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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어둠에 붙잡힐까 금세 서쪽으로 달음박질 쳤다. 바람이 구름 떼를 몰고 와 텅 빈 하늘을 채웠다. 눅눅한 구름들이 느린 몸을 이끌고 그림자를 드리우자 땅은 제 열기를 내어줬다. 뭉근한 열이 아스팔트를 뚫고 사람들의 다리를 휘감아 올랐다.
다은은 무릎 부근에 고여 있는 열을 헤치며 나아갔다. 시현은 적당한 거리를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합의된 침묵이 평온하게 둘을 가로질렀다.
“어?”
집에 다다르자 술렁거리는 공기가 느껴졌다. 창문을 열고 목을 길게 뺀 채 밖을 살피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현관에선 경비원과 한 중년 여성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아니 글쎄, 미친 여자가 온 건물을 휘젓고 다녔는데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아이고 아이고.. 그게 시스템이...그래서. CCTV 거기에 한 번 전화해보시면.. 이게 내 관할이 아니고.”
경비원은 식은땀이 나는 목덜미를 훔치며 눈을 굴렸다. 다른 한 손으로는 끊임없이 셔츠 단을 매만지고 내리눌렀다.
“시스템은 무슨 시스템이에요! 아저씨 여기 뭐 하러 있어요? 출입문 관리하라고 있는 거잖아요!”
중년 여성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비원의 태도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한껏 경비원의 태도를 지적하는 동안 다은은 현관을 지나쳐 들어가려 했다.
“아이고 이래봤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까....요.”
경비원은 능청스레 말을 잇다 흠칫했다. 그는 지나가던 다은을 흘끗 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몇 시간 전의 소동이 떠오른 탓이다. 그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피하기로 했다.
“그럼 CCTV 업체라도 불러 달라고요!”
“퇴근 시간이 다 됐네! 이거 죄송하게 됐수다. 너무 미안해. 근데 지금 집에 가야해서.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다은은 천천히 그 촌극을 지나쳤다. 불성실한 경비원이 또 이상한 사람을 들였나 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는 시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의뭉스럽게 생겨가지곤.”
불평이 입 안에서 부서졌다.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였다.
“어, 저한테 하는 말이에요?”
“글쎄요?”
불필요하게 귀가 밝다. 다은은 이번엔 마음속으로만 불평하며 시현과 나란히 계단을 올랐다.
“문 여세요. 전 계단 아래에 있을게요.”
다시 신사 코스프레라도 하려는 지 다감한 태도였다. 다은은 아무 고마움의 표현 없이 쌩하니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
시현은 계단 아래 남겨진 채 망연히 다은이 들어간 문을 바라보았다.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은은 발을 털 듯 구두를 벗은 뒤 가방을 내팽개쳤다. 얼마든지 기다리라지. 그녀는 천천히 화장을 지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보리가 자신이 집에 온 걸 눈치 챘는지 작게 삐약대고 있었다. 다은은 화장실에서 손과 발을 깨끗이 씻은 뒤 보리가 들어있는 새장을 열었다.
“우리 보리이이이”
“삐이-”
보리가 작은 날개를 퍼덕여 손 안으로 깡충 뛰어 들어왔다. 터질 듯한 사랑스러움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너무 작아서 꽉 껴안을 수도 없어. 이제 곧 보내야하는데. 다은은 이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보리를 위해 산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리가 좋아하는 장난감 인형이며 급여 시간마다 타고 놀던 작은 그네. 새장에서 꺼내주지 않는다고 삐져서 들어가 안 나오던 천주머니 침대까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대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보리가 평범한 애완 새였다면...’
아무 생산성 없는 생각들. 그러나 복잡한 마음은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상상을 멈출 여력이 없었다.
보리의 잘못이 아닌 걸 알지만... 보리가 그냥 앵무새나 그런 새였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내가 알을 만지지 않았더라면.’
띵동-.
꼬리를 물고 늘어지던 상념이 깨졌다. 아마 시현이리라. 다은은 보리를 횃대에 앉혀놓은 뒤 현관으로 향했다.
“그것도 못 기다리는-”
퉁명스레 나가던 말은 눈앞의 중년 여성을 보고 갈 길을 잃었다.
“어? 무슨 일이세요?”
방금 전 현관에서 경비원과 싸우던 여성이었다.
