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이비에타에게 구혼서를 보낸 가문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펜릴 가라는 굉장한 가문의 사람과 딸을 혼인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자기들의 기사단도 있고, 레가르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공작가가 펜릴 가다. 레가르드의 북방을 지배하는 최고의 귀족 가문. 거기다 공신으로서의 위엄도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가문이기도 하다.
그런 가문의 자제가 망해 버린 백작가의 망나니 여식에게 혼인을 청한다니. 당연히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받아들였겠지.
결국 어떻게든 시구르드와 만나게 되어 있었던 거다. 기사단에서 탈출하든 아니면 기사단에 남든지 간에, 이비에타는 시구르드와 만나는 운명이었다. 자신이 칼베르크를 선택할 것이란 건 어떻게 또 예측을 했는지. 완전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꼴이지 않은가.
“이비에타 양께 구혼을 하고 싶다 하셨을 때 얼마나 가문의 반대가 심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구르드 님께서 어찌나 열성적으로 밀고 나가셨는지 결국에는 공작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셨지요. 하하. 이비에타 양께서 왜 구혼을 마다하고 칼베르크로 가신 것인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칼베르크에서 다시 만나게 되셨으니 그야말로 운명의 짝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즐겁게 떠들며 웃는 할도르와는 딴판으로, 저 조잘거리는 모가지를 돌려놓고 싶다는 기분을 간신히 억누르는 이비에타였다. 특히 저 ‘운명의 짝’운운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수행원이야 이비에타와 시구르드 간의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저렇게 즐겁게 조잘대는 거겠지만 어쨌든 야속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시구르드 자식도 아주 정성이네, 정성이야. 젠장.’
자살을 하면 시구르드에게 엿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릇된 생각이 들 정도로 이비에타의 정신 상태는 심히 망가지고 있었다. 예언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머리를 굴렸는데, 알지도 못하는 사이 운명대로 끌려가고 있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구르드의 손바닥 위였다.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이 끔찍하고 나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보았자 계속 놀아나기밖에 더하겠는가.
서임식에 참여하겠다고 마음을 굳혔던 게 방금 전이다. 지금 끔찍한 사실을 알아버렸고, 그 때문에 좌절감에 빠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했다가는 끝까지 농락이나 당하다 끝나겠지. 발버둥 친 결과가 결국 운명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꼴이 날지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은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다.
이비에타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매질하며 간신히 무너져가는 마음을 붙잡는다.
그 상태로 할도르의 뒤를 따라서 계속 걷고 또 걷는 것만 반복했다. 할도르가 계속 뭐라고 지껄이는데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지만. 이비에타는 시구르드와 대면할 것을 생각하며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지만 어떻게든 참아 내며 할도르를 따라갔다.
건물의 1층인 정식 기사 대련장으로 들어가니 기사들이 한갓지게 칼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챙, 챙.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칼을 맞부딪치며 시시덕댄다. 이비에타는 그 꼴을 잠시 지켜보다가 할도르의 안내에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밟았다.
꼬불꼬불 나선형으로 꼬여 있는 돌계단. 400년 전에도 이 돌계단을 밟았었다. 물론 그 때는 견습 기사로서가 아니라, 기사단장의 자격으로 밟았었다.
전생 때 자신이 죽음을 맞았던 날에도 이 돌계단을 밟고 기사단장실로 향했었다. 그 때에도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면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을 받았었다. 결국 기사단장실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간 것만 같이 온몸이 무거워진 상태로, 의자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죽음을 맞았었다.
지금이 딱 그런 느낌이다. 돌계단을 올라가는데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굳게 먹기는 했다만, 시구르드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다는 충격이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비에타는 할도르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저벅저벅.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결국 부기사단장실 바로 앞에 도착했다. 이비에타는 숨을 크게 들이 내쉰다.
“라르힐리덴 영애께서 긴장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시구르드 님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너그럽고 순하신 분이시라 긴장하실 필요가 하등 없답니다. 오히려 시구르드 님께서 부끄럼 타실까 봐 오히려 걱정이네요.”
이놈은 주둥아리를 좀 닥쳤으면 좋겠다. 이비에타는 안 그래도 긴장한 몸이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느꼈다. 할도르 놈은 그런 심정을 신경도 안 쓰는지, 아니면 놀려 먹기라도 하고 싶은지 나불거리는 것을 계속 해 댄다.
