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한(전 세자)는 몇 시간이 넘도록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산세도 험한데다가 자욱하게 낀 안개로 더욱 발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대낮인데도 무슨 안개가 이리 심하담’
삼일 전 궁을 탈출하던 밤 도성의 시내로 접어들은 몽한은 간신히 도성 외곽에 위치한 주막을 찾았다.
본디 타지에서 먼 길을 달려 한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진입전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들르는 곳이었으나 반대로 몽한은 나가기 전 들리게 되었다.
외지인들이 대부분인 덕에 의도하지 않게 세자인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조선 주막에서 친절하게 목간을 허용 해주는 곳은 거의 없다. 늦은 밤 손님에게 탁주라도 주는 것을 다행이라 여길 뿐이었다.
몽한은 그간의 피곤을 쏟아내듯 이틀을 내리 주막에서 잠만 잤다. 불과 얼마 전까지 왕자였던 그가 좁아터진 방에 엽전 꾸러미처럼 포개져 자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자려니 고생스러울 법도 하건만 뒤주보다 더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나마 기력을 회복한 그가 갈 길로 택한 곳은 수원에 위치한 광교산이었다.
‘어머니의 편지에 언급된 광목대사라는 자가 이곳 광교산에 있으렷다’
어머니로서의 슬픔과 사랑, 그리고 이번 사건에 대한 전모가 쓰여 있었으나 몽한이 가장 궁금한 ‘앞으로 어떻게?' 에 대한 답은 없었다.
허나 나를 궁 밖으로 보내도록 어머니께 고한 자가 광목대사라 하니 그를 만나면 무엇이든 지금 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또한 혹여 자신을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일이 얼마나 복잡해질지 뻔했기에 어떻게든 도성은 빠져나왔어야 했다.
그렇게 하루꼬박 80리 길을 걸어 도착한 광교산은 오르기가 여간 험한 것이 아니다. 무작정 오고 보니 제법이나 큰 산이었고 어느 중턱에 절이 붙어있는지는 감도 안 오는데 안개마저 자욱하다.
인근의 큰 호수가 자주 안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리 없는 몽한이기에 뭔가 으스스한 기운마저 들었다.
‘이대로 해가 지면 뒤주가 아니라 산속에서 송장이 되겠구나!’
한참을 헤매다 지쳐 바위 턱에 앉으니 저물어 가는 낮빛에 걱정이 들었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는데 몇십 걸음 앞의 안개가 조금씩 걷혀갔다. 바람이 일 듯 사라져가던 안개 속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다.
놀란 가슴으로 살피니 행색은 중이요, 나이는 쉰이 훨씬 넘어 보였다.
"허허- 여기 계셨구려. 한참을 찾아 다녔습니다."
"저를... 아십니까?"
출궁한 뒤 먼저 인사를 건네 온 이는 처음이기에 혹시 탈출을 눈치 채고 쫒아온 관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알다마다요. 세자마마 아니십니까? 저는 광목이라 합니다. 일전에 영빈마마님과 관계가 있어 특별히 모시러 나왔습니다."
"아!!!"
몽한은 기쁨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지만 무어라 하기 전에 광목이 말을 잘랐다.
"곧 날이 저뭅니다. 우선 제가 기거하는 작은 절이 있으니 그곳으로 드시지요."
그리고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고 몽한도 서둘러 따라갔다. 광목의 걸음은 서두르지 않음에도 빠른 보폭으로 묘한 느낌을 주었다. 가만 보니 광목이 지나가는 앞은 길을 트는 것처럼 안개가 사라졌다.
"스님, 물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묘한 분위기에 입을 다물었던 몽한이 말을 걸었다. 사실 은근히 빠른 걸음을 조금 늦추고도 싶던 차였다.
"허허- 어디 하나뿐인가요? 도착해서 물으셔도 늦지 않을 겁니다."
"제가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계셨나요?"
몽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뒤주에 갇힌 세자가 아직까지 죽었다는 소식이 없으면 소승이 일러준 대로 출궁에 성공했다는 것이고, 그럼 갈 곳이 없어 필경 저를 찾아오리라 짐작했을 뿐입니다."
