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댄의 이야기 **
막내 효기와 내가 탄 택시가 솔밭 근린공원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제작진에게 받은 용돈이 넉넉하지 않아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택시로 갈아타는 계획을 세웠었는데 의외로 빨리 우리 네 명 모두 출발지에 도착했다.
출발지인 솔밭 근린공원에 가득 찬 소나무들이 푸르다. 나의 기억에 있는 소나무들도 이곳의 소나무들처럼 푸르렀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우리 동생, 나비와 네오, 둘이 보인다. 점심 식당에서 우리 보다 먼저 출발한 둘은 주차장에서 동네 강아지들과 놀고 있다. 우리는 촬영 중인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카메라 뒤에서 마지막으로 출발한 켄과 빈팀이 어디 있나 연락 중이시던 작가님이, 우이 우이령길의 주차장으로 그들이 가고 있다고 말해주신다. 나눠주신 카드를 다시 보니, 우리와 반대편의 소나무 숲길 출발점이다. 카메라 앞에서 방송 센스 없는 케니와 빈이라고 뒷담화를 하며 네 명이 산행을 시작한다.
이 장소를 선택한 나비는 우리의 산행을 “한낮의 숲속 산책”이라고 이름 지었다. 목적지 까지 삼십 분, 다시 출발점으로 삼십 분. 왕복 한 시간이면 되는 여름날 아무나 할 수 없는 산책이라며 혼자 흥분해서 중얼거리는 모습이 평소 답지 않아서 귀엽다. 그러다 갑자기 “하아. 떨린다.” 한숨을 쉬며 말하는 나비. “그래도 우리 다 같이 가니까 괜찮을 거야!” 뭐가 불안한지 혼자 중얼거리기까지 하는 나비에게 네오가 손을 들어 나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방송 처음도 아닌데, 뭘 긴장해?” 하고 묻는다.
“이 장소를 추천한 진짜 이유가 뭐야? 첫사랑이랑 데이트 온 장소야?”
나의 짓궂은 질문에 나비는,
“내가 전생에 소나무였는데, 여기가 고향이거든!”
나비의 뜻밖의 대답에 녀석의 상황극 시작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너도 전생에 소나무 였었니? 나도 소나무였었는데, 내 고향은 훨씬 북쪽이야.”
상황극을 받아주는 네오는 표정이 진지하다. 말 없는 네오가 이런 상황극을 받아주는 것이 신기하다.
“나도 소나무였어. 내 이야기 들어 볼래?”
둘의 상황극 같은 상황에 나도 슬쩍 끼어들어 본다. 농담 같은 그들의 대화에 슬쩍 얻어 나의 과거를 이야기해 보는 것도 내 마음의 짐을 덜어보는 방법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마음의 출구를 찾고 싶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었다.
이 상황에 효기도 한마디 거든다. “나는 전생에 왕이었어.”
“우리 다 소나무 역할이니까 너도 소나무해!” 네오의 단호한 한마디가 날아온다.
“너도소나무, 너도밤나무 야냐?” 중얼거리던 나비가 농담을 던진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숲속길을 터덜터덜 걸어 올라가고 있다. 내 앞으로 나비와 네오가 바짝 붙어서 걸어가고 있고, 뒤에는 효기가 나를 따라 오르고 있다. 카메라와 조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는 벌써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을 닦으며 아무도 묻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몇백 년 전 소나무였었다.
소나무인 내가 처음 의식의 눈을 떴을 때, 나는 나를 향해 주술을 외우고 있는 젊은 선비를 볼 수 있었다. 중저음의 목소리로 주술을 외우던 선비의 목소리가 내 기억에 담아졌다. 그는 흰색의 한복과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가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볼 때 지나가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그의 넓은 소맷자락과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나부끼는 두루마기 끝자락이 좋아 보였다. 그의 머리에 쓴 검은색의 챙이 넓은 갓과 단아하게 매어놓은 옷고름이 그의 가슴 앞에 드리워져 젊고 풍채 좋은 그의 외관에 멋을 더하고 있었다.
나를 깨운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참을 서서 나를 바라보다, 나에게 다가와 한 손을 들어 나의 밑동을 쓰다듬으며, 이제 다 끝났으니 모두 한 자리에 모으기만 하면 된다, 하였다. 중저음의 그의 목소리가 좋았었다. 나에게 더 말을 걸어 달라 하고 싶었으나 그 선비는 뒤돌아 내 옆 숲길을 따라 사라져 갔다. 그의 흰옷 입은 뒷모습과 걸음걸이가 또 그렇게 좋아 보였다.
