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에 빠진 것도 잠시, 다은은 아기 불사조의 부드러움 감촉에 홀려버렸다. 불사조를 감싸고 있던 수건은 저 멀리 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다은은 왼 손을 오목하게 구부려 아기 새를 올려놓고 오른 손으로 아기 새의 머리를 살며시 매만졌다.
"삐이이-"
"헉..."
다은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접하던 불사조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여렸고,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래, 귀여웠다! 귀여우면 끝이야! 키워야겠다는 결심이 든 순간이었다.
"그럼 일단 새 키우는 데 필요한 것부터 사야겠네. 아니, 얘는 불사조라 좀 다른가?"
다른 새들과 다르게 보송보송한 상태에서 알을 깨고 나온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일반 새를 키우는 것과 많이 다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기 때는 주사기로 이유식 먹이는 것 같던데 얘는 고기도 먹을 것 같아."
다은은 고개를 기울이며 아기 불사조와 눈을 맞췄다. 동그란 눈이 깜빡거리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게 사랑스러웠다.
"그래, 일단 다 사면 되는거지!"
훌륭한 애완동물 덕후의 모습이었다.
*
일주일 동안 다은은 애완 새 용품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새장, 물통, 먹이통, 횃대부터 침대주머니, 소리나는 장난감, 간식과 먹이까지. 제법 풍요로웠던 통장 잔고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마음은 풍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기 불사조가 조공들을 행복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뺙"
"아 예뻐, 귀여워!"
찰칵, 찰칵. 찰나의 귀여움조차 놓치지 않기 위해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비록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거나 SNS에 올리지 못하지만 매일 밤 앨범에 쌓인 사진 수를 세어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했다.
"삐이"
"응, 그래. 쓰다듬어줄까 보리야?"
'보리'는 다은이 아기 새가 부화한 다음 날 붙여준 이름이다. 처음에는 피닉스라던가 불꽃이같은 이름으로 불러봤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한참을 고민했었다.
온갖 멋진 이름으로 불러도 무시하길래 밥솥에서 나왔으니 쌀이나 보리라고 불러보자! 한 게 정답이었다. 아무래도 쌀은 어감이 안좋아서 보리라고 불러봤는데. "보리에 반응할 줄은 몰랐지." 다은은 그 날을 떠올리며 보리를 조심스레 새장 안에 넣었다.
"그럼 엄마는 출근할게. 혼자 둬서 미안해, 잘 놀고 있어야 돼?"
발은 현관으로 향하면서도 시선은 보리에게서 떨어지지를 못했다. 목만 뒤로 뺀 웃긴 자세로 신발을 갈아신은 다은은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
오늘 저녁은 푸르게 물들고 있었다. 점심 때 내린 소나기로 더위가 흩어졌다. 물 먹은 공기가 피부를 스치며 지나갔다. 골목길 사이로 바람이 모여 들며 옷자락을 거세게 흔들었다.
'오늘은 선풍기 대신 창문을 좀 열어놔야 겠다.'
경비 아저씨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계단을 올라갔다. 4층에 다다를 무렵 집 앞에 누군가 서있는 걸 알아 차렸다.
'뭐야?'
다은은 계단에 멈춰섰다. 낯선 남자였다. 앞 집에 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앞 집에는 신혼 부부가 살고 있다. 친하지는 않지만 오며가며 고개는 숙이는 사이였다.
'아 뭐야 무섭게....경비 아저씨 불러와야 겠다'
다은은 계단을 내려가려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녀가 두 세 계단을 뛰어넘기며 내려가자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큰 소리에 누군가 있었다는 걸 눈치 챈 모양이었다.
"아 저기...어? 저기요!"
"악!"
등 뒤로 들려오는 외침에 심장이 미친듯이 내달렸다. 다은은 괴성을 지르며 추진력을 얻은 것마냥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갔다.
"저기요! 죄송해요! 죄송한데...!!"
다행히 4층에 살고있는 터라 1층 경비실까지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은은 제 귀에 들릴 정도로 심장이 크게 뛰고 있는 걸 느꼈다.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갈까 걱정될 정도였다.
타다닥. 타닥.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헉, 그 사람이 쫓아오나보다! 다은은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경비실 문을 열었다.
"아저씨!"
"잠시만요"
따라들어온 남자는 장신의 미남이었다. 다은도 키가 제법 큰 편인데 그녀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걸 보니 180은 가뿐히 넘는 듯 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커다란 상자를 든 채 였다.
"아니, 무슨 일이야?"
경비실 아저씨가 셔츠를 펄럭이며 안쪽에서 나왔다. 다은은 얼굴을 찌푸린 채 남자를 노려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제 집 앞에 서있잖아요! 아저씨, 이런 거 관리 안하세요?"
"아 거참, 오고가는 사람을 일일히 어떻게 다 관리해? 아가씨 예민하게 굴지 좀 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은은 여기서 논리적으로 반박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란 걸 알았다. 언제나 그랬다. 혼자 사는 여자로서 허구헌 날 당하는 일이긴 하지만 당할 때마다 울분이 차올랐다. 경찰을 불러도 물리적인 피해를 입은 게 없으니 그냥 돌려보내겠지. 순찰을 자주 다니고 경비를 강화하겠다는 거짓 약속만 늘어놓은 채.
다은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가는 동안 남자는 상자를 든 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나가. 안그래도 습해 죽겠는데 왜 젊은 아가씨까지 짜증나게 해?"
쾅!
굉음과 함께 다은이 경비실을 나갔다.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짧은 욕설이 들려왔다.
다은은 빠른 걸음으로 건물 밖을 나섰다. 오늘은 아무래도 밖에서 자야겠어. 어딜가지? 친구네 집? 아, 보리가 집에 있는데 젠장! 걸음 하나를 옮길 때 마다 수십 가지 생각이 휘엉켜 몰아쳤다. 갈 데 없는 분노와 좌절감에 걸을 때마다 땅바닥만 내리쳤다.
십 몇 분 넘게 걸으니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은은 분노로 달아올랐던 몸이 차게 식는 걸 느꼈다. 호수를 둘러싼 산책길을 따라 멍하니 걸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소름이 돋았다.
"따라오고 있었어?!"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갔다. 지나가던 사람 몇이 다은을 쳐다보다 제 갈 길을 갔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제가 너무 안일하게 굴었어요. 무섭다고 느낄 지 몰랐습니다. 쫓아가는 것도 무서워하실 것 같았지만, 이대로 끝나면 다시는 말을 못 걸 것 같아서요."
다은은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생긴 걸 멀쩡했다. 하지만 얼굴과 허우대만 보고 무턱대고 믿기엔 너무 위험한 사회였다.
"가까이 가지 않을테니, 제발 제 이야기 한 번만 들어주실 수 있나요? 저 앞에 커다란 카페가 있는 걸 봤는데 그리로 가주시면..."
"제가 먼저 가있을 거에요."
시무룩하게 처져있던 고개가 들렸다. 남자의 눈이 조금 빛난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은은 조심스레 그와 거리를 벌리며 카페로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