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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이비에타-여기사의 두 번째 선택
작가 : 홍단
작품등록일 : 2017.7.9

"당신은 목숨을 걸 만한 남자를 만나, 죽음 같은 사랑을 할 것이다."

400년 전 전란의 시대 나라를 구했던 여기사 이비. 그러나 어렸을 때 들은 예언의 영향인지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이비에타'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로 환생하게 되어 새 삶을 살고자 하나, 전생과 똑같은 내용의 예언이 또 다시 자신을 옭아맨다.

예언을 피하기 위해 400년 전의 자신이 세운 기사단으로 도피하지만, 기사단은 부패로 몰락해 있어 이비에타를 짜증나게 만들고, 이 와중에 전생의 연인의 환생과 만나게까지 되는데. 이비에타는 예언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을까?

 
16화
작성일 : 17-07-29 13:16     조회 : 348     추천 : 0     분량 : 4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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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

 

  당황한 목소리다.

 

  “왜요. 결투 신청하시기 전에 한 번 생각할 기회를 드리는 건데.”

 

  이비에타는 이제 팔짱까지 낀 채 그를 바라보고 있다.

 

  결국 그 견습 기사가 이비에타의 기세에 눌려 뒤를 보았을 때 그는 ‘으억’하고 신음을 흘릴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아무도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자기가 끌고 왔던 패거리들 중 아무도 자기 뒤에 서 있는 자가 없었고, 그저 시아가 혀를 쏙 뺀 채 소리 없이 웃으며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 이 녀석들, 다 어디로 갔어?”

 

  “제가 결투 신청 하겠다고 했더니 다 도망가던데요? 제가 이비에타 양이나 발뭉 씨보다는 못해도 님들보단 성적이 좋아서요.”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그에게 시아는 한껏 비꼬아준다.

 

  “그래서 배려해 드린 거였는데, 뭐 원하신다면 지금 결투 하시려나요?”

 

  그리고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이비에타의 말. 역시 비웃는 어조다.

 

  “으, 으... 너희, 비겁하게...”

 

  이내 하얗게 질려서는 이비에타 쪽을 봤다가, 시아 쪽을 봤다가, 발뭉 쪽을 잠시 보았다가 한다. 뒤에 있던 놈들도 다 도망갔으니 이제는 완전히 묘한 기류가 형성되어버리고 말았다.

 

  “라르힐리덴 영애, 저 때문에 괜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 묘한 기류를 깬 것은 다름 아닌 발뭉이었다. 아까까지 잠자코 있던 그가 처음으로 말을 한 것이었기에, 이비에타는 발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에 자작 아들 녀석은 도망을 쳐 버린다.

 

  “아, 발뭉 씨.”

 

  자신이 구해주는 상황이 불편했으려나 싶기도 해서 이비에타는 말을 멈추었다. 정당한 방법이기는 했으나 결국 정식 기사로 승급하지 못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 자인데, 그런 자가 도와주는 상황이 되었으니 불편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비에타의 걱정과 달리 발뭉이 한 말은 ‘감사하다’라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라르힐리덴 영애. 덕분에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났네요.”

 

  그러나 뭔가 씁쓸한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저번에 너무 세게 때려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당연한 건데요. 만약 제가 이겼다면 영애께서는 기사단에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당연한 일입니다. 저도 기사단 입단 시험 때 상대를 날려 버렸는걸요.”

 

  “...제가 엿들은 거 같아 보여서 죄송합니다만, 약 때문에 문제가 있으신 거 같던데...”

 

  “...”

 

  “저 녀석들도 그걸 가지고 발뭉 씨를 괴롭히는 거 같아서요. 그러니 약 이름을 말해 주시면 제가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이비에타는 방금 전에 놈들이 떠들었던 것을 떠올린다. 귀한 약이 필요한데 그걸 가져다줄 수 있는 건 귀족에 한정되는 게 분명해 보인다. 남작가 녀석이 그딴 소리를 지껄여댔으니까.

