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한 내용이 짧았던 만큼 리허설도 짧게 끝났다. 시구르드는 손수 이비에타에게 해야 할 일을 안내해 주며 리허설을 진행했고, 이비에타는 묵묵히 본분을 다했다.
리허설 중에 이비에타는 시구르드가 받게 될 부기사단장의 검을 받쳐 드는 시범을 따라 했다. 하얀 검신과 중앙에 은으로 초승달 무늬를 낸 검 자루. 검의 날에는 은으로 정교하게 나무덩굴을 형상화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검 자루의 끝에는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진 뾰족한 은덩이가 박혀 있어 유사시에 저걸로 적을 찍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칼베르크가 성립될 당시의 부기사단장의 검도 이런 모양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게도 부기사단장용 검의 모양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지되었나 보았다.
기사단장의 검도 그대로 유지되었을까? 성립 시기 칼베르크의 기사단장용 검은 철로 만들고 검 자루에 검 자루를 휘감는 끈 모양으로 금을 입힌, 그런 형태의 검이었다. 검 자루의 끝에는 묵직한 납덩이가 달려 있어, 검의 날이 전투 상황 중에 무뎌져서 쓰기 어려울 때 검의 날 대신 휘둘러 상대의 머리를 박살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전에 상자 안에 철저히 버려져 있었던 검과는 달리 의식용으로 만들어 진 검이기는 했다만, 그럼에도 실용적인 면이 들어가 있는 검이었다.
검을 거꾸로 들어 검 자루로 머리를 박살낸다는 검법은 입단 시험 때도 사용했던 방법인 만큼 이비에타가 좋아하는 실용적인 검법이지만, 당시의 기사들도 추하다며 쓰지 않은 방법인지라. 그런 용도로 디자인 된 검의 외형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을지는 살짝 의문이 들었다.
‘뭐, 어차피 기사단장 될 일도 없을 텐데.’
이비에타는 쓸데없는 생각을 관두기로 했다. 안 그래도 불과 며칠 동안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 탓에 머리가 복잡해져 있는 상황이었던지라, 이런 쪽에까지 생각이 미쳤다가는 머리가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얼마쯤의 시간이 지나 리허설이 끝나자마자 이비에타는 도망치듯 회랑을 빠져 나왔다. 시구르드가 이비에타를 향하여 무어라고 부르는 것 같았으나, 무시하고 바로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 나갔다.
단순히 함께 있기 싫어서, 그리고 리허설도 끝난 만큼 일단은 다시 물러서 거리를 유지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시구르드의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던지라, 마음을 조금이라도 추스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마 아까 검을 보며 쓸 데 없는 생각에 빠진 것도 마음이 제대로 추슬러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라. 이비에타는 제멋대로 판단하며 몸을 이끌고 정원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정원이란, 4개의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는 부분에 위치한 널찍한 공간이다. 대체로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만 여기저기 과일 나무를 심어 두고 관리하고 있기에 계절만 잘 타면 아름다운 꽃들을 감상하는 것도, 과일을 맛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 장소였다.
칼베르크가 성립할 때부터 있던 장소는 아니었지만, 바뀐 부분 중에서 가장 이비에타의 마음에 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전에 이 구역은 대충 평평한 돌이 깔린 돌바닥 광장일 뿐이었던지라, 안 그래도 거무튀튀한 돌들로 이루어진 칼베르크의 건물에 칙칙함을 더해 주는 장소였다. 그런 점이 개선되어 푸른 초목이 자라는 정원이 형성되었으니, 칼베르크에 싱그러움을 가득 불어 넣어주는 1등 공신이었다.
이비에타는 입단 시험일 때부터 이 장소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기에 언젠가 시간이 나면 꼭 들러서 산책을 하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 땐 이런 계기로 산책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다짐을 지킨 셈이 되긴 했다.
대충 시간 좀 때우다가 숙소로 돌아가서 심신에 안정을 주도록 하자. 꽃도 좀 보고 과일 구경도 하며 걸으며 시구르드에게 받은 정신적 데미지를 회복하고, 시구르드도 따돌리고... 이비에타는 그렇게 대충 생각을 정리하며 정원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밖에서 보며 추측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다만 예상보다 과일나무가 많고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길 양 옆으로 나무들이 찬찬히 다듬어져 있어 난잡하다거나 하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정교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이 정원을 위에서 바라본다면 더 예쁘겠어.’
어느새 이비에타는 정원에 대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과일나무마다 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고, 몇몇 나무들에는 빨간 과실도 달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떫은 맛이 입안을 채우는, 아직 덜 익은 게 보이는 파란 과일들도 종종 보였고... 파란 하늘에 어울리는 파란 나뭇잎, 그리고 군데군데를 장식한 빨갛고 노란 꽃들과 과일. 그리고 구불구불 굽이치는 돌길까지. 그들이 잔뜩 어우러진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래, 이렇게 마음도 추스르고 얼마나 좋아... 앞으로 자주 드나들어야겠어.’
아우우우-!
그러나 이비에타의 감상을 무참히 깨버리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익숙한 소리에 이비에타는 즉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소리가 난 곳에는 흰늑대(이름 흰둥이)가 줄에 묶인 채 자신을 향하여 꼬리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흰둥이는 혀를 내밀고 헥헥 대면서도 기쁜지 연신 꼬리를 흔들고 있었는데, 꼬리를 얼마나 세차게 흔드는지 꼬리가 부채처럼 보였다.
