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에 다과상이 차려지고 둘만을 남겨 둔 채 서재의 문이 굳게 닫힌 지 그리 오래지 않았을 때였다. 길게 잡아 봐야 이십 분이나 흘렀을까.
서재에서 우당탕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책장이 무너지고 책이 넘어 뜨러지는 소리, 우당탕탕 탁자가 뒤집어지는 소리, 쨍그랑 하고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 벽 가득이 붙어 있을 액자들이 와장창 부서지고 떨어지는 소리...
마지막으로 외마디 비명 소리.
시아는 바로 끔찍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미친 듯이 서재를 향해 내달렸다.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것이었다.
입고 있던 하얀 실크 드레스는 달릴 때 입으라고 만들어 진 게 아니었기에 얼마 안 가 시아를 넘어지게 만들었다. 복도는 매끌매끌하게 깎인 돌로 지어졌지만 그래봤자 돌바닥은 돌바닥이라 손바닥에서 피가 철철 흐를 정도로 까졌다.
그러나 시아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실크 드레스 아랫단을 손으로 잡아채 추어올린 뒤 서재를 향해 내달렸다.
심하게 까진 손에서 따끔따끔함이 느껴졌다. 끈적끈적하고 뜨거운 것이 흘러 나와 손바닥 안에 가득 쥔 하얀 드레스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하얀 드레스가 붉은 피로 진득진득하게 물들어나갔다.
그러나 아픔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얀 드레스가 망가지는 것을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그저 서재에서 들려 온 외마디 비명 소리를 좇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분명 여성의 비명 소리였다. 아니, 어머니가 고통 속에 내지른 끔찍한 비명이었다. 시아는 몸서리를 치며 조그마한 발로 돌바닥 위를 거침없이 달렸다.
“엄마!”
시아는 남작가 딸의 체면이고 뭐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무섭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런 무참한 소음 이후에 이어진 단말마의 비명 소리를 듣고 안정감을 느낄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것도 비명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라면 더더욱.
그렇게 성의 복도를 달리고 달려 서재 방까지 도달했다. 드레스는 피로 잔뜩 얼룩지고 여기저기 솔기가 터져 나왔으며, 언제 생겼는지 모를 상처가 무릎에도 나 있었다.
무릎의 상처에서 피가 몇 방울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손바닥보다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아플 상처였다. 그러나 시아는 상관하지 않고 서재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서재 방 앞이 이상했다. 이노말리사 가문의 시녀들이 모조리 펜릴 기사단의 기사들에 의해 포박당하고 있었고, 아버지 역시 기사들이 쇠고랑을 채우고 있었다. 팔을 사슬로 주렁주렁 묶는 광경에 시아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부인께서는 어떻게 되신 거죠?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다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웅성대고, 항의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펜릴의 기사들은 문답무용이었다. 그저 시녀들을 잡아 몇 명은 끌고 갔고, 몇 명은 밧줄로 손발을 묶어 도망가지 못하게 포박해 두었을 따름이었다.
끌려가는 시녀들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재만을 바라보았으며, 몇몇은 “아아, 아아!” 하고 알 수 없는 신음만을 내지르며 끌려 나갔다. 끌려간 시녀들은 펜릴 기사단의 기사들이 마차에다 태우는 것 같았는데, 어디로 가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지옥이 편쳐진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 광경 속에서 시아는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 있었다.
“남작의 여식은 어떻게 하라 하셨습니까?”
“붙잡아서 격리하라고 하셨네. 빨리 잡도록 해. 좀 살살 하고...”
이 와중에 기사 둘은 사아를 보며 태연하게 저딴 소리를 지껄였다. 복장을 보아하니 펜릴 기사단의 견습 기사인 듯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그딴 게 무슨 소용이랴. 둘은 시아를 포박하기 위하여 밧줄을 든 채 천천히 걸어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태연해서 위화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시아는 분노와 공포, 당혹감에 휩싸여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기사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해? 엄마, 엄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잡힐 수는 없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저 기사들만 피하면 바로 서재의 문에 손이 닿을 텐데. 서재의 문을 열고 어머니의 상태를 보아야 하는데! 하지만 그저 평범한 열한 살 소녀인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어지럽고, 메스껍고. 세상이 온통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온전히 가눌 수가 없었다. 어린 아이의 머리로는 무리였을 터였다.