 

  그러니 자신이 그 약을 찾아 갚아만 준다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 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끝까지 빌미를 잡힐 테지만, 약 문제만 해결되어도 정식 결투를 통해 부당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터다.

 

  그같이 뛰어난 기사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능력 없는 자들에게 하대를 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었거니와, 어쨌든 자기 때문에 약 문제가 꼬인 건 맞으니 이렇게라도 해결을 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듣자하니 제가 발목을 잡는 거 같은데, 그런 민폐는 끼치기 싫어서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대로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약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예언 탓에 남자라는 게 조금 걸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시구르드의 단서가 있는 이상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다. 사귈 생각도 전혀 없기도 하고 말이다. 거기다 기사단에 있는 이상 결혼 신청한 어느 정신 나간 가문에게서도 안전할 테니 이런 쪽에 굳이 머리를 쓸 건 없어 보인다.

 

  “좀 무례할 수도 있겠지만... 제게 왜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푸시는 겁니까? 전 겨우 평민 출신 기사일 뿐인데...”

 

  “칼베르크에 들어와서 이상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기사라고도 볼 수 없는, 긍지 따위는 개나 준 사람들 뿐. 그런 칼베르크에서 처음으로 절 존중해 주셨는데, 저 귀족 나부랭이들보다 훨씬 기사다우시다고 생각합니다. 기사란 건 결국 강한 힘으로 힘이 부족한 이를 지키는 자들인데, 누군가를 하대할 줄이나 아는 자들이 무슨 기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비에타는 발뭉에게 자신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피력한다.

 

  “저도 이비에타 양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전 발뭉 씨보다도 약한데, 제가 결투 신청하니까 다들 도망이나 가 버리고.”

 

  어느새 시아가 이비에타 곁에 서서 지지배배 지저귀듯 말을 이었다.

 

  “아뇨. 저도 라르힐리덴 영애를 처음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하대할 뻔했습니다. 겨우 소녀를 상대하라고 한다고, 기사단장에게 화를 내기까지 했는걸요.”

 

  “하지만 행동으로 이어지시지는 않으셨지 않나요? 그렇게 치면 저도 처음에는 칼베르크 기사 수준을 보며 하대할 뻔했거든요.”

 

  그렇게 점심을 먹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셋은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었다.

 

  “제 가문이 망해버리기는 했지만 일전에 연을 좀 맺어 놨던 분이 한 분 있어서요. 만나기가 좀 어려워서 시간이 살짝 걸리겠지만, 그 사람이라면 웬만한 희귀한 약재들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저거 봐! 무슨 일이지?”

 

  갑작스레 대화를 끊는 우글우글한 소음에 이비에타는 소음이 난 쪽을 돌아보았다. 어린아이들이 잡상인이 신기한 물건을 들고 오면 창문 밖에 매달려 구경하듯이 칼베르크의 식당 안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견습 기사들뿐만이 아니라 정식 기사들까지도 식당에 난 창문을 통해 머리나 상체를 들이밀고 구경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무슨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기에 다들 갑자기 식사도 하다 말고 저렇게 고개를 쏙쏙 들이밀며 소란을 떠는 건지, 이비에타 뿐만 아니라 대화하고 있던 시아와 발뭉도 궁금증을 느꼈다.

 

  “저게 뭐야? 누가 온 거야?”

 

  “이번에 부기사단장이 새로 부임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거 아냐?”

 

  “야, 부기사단장 해임된 지가 언젠데... 해임 서류 잉크도 안 말랐겠다. 벌써 온다는 게 말이 되냐.”

 

  “하긴, 저렇게 간소하게 올 리가 없지. 마차도 기껏해야 두 대밖에 없고.”

 

  “청탁 넣으려고 와도 저렇게 간소하게는 안 오겠다.”

 

  “근데 저 마차에 문장도 안 써 있네. 어느 가문이지?”

