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르드는 거의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이비에타에게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앉아있던 몸을 순식간에 일으켜 이비에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당황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비에타가 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수정하려 드는 그의 태도에 이비에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시구르드의 표정이 지독히도 씁쓸하고 괴로워 보였기에 이비에타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조차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당황스럽습니다!”
이비에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정신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다 비열한 연기다. 이 자식이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행복을 빼앗은 채 행복하게 죽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렇게 순진한 순정남이라도 되는 양 행세하지만 시아의 어머니를 죽인 극악무도한 자라는 것을 잊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구르드의 슬픈 표정에 아주 잠깐 흔들린 이비에타였다. 전생 때도 미련이 남아서 검을 정면으로 느릿느릿하게 찔러 넣었던 그녀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가 자신의 검을 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와서는 모든 미련을 다 털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이리 미련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놈의 미련은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와중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부기사단장님, 제가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이제 서임식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비에타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금 자신의 얼굴 상태가 어떨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이비에타는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비에타는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시구르드 님! 내친 김에 흰둥이 산책이나 시키고 와도 되겠습니까?”
어느 때보다도 어색해진 상황을 또 다시 살려 놓은 것은 다름 아닌 할도르의 목소리였다. 할도르의 옆에서는 늑대가 이비에타를 향해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헥헥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
시구르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풀썩 자리에 주저앉는다. 몸이 무겁게 무너져 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의자에 푹-하고 빠져 버렸다.
“네, 시구르드님.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홧팅!”
주먹을 꽉 쥐고 흔들며 응원하는 할도르였다. 어쩜 수행원이라는 작자가 저렇게 눈치가 없냐 싶을 정도다. 시구르드가 찡그리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까지 쉬면서 바라보는데도 눈치를 못 챈 것 같았다.
오히려 흰둥이가 시구르드의 기분을 눈치 챈 건지 서둘러 할도르가 잡고 있는 목줄을 입으로 잡아당기며 나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으릉 소리까지 내면서. 할도르는 ‘알았어, 알았어. 우쭈쭈!’하며 흰둥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러 나가 버렸다.
흰늑대가 똑똑하다는 건 전생 때 토벌해 보면서 느꼈다만, 길들인 녀석도 저 정도라니 인간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비에타는 할도르가 나가고 나서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어휴 소리를 냈다.
그래도 어색한 상황이 조금이나마 풀어져 고민을 할 시간을 갖게 된 것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흰늑대를 끌고 갑작스레 들어닥친 할도르의 눈치 없음이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그 어색한 상황이 이어지고, 자신의 사고 회로도 계속 정지해 있었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이 났을 때, 최대한 냉정해지자고 생각하는 이비에타였다.
우선 돌직구로 질문을 던진 목적이었던 ‘시구르드는 이비에타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라는 것에 대한 해답. 정말 이상하게도 질문에 대한 답도 그렇고, 시구르드는 이비에타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게 흥분하며 열변을 토할 수 있을까. 연기라고 친다면 배우로 전직해야 할 정도로 그는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만 그 내용은 이비에타가 생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구르드 자식은 왜 전생 때의 나에 대해서 모욕하지 말라고 발광을 떤 걸까.’
그렇게 능멸하며 죽여 놓고 저럴 수 있다니 참으로 웃긴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연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던 그 열변 속에 왜 그딴 예상도 못한 말이 튀어나온 건지. 도저히 앞뒤가 들어맞지를 않는다.