결국 시아는 완전히 패닉 상태가 되어 그냥 어떻게든 되라 식으로 서재 문을 향해 돌진했다. 이 때 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 당시 완전히 머리가 돌아 버린 상태였다고 했다.
뭐, 당연하겠지만 바로 펜릴 기사단 견습 기사들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한다. 어린 소녀가 정신이 나가 있다고 해서 견습 기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리가 없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아는 견습 기사들의 억센 손아귀에 붙들려 악을 쓰며 울부짖었다.
“놔! 놓으란 말이야, 저 안에서 비명이 들렸다고! 왜 우리한테 이러는 거야...”
“조그만 게 엄청 반항하네. 좀 가만히 좀 있어!”
기사는 악을 쓰는 시아를 붙잡고는 오히려 심히 나무라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메스껍고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구토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된 거야? 엄마! 엄마!”
시아는 애타게 엄마를 외치며 서재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기사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둘 리가 없었다. 금세 저지당하고 기사들의 억센 손아귀에 시아의 작은 손이 붙들렸다. 시아는 요동을 치며 몸을 빼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발광하고 있던 시아의 앞에, 서재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시아는 아주, 아주 잠시 동안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저 안에서 별 일 없이 나오지는 않을까. 모두 깜짝 이벤트일 뿐이었노라, 그렇게 웃으며 둘이서 걸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믿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냥 장난일 뿐이었어, 부서지고 깨지고, 비명 지른 것 모두 다 장난이야. 하하...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완전히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엄마! 엄마지? 맞지?”
시아는 울면서 엄마를 불렀다. 나오는 자가 어머니이기를 진심으로 고대하면서... 웃으면서 걸어 나와 놀란 자신의 뺨을 어루만져주기만을 바랬다. ‘우리 시아 놀랐구나. 엄마가 미안해. 다 장난이었어.’ 따위의 말이 들려오기만을 고대했다.
그러나 끝끝내 시아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재를 걸어 나온 자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견습 기사들의 손에 붙들려 엎드러진 채 울고 있는 시아의 앞으로 시구르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그러나 시구르드의 피는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피였다. 피로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덕지덕지 처발라져 있는 피딱지들.
들어갔을 때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비해 상당히 초췌해 보였고, 왜인지 몸 군데군데에 푸른 반점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몸에는 상처 한 군데 없었다. 그 흔한 출혈상 하나 없이, 그는 피곤한 눈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로 범벅이 된 발자국이 하나, 둘 복도 위로 떠올랐다. 비명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는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시녀들이 그 꼴을 보고 악을 쓰며 비명을 내지르고, 시아의 아버지는 퀭한 눈으로 시구르드를 바라보았다.
시구르드는 피곤해 보이긴 하나 너무나도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시아를, 아니 사아를 붙들고 있던 견습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망령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말 한 마디만을 남긴 채 시구르드는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서재 앞을 빠져 나갔다. 서재 안쪽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망령이 아니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 거 아냐!”
시아는 사라져가는 그의 뒤를 향하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럴 리가 없다. 어머니의 몸에는 망령의 특징인 결정이 달려있지 않았다.
시녀들이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어머니가 망령이 아니라는 것은 기사인 저들이 더 잘 알면서,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를 망령으로 몰아서 이 귀찮은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겠지. 전설의 인물과 닮았다는 자가 누구보다도 추악한 짓을 했다. 이번 조사로 모든 것이 다 끝날 거라는 건 이런 결말을 내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아는 눈물이 앞을 완전히 가리워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시구르드의 뒤를 향하여 비명을 질렀다. 어린 아이가 쏟아냈다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험한 말까지 쏟아 가면서 온갖 악담을 퍼부었다.
그 정도가 어찌나 격했는지, 시구르드의 명을 받아 시아를 붙들고 있던 기사들이 듣다 못해서 시아의 입을 틀어막았을 정도였다.
그런 시아의 외침에 반응이라도 한 것인지, 시구르드가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더니 매몰찬 목소리로 주변 견습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 잊고 있었군요. 망령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명령을 내렸어야 했는데... 저 망령의 시신을 당장 태워 버리도록 하세요.”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가던 길을 걸어 나갔다. 망연자실한 시아의 뒤로 펜릴의 기사들이 ‘네! 명 받들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