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리는 새 이름을 받았다. ‘진 여녹’이라는 이름이었다.
“흔치 않은 이름이네요.”
다은은 시현의 카페에 와 있었다. 보리가 시현에게 돌아간 게 일주일 전.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다.
“옛날부터 생각해 둔 이름이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시현이 찻잔 테두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다은은 카페를 날아다니는 보리를 보며 입 안에서 이름을 되뇌었다. 진여녹, 진여녹.
예쁘긴 한데. 옛날부터 생각해뒀다고? 그러고 보니 불사조가 왜 도깨비에게 있지?
“혹시 아빠에요?”
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미간이 좁혀진 걸 보니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내젓더니 이어 다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빠라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런 질문을 해요?”
멀리서 경환이 이쪽으로 몸을 튼 게 보였다.
“아니, 뭐. 그냥. 그런 질문도 못해요?”
다은의 눈이 부산스레 돌아다녔다. 좀 더 신중할 걸. 맨날 저지르고 후회한다.
“다은 씨 좀 ...경솔하시네요.”
포크를 집으려던 손이 멈췄다. 갑작스런 비판에 눈이 커졌다. 이렇게 직접 불만을 들을 정도로 불쾌한 질문이었나?
하지만 마냥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그녀의 성격이었다.
“시현 씨는 되게 직설적이네요.”
“다은 씨가 직접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사람이니까요.”
시현이 다은의 성격을 꼬집었다.
“부모란 분을 뵌 적이 없고, 종족이 다른 이가 갓 태어난 아이를 맡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요. 굳이 캐묻지 않는 것도 상대를 배려하는 예의랍니다.”
그는 사고뭉치 남자아이를 타이르는 선생님처럼 부드러운 말투와 매서운 눈으로 다은을 대했다. 다은은 갑자기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고 여자아이를 괴롭힌 못돼 먹은 남자애가 된 기분이었다.
“그, 그건. 그렇죠.”
분해라.
“그래도 저도 일단 보리, 아니 여녹이를 돌보는 사람 중 하나잖아요.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다은이 항변했다. 어찌됐든 자신도 여녹이가 잘 크도록 양육에 참여하는 사람이었다.
“글쎄요...”
시현이 의문을 표했다. 그가 보기에 다은은 아직도 여녹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고四考할 줄 아는 지적 생명체로 보는 게 아니라 본능만 있는 동물로 여기고 있다.
첫 만남이 그런 식이었으니 이해가 가다가도, 계속 이런 식이면 오히려 여녹이에게 안 좋은 영향만 갈 것이다.
어제 제가 본 상황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시현이 예약 손님의 일을 해결한 후 여녹이를 위해 꾸며놓은 방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간식 먹고 싶어? 응, 그래그래. 누나가 좋아?”
여녹이 작게 지저귀며 러그 위에서 총총거리며 뛰어놀고 있었다. 다은이 간식을 들고 이리저리 유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아...”
시현이 그 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할지 모르겠다.
“여녹이는 요괴에요. 다은씨. 그걸 제발 잊지 마세요.”
시현이 말끝을 늘이며 강조했다.
“나도 알아요. 불사조잖아요.”
다은은 알고 있는 사실을 자꾸 이야기하는 시현이 이해가지 않았다. 어제부터 계속 저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하고 있었다.
“다은씨가 아직도 여녹이를 애완새처럼 대하니까 하는 말이에요.”
그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다. 그럼 갑자기 어떻게 대하라는 건가. 내게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서 혼자 실망하고 혼자 결론짓네.
“내게 어떤 식으로 하라고 알려준 적이나 있어요?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건 상...”
그 순간 시현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붙잡았다. 상식. 상식이라.
시현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눈치 챈 듯 다은의 억울한 마음이 터져 나왔다.
“난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당신들이 알려준 아주 조그만 사실 밖에 모른다고요. 이 세상이 낯선 건 여녹이 뿐만이 아니에요. 나는 어쩌면 여녹이보다도 더 몰라요. 그 애는 요괴로서의 본능이라도 있겠죠. 난 아니에요. 나도 갓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녀의 토로는 벌어진 상처 사이로 터져 나오는 핏방울 같았다.
말이 끝나고 경환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상식을 거론하고 싶으면 내게 요괴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기나 해요.”
시현에게 쏘아붙인 다은이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쑤셨다. 생크림을 올린 당근 케이크가 사정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게 시현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다은은 부서진 케이크를 계속 찔러댔다. 빵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시현이 묵묵히 그 모양새를 지켜봤다. 케이크는 산산조각 나 접시 아래를 뒹굴었다. 생크림도 참극을 피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사람을 대하는 건 항상 힘든 일이네.