“시구르드 님께서는 라르힐리덴 영애와 만나는 것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여자라고는 관심도 없으시던 분이 라르힐리덴 영애께 그렇게 열렬히 구혼을 하시다니 가문의 어른들부터 해서 모두들 깜짝 놀랐지요. 무슨 인연의 끈이라도 맺어져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니까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실 거라고 제가 자신합니다. 하하하!”
죽여 버리고 싶다... 이비에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까 봐 일부러 할도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부기사단장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그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간 부기사단장실에는, 주인이 바뀐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엉망으로 쌓여 있는 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벽에는 거의 열 개 가까이 되는 크기가 각각 다른 검들이 어지러이 걸려 있다. 커다란 방의 한가운데에 질 좋은 나무로 깎아 만든 우아하면서도 튼튼해 보이는 초콜릿색 책상과, 사슴 가죽으로 추정되는 가죽이 걸려 있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에 앉아 있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구르드였다.
이비에타는 긴장한 표정으로 시구르드가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고동을 쳐 댄다. 몸이 떨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안한 모습으로 시구르드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얼마 안 가 시구르드와 대화까지 하게 될 것이다. 이비에타는 땀이 흘러내리는 것까지 느낄 정도로 완전히 긴장한 상태였다.
그 때였다.
할짝-. 무언가가 이비에타의 손을 핥는다. 이비에타는 소스라치게 놀라 악 소리도 내지 못한 채 황급히 손을 떼고, 자신의 손을 핥은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커다란 흰늑대 한 마리였다. 아까 보았던 그 늑대인 것 같다.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늑대가 이비에타의 손을 핥았다가 이비에타가 손을 떼자 약간 실망한 표정이 되어 살짝 물러났다.
그러더니 다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이비에타에게 다가와 다시 손을 핥으려 한다. 이비에타는 당황해서 늑대를 떼어 놓으려 했는데, 싫어한다는 뜻을 내비치는 행동을 하자 슬픈 눈이 되어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슬픈 눈이 되어 있었다.
“아아, 그러지 마...”
이비에타는 당황해서 결국 손을 내밀어 주고 말았다. 이비에타가 행동을 바꾸자마자 늑대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가가 할짝할짝 손을 핥아 댔다. 간지러움이 손바닥 전체로 퍼지는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이비에타는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그 놈과 맞부딪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주었으니, 늑대가 약간은 고맙기도 했다.
이비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으며 늑대의 머리 부분을 쓰다듬어 주었다. 털이 아주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웠다. 다만 뿔에서는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어서 뿔 부분은 피해 가며 손으로 문질러 주었다.
늑대는 기분이 좋아져서 헥헥 소리까지 내더니... 이비에타의 얼굴을 향해 주둥이를 내민다. 마치 얼굴에 뽀뽀하고 싶다는 것처럼 두 다리로 서서 이비에타에게 자기 주둥이를 정면으로 발사하는 늑대였다. 그 서슬에 뿔이 머리카락을 살짝 스쳐 지나가 이비에타는 깜짝 놀라며 얼굴을 피했다.
짝-.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온 박수소리. 이비에타도, 늑대도 놀라 박수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시구르드가 의자에 앉아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할도르가 와서 늑대를 끌어낸다. 늑대가 낑낑거리며 이비에타에게 다시 슬픈 눈빛을 보냈지만, 할도르가 끌고 가니 별 수가 있나. 결국 끙끙거리다 나중에는 우우우 울부짖으며 끌려 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어색한 상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저...”
결국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이비에타가 시구르드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왠지 반색하며 좋아하는 시구르드였다. 마치 말을 먼저 걸어주기를 바랬다는 눈치다. 방금 전에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건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
“닦을 거 있나요? 손 좀 씻고 싶어서요.”
시구르드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약간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할도르가 늑대를 끌고 나가버렸기에 수건을 가져오라 시킬 수 없어서였는지, 서랍을 열어 손수건 하나를 끄집어낸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손수건이었다. 금실로 수놓인 부드러운 손수건. 그것도 펜릴 가의 문장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아무리 봐도 동방에서 짠 직조물로 만든 귀한 물건이 틀림없었다.
“...이런 걸 개 침 닦으라고 주시다니 시구르드 님네 집안도 대단하시네요.”
이비에타는 비꼬듯이 말하며 손수건을 받아 든다. 그리고 손을 슥슥 닦아 내렸다.
“그 손수건이 마음에 든다면 가져도 좋습니다... 라르힐리덴 영애.”