그 옆에서는 할도르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멋쩍게 웃으며 이비에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줄을 손에 잔뜩 그러쥔 채로. 아마 순식간에 달려들기라도 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허허, 안녕하십니까. 라르힐리덴 영애.”
할도르가 이비에타에게 말을 건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흰둥이는 할도르의 웃음을 감지하기라도 했는지 꼬리를 더욱 세게 흔든다. 부채 모양이 훨씬 선명해졌다.
“아, 네. 안녕하세요.”
물론 이비에타는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 치료하면서 정원의 아름다움에 감화되어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자를 또! 만났다. 할도르는 어째서 이비에타가 예상치 못하는 상황에 눈치코치 없이 찾아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물론 끔찍한 방향으로 말이다.
찾아오는 상황만 눈치가 없으면 다행인데, 하는 행동도 눈치코치가 없어서 더 문제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비에타 영애님, 리허설은 어떠셨습니까? 시구르드 님께서 얼마나 부끄러워하셨을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군요. 하하!”
“잘 처리되었습니다. 생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정원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답니까? 시구르드 님께서 이 정원을 보시자마자 너 ~ 무 마음에 들어 하셔서요. 일단 흰둥이 산책도 시키면서 살피고 있는 것이지요. 정원 어느 부분을 더 예쁘게 꾸미면 좋을까... 이런 것들 말입니다. 허허! 흰둥이도 너무 좋아하더군요. 그렇지? 흰둥아.”
“아우우우!”
알아들었는지 흰둥이가 목청껏 울부짖는다. 갑작스런 하울링 소리에 옆에서 떠들고 있던 기사 몇몇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후다닥 소리가 들린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흰둥이가 그 뒤를 꼬리를 흔들며 쫓아가려 하는 것을 할도르는 급히 줄을 잡고 말렸다.
“아이고, 이 녀석이 또 왜 이러는지! 흰둥아, 가만히 좀 있으렴. 시구르드 님과 이비에타 님이 함께 거니시기 딱 좋게 만들어야 하는데, 네가 말썽을 부리면 어떡하니!”
제발 당신이나 가만히 있어... 이비에타는 살기가 올라오는 것을 어떻게든 꾹꾹 눌러 참았다. 마음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정신 제대로 차리자고 이비에타는 가까스로 억제했다.
기분전환이나 하려고 정원에 왔는데, 시구르드가 이 정원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리를 들으니 도저히 오고 싶지가 않아졌다. 시구르드를 따돌리기 위해 왔는데, 이놈은 이미 정원을 어떻게 더 예쁘게 꾸밀지 조사 중이란 말이지... 밥맛이 절로 떨어지고, 정신적 데미지도 다시 고스란히 적립되어 버렸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시려고요?
“네, 볼 만큼 다 봤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이 정원 정말 아름다운데.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시는 겁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도르가 잘 익은 과일 하나를 집어들었다. 과일 주려고 저러는 건가? 이비에타는 궁금해 하며 할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할도르가 다른 손을 흰둥이의 뿔을 향해 뻗는 게 아닌가.
“조심해요!”
이비에타가 외치며 말릴 새도 없었다.
흰늑대의 뿔을 잘못 만졌다가는 손에 심한 동상을 입을 수 있다. 흰늑대의 뿔에서는 냉기를 만들어 내는 마나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방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웬만큼 마나로 손을 코팅해 두지 않는 한 흰늑대의 뿔을 잡아서는 안 되었다. 이비에타도 전생에 흰늑대의 뿔을 채취할 때는 마나를 꽁꽁 손에 둘러싸고 뿔을 뽑아냈었다.
그런 만큼 할도르의 행동은 너무나도 무모한 것이었다. 이비에타는 놀라 그의 손을 잡아채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할도르의 손은 이미 뿔에 닿아 있었다.
그런데 할도르의 손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할도르의 손을 향하여, 흰둥이의 뿔에서 푸르스름한 빛의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나를 받는 도중 할도르의 흰자가 잠시 검은 색으로 변형되었다가 다시 돌아 왔다.
얼마지 않아 할도르의 손에는 흰둥이의 마나가 손바닥을 뒤덮는 공 형태로 뭉쳐졌다. 푸르스름한 마나의 공에서는 보기만 해도 시려운 수준의 냉기가 흘러넘치고 있었으나, 할도르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제 이 안에 과일을 넣으면... 자, 됐습니다! 꽁꽁 언 시원한 과일 완성!”
할도르는 웃으며 꽁꽁 언 과일을 이비에타에게 넘겨주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한 겁니까?”
“후후, 이건 원래는 비밀이지만 영애께만 특별히 알려 드리는 거랍니다. 시구르드 님과 이비에타 님, 그리고 흰둥이만 아는 비밀이 될 것 같군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할도르 씨의 몸에서는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마나를 조정한 겁니까?”
“그런 것까지 알아보시다니, 역시 시구르드 님의 눈은 정확하셔요. 역시 부부는 닮는다더니, 영애에게 푹 빠진 이유가 있었군요!”
헛소리는 무시하고 이비에타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눈 색이 바뀐 건 뭐죠? 그런 능력은 점쟁이에게서도 본 적이 없는데... 신관 같은 건가요?”
“아니요, 신관 같은 거면 비밀일 리가 없죠. 전 망령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