시현은 당근 케이크를 끝내버린 다은의 손이 레몬커드케이크로 향하는 걸 막았다. 시현이 다은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좋아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부터 당신에게 ‘필요한 사실’들을 알려주도록 할게요.”
무표정하게 케이크를 박살내던 다은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움과 못미더움의 중간쯤에 있는 표정이었다. 십 초 후 약간의 기대감이 섞여들었다.
시현은 다은의 손에서 포크를 빼앗아 자신 앞에 내려놓았다. 오렌지색 천 위에 흰 크림이 점점이 묻었다. 오늘 처음 개시한 테이블보인데..
경환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방금까지 설거지를 했는지 손에 물기가 남아있었다. 쟁반 위에는 커다란 유리병에 담긴 유자 에이드와 컵 세 개가 있었다. 그가 테이블에 유리병과 컵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경환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옆 테이블의 의자를 가져와 함께 앉았다.
“마시면서 좀 가라앉히세요.”
자리에 앉은 경환이 이야기했다.
“그래요. 화 내지 말아요.”
시현이 다은의 잔에 에이드를 따라주며 거들었다. 그에 경환이 어이없다는 듯 말을 흘렸다.
“두 분 모두한테 하는 얘긴데요..”
안 들리는데? 시현이 농담처럼 툭 던지며 경환의 잔에 에이드를 따랐다. 감사합니다. 경환이 예의바르게 말했다.
“사실 저 다은 씨가 하는 말 들으면서 되게 공감가고 그랬어요.”
경환이 포크를 흔들며 말했다.
“그래요?”
“네에. 사장님이 옛날에 저한테도 막 그랬거든요. 왜 그런 걸 모르냐고 상식 아니냐구.”
“한결같았구나...”
다은이 혀를 찼다.
“저도 그 때 다은 씨처럼 그렇게 말할 걸 그랬어요! 전 막 주눅들어서,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슬프고 그랬거든요.”
경환이 발끝으로 테이블 기둥을 톡톡 건드렸다. 시현이 흔들리는 테이블을 잡자 경환이 ‘헤헤’하고 미안하다는 듯 작게 웃었다.
“내가 그 땐 잘 몰라서.”
“지금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경환이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시현이 입을 찌푸리자 경환이 재빨리 그에게 바싹 다가가 에이드를 권했다.
“다은 씨랑 만나고 경환이가 좀 건방져졌어요.”
시현은 경환이 재빠르게 꽂아준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에이드를 마셨다. 이런 식으로 영악하게 구는 애는 아니었는데. 그가 곁눈으로 경환을 보자 경환이 작게 고개를 기울였다.
“자기 할 말을 참지 않고 할 줄 알게 된 거죠.”
칼날이 맞부딪히는 대화 가운데서 경환은 천진난만하게 레몬커드케이크를 먹었다. 어느 한 쪽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그 사람에게 바짝 붙어 에이드를 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딱히 다른 건 없어요. 그냥 어린 아이 대하듯 하면 되는데...”
“그 어린 아이 대하는 것도 당연한 게 아니라구요.”
다은의 답답함은 가실 일이 없다. 경환의 의자는 다은이 앉아있는 의자 바로 옆으로 이동한 지 오래다. 경환은 그녀가 소리칠 때마다 입에 빨대를 갖다대줬다. 너무 자연스러워 그녀가 말릴 새도 없었다.
“그래요? 성인 인간이라면 다 아는 거 아닌가?”
“그럴 리가 없잖아!”
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
“여자라면 다 애를 키울 줄 안다고 믿는 남자들보다 더하네!”
두 모금
“아니 성별을 떠나서 인간으로 본 거니까 덜한 건가?”
이번엔 케이크 한 입.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경솔했네요. 그렇다고 다짜고짜 아빠냐고 물은 다은 씨가 잘한 건 아니지만.”
케이크를 먹느라 말이 막힌 사이 시현이 사과와 공격을 동시에 날렸다.
“그쪽은 항상 말 한마디를 더해서 문제야.”
질문이 경솔했던 건 나도 인정한다고. 다은이 유자 에이드를 쭉 들이켜고 과육을 잘근잘근 씹었다.
“다음 주 부터는 일주일에 세 번은 들려줬음 해요. 다은 씨가 궁금해 하는 거에 대해 제.대.로 알려드릴 테니까.”
뭔가 불길한 낌새가 들었다.
시현이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팔목을 걷은 흰 셔츠와 손에 든 유리잔, 부드러운 미소가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다은에게는 오한이 들 뿐이었다.
그녀는 경환이 먹여준 케이크를 꿀꺽 삼키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