시구르드는 이비에타가 손을 닦는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자마자 손수건이 꼴도 보기 싫어진 이비에타였다.
“아니요, 귀하신 분의 손수건을 견습 기사가 가져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무례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딱 부러지게 하며 바로 손수건을 건네준다. 시구르드는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잠시 가만히 이비에타를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어 이비에타를 화나게 만들었다.
‘뭐 하는 거야, 저건.’
짜증이 치민다. 멍청한 척 연기라도 하는 건지. 마음 같아서는 검을 뽑아들고 싶다만 이비에타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다.
“라르힐리덴 영애, 늑대가 갑자기 덤빈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직 어린 늑대라...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괜찮습니다. 별로 무례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즐거웠는걸요.”
“앞으로 늑대가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흰늑대를 가축화시켰다고 들었는데, 그게 시구르드 님이신가 보죠? 대단하시네요.”
시덥지 않은 대화가 오간다. 그 와중에 시구르드 녀석은 계속해서 자기 손가락을 만지작대고 고개를 숙였다 말았다 하고 있다. 마치 부끄럽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심지어 중간에 얼굴이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빨개지기까지 했다! 이비에타는 엄청난 혼란을 느꼈다.
‘뭐야? 이거... 내가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저딴 행동 못 하지 않나?’
가족을 죽여 놓고 면전에다 저딴 행동을 할 수 있다니. 이비에타는 기가 찼다. 기가 차다 못해 분노가 점점 끓어오른다.
마치 전생 때 처음 만났을 때 시구르드가 보여 주었던 그 반응들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강아지 새끼마냥 이비에타만 바라보며 이비에타의 반응 하나하나를 신경 쓰고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그 때의 모습이 떠오르게 한다.
‘이 자식 설마, 내가 전생 때의 기억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인 것 같다만... 그렇지 않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다. 농락하기 위해 모든 세트장을 다 마련해 놓은 놈이, 저런 짓을 반복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머리가 있다면 과거 때 통했던 방식을 현재 와서 그대로 쓸 리가 없다. 오히려 자극만 할 텐데.
어쩌면 저 가설이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 통에 이비에타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서 있자, 시구르드는 이비에타에게 혹시 자기가 실언이라도 해서 기분이 상했냐며 거듭 양해를 구했다.
자기가 다 일을 꾸며 놓고 막상 만나니까 옛날에 자신과 사귀려 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정말로 자신이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이비에타는 계속되는 혼란에 지칠 대로 지쳐가고만 있었다.
‘그래, 그럼 차라리 돌직구를 날려서 확인하는 거야.’
생각하는 것도 지쳐버린 이비에타는 그냥 돌직구를 날려서 반응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냥 머리 안 쓰고 그러는 편이 낫겠다 싶어진 것이었다.
가설 확인을 위하여 이비에타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아, 부기사단장님. 라르힐리덴 가의 선조께서는 당시 펜릴 가의 영웅이셨던 ‘시구르드 글레이프니르 펜릴’ 님을 찔러 죽인 죄를 범하셨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제게 관심을 가져 주시다니... 죄인의 후손으로서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입에서 튀어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만한 질문을 하는 이비에타였다. 솔직히 ‘당신 내가 기억 가지고 있는 거 알아요?’라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니, 대신 둘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민감하디 민감한 부분을 찌르는 질문을 해 버렸다.
이 질문에 대해 뭔가 숨기는 행세를 한다면 시구르드는 이비에타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가능성이 높다. 전생을 알고 있다는 것을 시구르드도 지각하고 있다면 어차피 둘 사이에 다 아는 이야긴데 뭘 숨기려 들겠는가.
다만 확실한 판단을 주는 방식은 아니다. 나름 돌직구라고 던진 거긴 하지만... 확실하게 증명하기는 어렵다. 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해서 또다시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그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이비에타 또한 기억을 가진 채 환생을 했다고 믿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텐데... 란 생각도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이비에타는 시구르드를 보자마자 그 또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유추했는데, 시구르드가 이비에타가 기억이 없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시구르드가 이비에타의 질문을 듣자마자 행한 당황스러운 행동 탓에 더욱 혼란스럽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라르힐리덴 영애, 그런 말을 하시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선조를 어떻게 욕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비 게르헨 라르힐리덴 백작은 그런 모욕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그대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구르드의 목소리가 절절히 떨리고 있었다. 그것도 지독할 정도로 슬픈 눈을 한 채로, 이비에타를 바라보며 말을 토해 낸다. 이비에타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