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니의 이야기 **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웃고 떠들며 오전 연습실에서의 오프닝 촬영을 빨리 끝내고 늦은 아침 겸, 빠른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한다. 숙소 근처의 식당으로 향하는 우리들의 머리 위로 여름 태양이 뜨겁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흰 구름이 선명하다.
식당으로 향하면서 촬영이 잠시 끊긴 사이, 막내 효기는 핸드폰을 꺼내어 우리가 무엇을 하며 식당으로 향하나 촬영 중이다. 효기가 내 얼굴 앞으로 들이미는 핸드폰 카메라 앞에서 나는 팬클럽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미소와 애교를 부려본다. 손 하트를 만들어 여기저기서 꺼내는 시늉을 해준다. 이런 철없어 보이는 사랑스러운 애교를 가진 나는 케니이다. 팀에서 네오형과 함께 보컬 담당이다. 스물셋인 나는, 위로는 형님 두 분과 아래로는 동생님들을 모시며 살고 있다. 그중 우리의 막내 효기는 나를 힘으로 제압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효기에게 죽음의 목조르기 어깨동무를 당하지 않으려고 효기가 시키는 데로, 효기랑 같이 핸드폰 동영상 촬영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팀원들보다 많이 뒤처져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다.
뒤에서 촬영팀을 따라 걸으며 나와 한팀이 된 빈을 눈으로 찾고 있다. 내 정면으로 팀원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여느 아이돌 그룹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기획사에서 멤버들을 뽑아 만든 그룹이다. 그렇게 의도되어 만들어진 우리의 여섯 팀원은 모두 평균 키가 181cm가 훨씬 넘는 장신들이다. 그런 훤칠한 멤버들의 뒷모습 사이에서 아래위로 흰색의 옷을 차려입은 빈의 뒷모습이 보인다.
얼른 쫓아가, 효기에게서 받아든 핸드폰 카메라로 멤버들을 촬영한다.
“네오 형도 나처럼 소나무 좋아 한데. 그리고 추억도 많고 슬픔도 많데. 그러니까 걱정 마”
그런 나비의 말에 빈은 “그리고 난 거기 가는 게 사실은 무서워!” 라는 대화를 들으며 둘의 얼굴을 찍고, 다시 걸어가는 빈의 뒷모습을 찍는다.
소나무 이야기를 나누는 빈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빈의 흰옷 입은 뒷모습과 걸음걸이가 내 뇌리에 박혀있는 몇백 년 전의 그 선비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소나무 안에 있었다.
내가 소나무 안에서 눈을 떴을 때, 정갈하게 흰색의 한복과 두루마기와 연초록 괘자를 차려입은 선비가 보였었다.딱히 멋을 부리지 않았어도 멋이 더하여져 보이는 선비였다. 갓을 쓴 선비는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며 주술을 외우고 있었다. 나는 저 선비가 나에게 혼을 불어넣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비가 얼마 동안 그렇게 그곳에 서서 주술을 외웠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내가 깨어나자 곧 그 주술 외우기를 멈추고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었다.
나는 눈을 떠 산골 마을로 들어가기 전의 숲길 초입에 자리 잡고 서 있는 큰 키의 나를 발견했었다. 그런 나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선비를 바라보고 있다.
구름이 넘실대는 하늘에서 불어오는 조그마한 바람에도 내 눈앞 들판 넘어, 청보리밭의 초록 물결이 일렁이고, 봄날의 송홧가루가 날리던, 그런 날이었었다.
그렇게 조용히 서 있던 선비는, 길가에 서 있는 나를 깨우기만 하고는, 기다려 달라는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는, 손 한번 들어 나를 쓰다듬기만 하고는, 뒤돌아 작은 길로 멀어져 가버렸었다. 그때 나는 흰색의 두루마기와 연초록의 괘자를 아침 햇살과 봄바람에 휘날리며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그의 발걸음 걸음걸이가 보기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선비가 떠난 그 날 오후, 구름이 가득 찬 하늘 아래 불이 일었다.
저 멀리 청보리밭의 밭두렁에서 일어난 불길은 바람을 타고 나에게로 거세게 다가왔다. 들판을 따라온 검은 연기가 내 몸을 감쌌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붉은 불길이 내 몸통에 닿을 듯 말듯 내 주위를 넘실거렸다.
검은 연기 속의 불길은 봄날 바짝 마른 나의 소나무 기둥들 스치듯 할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구름 낀 하늘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둑 내리던 봄비 몇 줄기는 거센 불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이만 보였지만, 금세 굵은 빗방울들이 나의 나무둥치를 타고 내렸었다. 바짝 말라 있던 내 솔잎들에 빗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했었다. 메말라 갈라지기 시작한 땅속으로 단 빗물이 흘러 들어갔었다. 내 주위를 넘실거리던 불길은 어느새 검은 자국만을 내 몸뚱이에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들판은 검은 연기대신 흰 연기가, 꺼져 가는 불씨를 알려주고 있었었다. 그렇게 한참을 봄비가 내리고, 나의 뿌리로 단물이 빨려 들어오고, 줄기 속을 따라 올라 갔었다. 불길에 그을린 몸통은 아무렇지 않은 듯, 줄기속의 봄비에 취해 나는 연두색의 새싹들을 몸 밖으로 밀어냈었다.
오월에 내리는 봄비였었다. 그리고 그날의 봄비는 내가 맛본 그 어느 것보다 달고 맛있었다. 그리고, 그 봄비는 나를 불길에서 살렸었다.
빈의 흰옷 입은 뒷모습과 걸음걸이가 내 뇌리속에 박혀있는 그 선비와 같다는 생각을 했을 때, 몇백 년 전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짧은 순간의 잊히지 않는 달콤 쌉싸름한 기억들이다. 뛰어가 그런 기억을 불러일으켜 준 빈을 뒤에서 꽉 끌어안아 준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빈이 뭔 닭살스러운 소리냐며 몸서리친다.
“웅, 그래도 사랑해, 빈아!”
== 3화. 촬영 첫날, 11:00AM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