선비가 떠나도 나는 기분이 좋았었다. 처음 맡아보는 나에게서 풍겨나오는 가을 솔잎의 냄새가 상쾌했고, 내 주위의 소나무들의 바람에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가 청량했고, 가을 하늘이 높았다. 푸드덕 날아오르는 새소리와 익어가는 솔방울들이 가지 끝에 대롱거렸다. 껑충 큰 나의 높이로 이런 소나무 숲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가을 햇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시원한 날이었다.
그러다 훅하니 비릿한 피 냄새를 실은 바람이 불어왔다.
흰옷을 입고 나를 깨운 선비가 세 명의 검은 옷을 입고, 칼을 들고, 얼굴을 가린 남자들에 쫓겨 나의 가지들 아래까지 다시 도망쳐 왔다. 흰옷 선비는 이미 칼에 찔려 흘린 많은 피로 마치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듯이 보였고,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남자들의 손에 든 칼에서는 흰옷 선비의 핏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를 원망하지 마시게. 우리는 그저 돈에 움직이는 잡놈 같은 박수 무당들일 뿐이라네.”
이 말을 한 검은 옷의 칼을 든 남자가 흰옷의 선비 목을 한칼에 날렸다.
목 잃은 흰옷 선비 몸통이 나의 나무둥치 옆에 힘없이, 퉁. 쓰러졌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이 아무도, 아무거도 움직이지 않았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듯하더니, 흰옷 선비의 목을 날린 칼날은, 순식간에 검은 옷을 입은 나머지 두 남자의 목도 날려버렸다. 무방비로 서 있던, 그 남자들의 목도 한칼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칼을 휘두른 검은 옷의 남자는 쥐어뜯듯이 얼굴을 가린 두건을 벗어 던지고, 흰옷 선비 몸통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칼은 내팽개쳐져 핏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는 필사적이었다.
날아가 버린 흰옷 선비의 머리를 다시 붙일 수 있다는 듯이 가지런히 몸통과 뉘고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나비이라 아미브하아..”
“나비이라 아미브하아..”
“나비이라 아미브하아..”
나를 깨운 주문이었다.
끊임없이 절을 올리는 검은 옷의 남자 몸은 세 명의 주검에서 흘러내린 피에 흥건히 젖어 비릿한 피 냄새를 바람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금방 근처의 산짐승들을 불러 모았다. 검은 옷의 살아 있는 남자는 흰옷 선비를 깨우기 위해서인지 주문을 끊임없이 외우고 있다. 그러면서, 몰려든 산짐승들을 쫓아내려 죽어 널브러진 두 명의 검은 옷 남자 시체들을 던져줘 보지만, 가을날 배고픔에 굶주린 산짐승들 모두 돌려보내기엔 터무니 없어 보였다.
하룻밤을 그렇게 주문을 외우며, 산짐승을 쫓으며 지샌 남자는 아침 햇살에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나의 나무둥치 아래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해가 나의 머리끝에 다가와 떠 있을 때 쯤에야 흰옷 선비의 시체를 나의 뿌리 밑에 묻은 그는 그렇게 한참을 서서 나를 바라보다 뒤돌아 산등성이를 휘청거리며 내려갔다.
“형들 괜찮아?”
효기의 말에 나는 나의 옛 기억에서 빠져나와 어느 사이 인가 내 옆으로 와서 같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생들을 본다.
나는 내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나의 이야기를 하느라 같이 산책 중인 네오와 나비의 얼굴을 살피지 못했다. 나비의 흔들리는 눈이 보인다. 숨을 가쁘게 쉬고 있다.
자신도 몇백 년 전 소나무였는데, 흰 한복 입은 남자가 찾아와 자신에게 영혼을 불어넣고 떠났고, 검은 옷의 세 명의 남자들이 그 모습을 감시하며 보고 있다가, 다음날 다시 찾아와 나비인 나, 아니 소나무에게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를 숨 한번 쉬지 않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장소가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야!”
마지막 말을 아직 흥분이 가지 않은 목소리로 쏟아낸다.
