작진분들께서 댄이 추천한 곳, 두 곳 다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해줬거든”
우리 둘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하더니, 카메라를 향해
"왜 여기를 추천했는지 진행을 맡으신 두 분, 각자 이야기 해주세요."라는 말을 내뱉는다.
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거짓을 이야기 하고 싶지도 않아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 본다.
“아주 옛날에 이곳에 왔었는데, 그때 제대로 보지 못한 인정정안의 옥좌 뒤에 배치된 일월봉월도, 그림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오, 대단해. 엠씨 두 분 지금 창덕궁 안의 건물 이름도 제대로 못 외워서 어버버 거리는 중인데, 인정전 안 그림 이름을 외웠어!” 나비의 나를 놀리는 말로 촬영장이 웃음바다가 된다.
효기의 진행으로 두 명이 한 조가 되는 게임을 한다. 팀을 짜서 오늘 오전 제작진이 준비한 창덕궁에서의 미션을 수행하고 꼴찌가 된 팀의 팀원들은 벌칙으로 여장을 하고 셀카 찍기를 하기로 한다.
게임을 떠나서 효기를 내 파트너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효기 녀석도 나에게 사인을 보낸다. 아주 적극적이다. 어제 저녁, 나를 내 방으로 돌려 보내기 전 자신이 왕이었다고 고백한 이후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 같다.
효기와 같이 진행을 봐야 하니 같이 짝이 되겠다고 말하자 다른 멤버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렇게 하라고 흔쾌히 동의해준다.
우리가 팀이 되자마자, 효기는 '형도 나와 같은 장소를 추천한 줄 알았다'며 싱글벙글한다.
“나 여기 알아”라고 내가 덤덤하게 말하자 효기는, “어련하시겠습니까”라고 되받아친다.
“네가 나를 불러서 가본 이후로 아직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어. 너무 두려웠거든, 그때의 죽음의 기운이…” 나의 말의 효기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도대체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이십 년 전, 구정연휴에 정말 큰 용기를 내서 돈화문 앞 까지 갔다가, 두려워서 한발 들어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냥 되돌아온 기억이 이 장소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야.” 효기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다. 우리가 가려는 장소에 대한 스스로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효기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형이었구나!”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내 말을 옆에서 들은 나비가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가볍게 친다.
“우리 모두 이십 년 전에 정말 많은 일을 만들었구나!”
나비의 반응에 나는 다시 혼란스럽다.
아직 소나무 영혼에 대한 기억이 있는 건가.
하지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카메라 앞에서 우리는 프로가 되어야 한다. 서로에게 묻고 싶은 말을 잠시 참고, 장난기와 수다로 가득한 아이돌로 변한다. 모두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그 옛날 우리가 한자리에 모였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고 생각한다. 모두 잘 자란 도령들이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광장까지 팀별로 택시를 타고 가는데 쉼 없는 촬영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