그렇다고 시구르드가 전생의 기억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완전히 억측이었다. 저렇게 흥분하며 지가 잘 안다는 듯이 떠들어 댄 데다 전생의 기억이 없는데 자신을 이렇게 추격해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정리되는 의문은 세 가지였다. 첫째, 왜 시구르드는 이비에타가 전생의 기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정작 시구르드 자신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데 말이다. 둘째, 자기가 사람 인생 망쳐 놓았던 주제에 왜 이비에 대한 모욕을 하면 안 된다고 울부짖는가? 셋째, 전생 때처럼 순진한 짓거리 반복하는 놈이 왜 시아 어머니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는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니, 사실 시구르드가 이비에타가 전생의 기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는 명제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안심하게 하려는 의도로 저런 메소드 연기를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까지의 자신의 노력은 모조리 시구르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꼴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짧디 짧은 순간에 내린 모든 결론들과 의문점들이 무의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사고의 회로가 꼬이다 못해 맛이 가 버릴 것만 같다.
‘그래, 그렇다면 서임식 때 함께하면서 시구르드 녀석의 의중을 어떻게든 떠 보고 파악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겠지.’
결국 이비에타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상적인 결론은 이것뿐이었다. 발버둥치기로 작정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파악하려는 노력을 하는 게 정상일 테니까.
이비에타는 마음만 같아서는 시구르드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가득 차 있는 것인지 머리를 쪼개서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니, 결국 부딪히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 이비에타의 판단이었다.
다만 서임식 준비 과정에서 최대한 시구르드가 어떤 사악한 생각을 품고 있는지,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을 최대한 불식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시구르드가 일부러 이비에타를 혼란케 해서 자기 옆에 이비이타를 두려고 저러는 것이라면... 또 다시 놀아난 꼴이 된다. 상상도 하기 싫었다.
“미안합니다. 자제력을 잃고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뇨, 오히려 제가 실언을 한 거죠. 죄송합니다. 부기사단장님.”
진정됐다는 양 이야기하고는 있다만 아직도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시구르드는 찻잔에 들어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자기 자신을 진정시킨다.
“혹시, 아,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대는 절 싫어하십니까?”
“...”
이 개자식이 뭐라 지껄이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싫어하지 않겠나 싶다.
“구혼서를 보내고 찾아뵙고 싶었는데, 칼베르크로 떠나 버리셔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전 검을 들고 싶었습니다. 결혼에 구애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칼베르크로 온 것입니다.”
이비에타는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조가 얼마나 딱딱한지 건드리면 똑똑 떨어질 것만 같다.
“구혼서를 보내긴 했지만 바로 결혼을 진행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정식으로 만나 뵙고, 천천히 친교를 쌓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습니다. 무례를 끼친 점 사과드립니다.”
“왜 부기사단장님은 저를 그렇게까지 쫓아오시는 겁니까? 전 그저 망한 가문 여식일 뿐이고, 평판도 나쁜데요.”
“그 이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당장은요... 하지만 그대와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고, 그 운명을 잇고자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 왔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운명으로 이어져 있지... 그것도 아주 끔찍한 운명!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다가 진짜로 죽으셨고 말이야.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 하지 않겠어? 당장은 말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영원히 말 못할 일인 거겠지...
이비에타는 시구르드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른다. 이쯤 되니 정말 자기가 전생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라면 저렇게 뻔뻔하게,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부아가 치민다. 일단은 어떻게든 고개도 푹 숙이며 표정관리 중이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일단 함께 있으며, 최대한 그의 동정을 살피고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이비에타 자신이 더 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예언이 말한 빌어먹을 운명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의 고통은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예언을 받던 날, 불꽃이 검은 기운에 휩쓸려 삼켜지던 것을 이비에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절대 그런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 이비에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노력했다.
“부기사단장님, 저를 부르신 목적은 서임식을 준비하시기 위함이 아니셨습니까? 저는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대련해야 하는데, 지금 너무 많은 시간을 다른 이야기에 쏟아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례하게 들리실지도 모르시겠지만 선처해 주십시오.”
일단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끝내고 서임식을 준비하며 생각할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비에타는 시구르드에게 다시 한 번 서임식에 대하여 일깨워 주며 화제를 돌린다.
아까도 이랬건만, 도대체 몇 번을 서임식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는지. 이비에타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