효기의 “나비형, 랩 하세요?” 라는 농담을 네오가 다음으로 받는다.
“나도 소나무였었는데 흰색 한복의 선비가 찾아와서 나의 영혼을 깨웠었어. 그리고 산불이 나서 나는, 아니 소나무는 타죽었어. 그 선비, 나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가버리더니 다시 그 숲을 못 찾아온 이유가 죽어 버려서였구나!”
너무나 차분하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조용조용 말하는 네오의 이야기에, 이제는 나의 눈동자도 흔들린다. 한낮, 소나무 숲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춘다. 숨이 가빠온다. 이건 상황극인가? 몰입도가 장난이 아닌데. 나도 뭐라고 한마디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알겠는데, 내 옆에서 찍고 있는 카메라 감독님이 눈에 들어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 감독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이 산책길에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나비는 사뭇 진지해져서 소나무에서 영혼을 가지고 깨어난 것이 몇백 년 전이냐며 네오와 함께 신중한 계산을 하고 있고, 우리 외에도 그 남자가 깨운 영혼이 더 있을 수 있겠다면 흥분해서 나와 네오를 붙잡고 정신없이 떠들고 있다. 네오는 왜 그 남자가 소나무 영혼을 깨우고 다녔는지 이유를 아느냐고 물어오지만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왜 우리를 깨웠는지 나비에게 다시 묻고, 나비가 네오에게 되묻는다. 이런 정신없는 대화 속에 우리는 벌써 목적지인 소나무 숲길의 가운데 자리한 PHOTO POINT, 소나무 쉼터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면 무슨 단서든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면서 완전히 흥분한 나비. 그런 나비와 나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네오. 그런 나비와 네오를 보며 나는 아직도 얼빠진 모양을 하고 있다.
PHOTO POINT 표지판 앞에 둘러서서,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에게 작가님도 무슨 이야기인지 물으신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나를 대신해 효기가 팬픽 캐릭터에 완전히 빙의되어서 상황극 이야기 하고 있는 중이라고 작가님께 마구 말을 지어내고 있다.
비 오듯이 땀이 흘러내린다. 더워서가 아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다. 네오가 건네는 작은 물병을 건네받았지만 손에만 들고 있다. 나비는 혼자 아직도 뭔가를 중얼거리며 여기저기를 휙, 휙 둘러보고 있다. 케니과 빈이 도착할 때까지 잠시 휴식을 취하자는 작가님의 말이 저 멀리서 들린다. 어떻게 우리 셋이 소나무 영혼일 수가 있는가?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던 것 같다.
“케니형이랑 빈형 온다. 둘이 싸웠나? 분위기 왜 저래?”
효기의 말에 정신 차리고 촬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통수를 때린다. 머리를 들고 둘이 걸어오는 방향을 보니 가까이 다가오는 둘의 분위기가 정말 말다툼이라도 한듯하다. 둘이 땅만 보며 아무 말 없이 걸어오고 있다. 케니의 성격에 저럴 수가 없는데 싶다.
우리가 모두 한자리에 모이자 효기가 농담을 던져 상황극 같은 이 상황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리고 빈과 케니의 분위기도 돌려보려 한다. 카메라가 우리를 찍고 있다.
“우리 팀 세 분 형님들은 약 육백 년 전에 자신들이 소나무였다면서, 소나무 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우고 계십니다. 그쪽 형님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시면서 오셨나요?”
“너희들도 소나무였었어? 나도 몇백 년 전에 소나무였었어. 그런데 그때 선비인 빈이 나에게 와서 영혼을 불어넣어 줬었어. 그리고 여기 올라오면서 겨우 서로를 알아봤어”
다시 케니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케니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시선을 빈에게 집중시켰고, 폭풍 전야의 침묵을 불러왔다. 그러고 서서 빈을 바라보니, 녀석의 넓은 어깨가 나를 바라보고 섰던 선비의 풍채랑 비슷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 여섯은 긴장감으로 목에 힘을 주고 둥글게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시선은 모두 빈에게 모아져 그가 한마디 말을 해주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 우리들의 머리 위 하늘도 어두워진다. 소나기가 곧 쏟아지려는 듯이 먹구름들이 몰려오고 있다.
소나무 숲은 조용하고, 바람도 한 줄 불어오지 않는다.
== 5화. 촬영 첫날, 13:00PM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