“아니, 아가씨 집 앞에 이상한 사람이 서 있길래! 안 그래도 아까 어떤 미친 여자가 건물을 휘젓고 다니면서 정신 나간 것처럼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 대서 아주 소름끼쳤다고.”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다은은 그 엉뚱한 대답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동안 시현은 중년 여성 뒤에 얌전히 서 있었다.
“근데 이 청년이 여기 저승사자처럼 멍하니 서 있잖아. 또 웬 미친놈인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허우대도 멀쩡하고 잘생겼어. 그래서 물어보니 남자친구라네? 아니 아가씨는 왜 남자친구를 집 앞에 세워둬?”
뭐 이딴 오지랖이 다 있나 싶었다. 아니, 상대방이 남자친구가 아니라 스토커였으면 어쩌려고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다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아, 예. 감사합니다.”
다은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성의 없이 말했다. 미적지근한 대답에 중년 여성이 발끈하려는 찰나 시현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주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 여자친구가 지금 화 나 있어서요..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어머. 잘생긴 친구가 싹싹하기도 하지. 정말 요즘 애들은 이런 남자가 만나주는 게 복인지도 모르고 말이야.”
중년 여성은 어깨에 올려진 시현의 손을 덥썩 잡아 쓰다듬었다. 여간 마음에 든 모양이다. 손을 놔주지 않고 어깨나 팔을 매만지는 모습이 여차하면 그대로 끌고 가려는 기세였다.
“야, 들어와.”
시현의 웃음에 금이 갔다. 지칠 줄도 모르고 중년 여성의 희롱 겸 칭찬을 받아넘기던 그가 다은을 바라봤다.
“야, 남자친구. 들어오라고.”
먼저 시작한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난 지금 구해주려는 건데?
다은이 빙글빙글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그에 시현이 잡혀있던 몸을 빼자 중년 여성은 아쉽다는 듯 마지막으로 그의 팔뚝을 쓸었다.
“아이고, 다음번에 오면 우리 집에도 놀러오고 그래. 응? 어차피 여자친구는 문도 안 열어 줄 텐데.”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시현은 제 팔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손을 잡아떼었다. 중년 여성이 아쉬움을 남기며 돌아가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일단 들어오시죠.”
시현은 다은을 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그가 신발을 벗는 사이 다은은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당신 뭐했죠?”
“네?”
“아까 저 아줌마한테 말이에요. 뭐 했잖아요. 안 그래요?”
시현은 아무 말 없이 현관 옆에 놓인 슬리퍼에 손을 뻗었다. 무시하네? 다은이 슬리퍼를 낚아 채 시현의 눈 앞에서 흔들었다.
“대답 해봐요. 뭐 했죠?”
시현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냥 평범한 매혹이에요. 흔한 능력이죠.”
이제 됐냐는 듯 그가 다은에게로 손을 뻗었다. 다은은 그의 대답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다 슬리퍼 한 짝을 내줬다.
“매혹이라. 왜 썼는데요?”
시현은 제 손에 들린 슬리퍼 한 짝을 바라보더니 다은이 주지 않은 나머지 한 짝을 주시했다. 아무래도 원하는 대로 다 말해줘야 나머지 한 짝도 줄 듯 했다.
“....그 분이 예민하신 상태라. 몇 시간 전의 다은씨처럼 경비실로 달려가려고 하시더군요.”
“아하.”
하긴, 방금 전에 수상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난리친 사람인데 이상하다 했다.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 아까처럼 절 더듬고 그런거죠...”
시현이 남은 비밀마저 털어내자 다은이 들고 있던 나머지 슬리퍼 한 짝을 내줬다.
“너무하네요 정말. 이런 걸 인질로 잡고.”
“고작 이런 게 인질이 되는 그쪽이 더 이상한데요.”
시현의 툴툴거림을 받아넘기며 다은은 그를 새장으로 이끌었다.
“이 애가 보리에요.”
“아....”
시현이 새장 앞에 무릎 꿇었다. 열린 새장 사이로 횃대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작은 아기 새가 보였다. 절로 입이 벌어지고 손이 공손히 무릎 위로 모였다.
“하.... 정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사랑스러워요.”
“그쵸?”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자랑하듯 다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든 일주일 동안 키운 건 나니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지... 아가, 저기 아가. 깨어있니?”
그는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부여잡은 채 고뇌했다. 다은은 같이 보리가 깰 때까지 기다리다 시현이 너무 정신 사나워 부엌으로 자리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