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라티아 제국의 중심, 황도.
오래간만에 나온 황도는 마지막으로 본 후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저 거리의 가게와 노점상이 좀 바뀐 것뿐.
“자, 오랜만에 나온 황도인데 즐기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하얀 꼬마 아이가 달려와 부딪혔다.
“죄, 죄송합니다!”
“응? 아니,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뭔가 사라진 건 없는지 더듬고 있었고 눈은 자신과 부딪힌 하얀 아이를 찬찬히 훑어보고 있었다. 이런 순수하게 생긴 아이일수록 더 경계해야 한다. 특히 황도의 ‘이런’ 거리에서는.
“알비노?”
사라진 게 없는 걸 확인한 카일라는 하얀 아이의 특이한 외모에 놀라 중얼거렸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눈 보다 더 하얬고 눈동자는 피보다 붉었다.
“네?”
못 들은 것 인지 모르는 것인지, 그 새하얀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음, 아니야. 정말 오랜만에 너 같은 사람을 봐서.”
“‘저 같은 사람’이 누구죠?”
하얀 아이는 살짝 경계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황도 제17거리니까. 황도의 거리 제1에서 25까지 중 제1거리는 황족 또는 황족이 부른 사람 만을 위한 거리고, 2,3,4는 귀족을 위한 거리, 5에서 10까지는 부유한 중산층 또는 중, 하급 관리를 위한 거리, 11에서 23까지는 평민들을 위한 거리라 지만 실상 16, 17 정도 되면 빈민가와 평민가 사이 정도 된다. 그 뒤로는 정말로 빈민가 또는 암흑가.
“내 친구. 헤어진 지 아주 오래되었거든.”
그리곤 어딘가를 향해 가리켰다.
“내 친구는 저기에 살아. 그래서 잘 만나질 못해.”
카일라가 가리킨 곳에는 하얀색, 하늘빛과 연보라빛이 살짝 도는 마법의 돌로 지어진 아라나스의 궁이 있었다.
그곳은 황제의 최측근이 기거하는 곳으로, 주로 호위 기사, 황실 마법사, 4성급 황실 용사와 그들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음, 그럼 많이 그립겠네요?”
“아니.”
아니야. 그립지 않아. 전혀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
“뭐라고?”
카일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어떻게……?
“지금 손가락 깨물고 있잖아요. 거짓말하지 마요.”
그 순간 카일라는 정신이 퍼뜩 들어 물어뜯고 있던 오른손을 내렸다. 이대로 가다간 심문 당할 것 같았다.
“음, 그건 그렇고 말이야, 넌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던 거였니?”
카일라는 얼른 대화 주제를 바꿨다. 뛰어가다 부딪힌 것이니 필시 중한 일임에 틀림없으리라.
“도망친 거예요.”
“도망? 혹시 납치됐니? 아니면 아버지가 매일 때려?”
그럼에도 하얀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저었다.
“그러면?”
“고아원이요.”
“고아원?”
끄덕.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주고 싶지 않은지 입을 조개처럼 꽉 다문다.
“그래. 그럼 갈 곳은 있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라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지만 ‘그’는 없었다.
“아니요.”
대답이 같았다. 그냥 단순한 ‘아니요’였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아니요’는 내가 한 ‘아니요’와 같은 부류의 ‘아니요’였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같은 생각,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니요, 갈 곳은 없어요. 그냥 떠돌아다니려고요. 그러니까 그건 신경 꺼 주세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고?”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버리고 가자니까. 이런 수법은 좀도둑이 쓰는 아주 고전적인 수법이야. 저 순수하게 생긴 눈빛에 속으면 안 돼.]
순간 카일라는 그 목소리가 밖이 아닌 자신의 머릿속에서 난다는 걸 알아차렸다.
카일라는 내가 데리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시국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더욱이 ‘그것’ 에 특효라고 알려진 알비노라면 더더욱. 나는 좀 높은 지위에 있으니 괜찮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알비노라면 말이 달라진다. 항상 호위가 옆에 있지 않는 한 죽임을 당하고 실험체로 쓰일 것이다.
어지러운 시국이 점차 안정되고 ‘그것’에 대한 치료 약이 생긴다면, 그때는 이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을까.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도 있다. 간섭하기 좋아하는 간섭쟁이라고 욕먹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 아이를 도와주고 싶을까.
...과거의 내가 겹쳐 보여서 일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속이 울렁거렸다. 비록 세계도, 차원도, 시대도 다르지만 이 아이와 똑같은 운명을 가졌다. 이것이 신관들이 늘 말하던 ‘차원의 쌍둥이’ 인가? 고위 신관인 히나이는 나에게 내 차원의 쌍둥이 같은 사람을 만나기만 해도 죽이라는데. 나중에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기 싫다면. 뭐 이런 아이가 날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죽임을 당해도 좋았다. 그저 도와주고 싶을 뿐이었다. 과거의 내가 너무 생각이 나서, 그 상황이 내 뇌리에 꽂혀 떠나지 않아서. 나를 도와주던 사람들이 하나, 하나 죽어나가는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이 재연되는 것 같아서.
“마음 내키는 대로 싸돌아다녀야죠, 뭐.”
아이의 음성이 나를 생각의 늪에서 끌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