 

  “수행원 몇 명 태우면 끝이겠는데...”

 

  바깥에 아무래도 누군가 온 모양이었다. 그것도 기사단의 기사들도 모르는 누군가가, 간소하게 수행원을 거느리고 기사단을 찾은 듯하다.

 

  ‘뭐야, 시덥잖은 일로 대화나 끊겼군.’

 

  이비에타는 속으로 살짝 구시렁대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려 했다. 그런데 시아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 자리를 박차고 창문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지금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레 안색이 바뀌어 뛰어나간 시아의 서슬에 발뭉도 조금은 놀랐는지 시아에게 소리를 쳐 보지만, 시아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창밖을 보는 시아의 옆모습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리고 그 순간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

 

  “와! 저거 뭐야?”

 

  “하얀 게 뿔까지 달렸어! 늑대같이 생겼는데...”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이비에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창문 쪽으로 뛰어나간다. 발뭉은 대화하던 둘이 갑자기 튀어나가니 적잖이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미안한 일이지만 이비에타는 발뭉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설마, 설마!’

 

  마음속으로 ‘설마’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외치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이비에타였다. 기사들 몇을 비집고 들어가느라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따위의 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이비에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온통 까만색으로 칠해지다 못해 바퀴살과 말까지도 까만색 천지인 두 대의 마차가 칼베르크의 회관 건물 앞에 우뚝 세워져 있었다. 마부가 짐을 분주히 내리고 있는 가운데 흰늑대 한 마리가 마차 주면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검은색 마차와는 너무나도 대조되는 이질적인 색조를 띠고 있었다.

 

  흰늑대는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커다란 외뿔이 박힌 머리를 치켜들며 이리저리 킁킁거리다가 마차 중 첫 번째 것의 문에 뺨 부분을 부빈다. 그렇게 잠시 부비고 나서 다시 여기저기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내려왔다.

 

  흰늑대를 연상시키는 하얀 피부와 회색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청년이었다. 오랜 기간을 달려 왔는지 조금 지친 기색이 없지 않았으나, 귀족다운 기품은 잃지 않고 있었다.

 

  그 남자는 칼베르크의 옷이 아닌 회색빛 기사복에 검은 망토를 걸쳤는데, 아무렇게나 걸친 검은 망토에는 늑대를 형상화한 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하지만 이비에타가 눈을 떼지 못하게 한 것은 그 청년의 머리카락에 있었다.

 

  청년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밤하늘에서 별을 다 뽑아 던져버린 것만 같은 그런 새까만 검은색. 전생으로부터 400년가량이 지난 레가르드에서는 사실상 볼 수 없는 머리카락 색깔이, 이비에타가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시구르드와 너무나도 닮은 청년이었다 - 아니, 시구르드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청년이, 마차에서 걸어 나와 칼베르크의 회당으로 들어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측하지 못한 일이 하나 터지고 말았다. 청년이 불현 듯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들어 건물 쪽을 바라본 것이었다. 그것도 이비에타가 밖을 살펴보던 창문이 있는 쪽을 향하여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비에타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짙은 회색의, 신화 속의 늑대를 연상시키던 바로 그 눈. 자신의 가족들을 죽이고 딸마저도 죽이려 하던 그 차가운 눈을.

 

 이비에타는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라르힐리덴 영애! 괜찮으십니까?”

 

  발뭉이 이비에타가 주저앉는 것을 봤는지 황급히 달려와 일으켜 준다. 그러나 빠진 힘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다.

 

  ‘도망치려고 온 건데, 빌어먹을 예언 따위에게서,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그런데 왜!’

 

  이비에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한다. 속으로 소리 없는 절규를 외친다. 그러나 모조리 소용없는 일이었다.

 

  전생 때부터 따라붙은 예언은 환생을 하고 나서까지 질기도록 따라 붙고 있었다. 이비에타가 도망치려 하든,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남은 것이라고는 끝없는 무력감과 절망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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