광목의 빠른 걸음은 기대와 달리 여전히 줄지 않았다.
"산을 뒤지고 다니는 것은 늘상하는 소승의 버릇이니 오늘도 그러하다 세자마마를 발견했던 것이지요."
둘이 그렇게 한참을 걸으니 암자라고 불러도 될 만한 작은 크기의 절이 나왔고 광목은 안으로 몽한을 안내했다.
자리를 깔고 앉으니 막상 몽한은 무엇부터 물어야 하는지 머뭇거렸다. 그런 적막을 광목이 먼저 깼다.
"이름은 새로 구하셨습니까?"
"네, 조금 창피스럽지만 몽한이라 지었습니다."
"창피스러울 거야 있나요. 썩 이름이 괜찮습니다. 허허"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동자승이 문을 열고 차를 내었다. 건방지게도 자기 것도 가지고 와 고승의 옆에 한자리 하는 것이 퍽이나 당돌해 보였다.
"이 아이가 이제 아홉 살이니 원자마마님 또래군요."
"네, 딱 저만한 나이입니다."
"많이 보고 싶으시겠습니다."
같이 있을 때는 자신의 질병으로 정작 큰 정을 주지 못했던 아들이었지만 꼴이 이리되니 새삼 그리움이 사무쳐왔다. 하지만 아직 정체 모를 중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세자마마님을 그동안 괴롭혀 왔던 것들이 무엇인지 짐작 되시는지요?"
"여인의 목소리였습니다. 끊임없이 제게 속삭이고 꼬드기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시겠구요?"
"그건 전혀 모르겠습니다."
광목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저 한숨이 아닌 슬픔과 고뇌가 담긴 듯 보였다.
"그들은...... 왜란과 호란의 겪으며 죽어간 백성들입니다."
몽한은 화들짝 놀랐다.
"백성들이라고요? 그럼 대사께서는 일국의 세자였던 저를 그토록 괴롭혀 왔던 것이 일개 백성들이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리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미미해 보이는 백성들이 모일 때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흔들리게 하는 법입니다. 심지어 그냥 백성이 아닌 한을 가득 품고 죽어간 이들의 영 입니다. 오, 통재라 오, 애재라......."
작은 방안에 적막이 흘렀고 자신을 괜스레 사납게 보는듯한 동자승의 눈매에 몽한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왜란과 호란이라면 벌써 발생한지가 일이백년씩은 족히 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백성들이 한을 품으려거든 왜놈들이나 오랑캐 놈들에게 붙어야지 어찌하여 애꿎은 저를 향하는것입니까?"
"소조(몽한)께서는 왜란과 호란에 대해 궁에서의 가르침대로만 배우셨으니 그 전쟁의 실상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을 겁니다."
"대사께서 깨우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임진왜란 초기에 민중들은 오히려 왜군들이 가는 곳마다 환영하며 반겼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몽한은 그야말로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실상 조선 신분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백성들은 개국 이래 양반 세도가들의 지독한 수탈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풍년이라야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고 흉년이라도 들면 꾸어다 먹은 곡식을 갚지 못해 전답을 빼앗기고 이마저도 안되면 자식과 처를 빼앗기고 본인도 소작농이 되어 죽을때까지 노예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양반들의 수탈은 쉬어갈 날이 없고, 그 방법은 갈수록 간악해져만 갔다.
"물론 왜란 초기의 일이지만 그런 백성들은 오히려 왜군을 자신들을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줄 해방군 정도로 여겼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왜놈들을..."
"그만큼 백성들이 겪어왔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해 왔습니다."
광목은 말을 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그러한 것들이 오래도록 가능했던 것은 왕과 양반 그리고 남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세뇌시켰기 때문입니다."
광목은 말을 어린 아이 꾸짖듯 엄한 표정이 되어갔다.
"그런데 정작 변이 발생하자 어찌 했습니까?"
"......."
"남자들이 무능하여 여인네들이 희생되었고, 양반들은 그저 자신들의 재산과 몸을 보신하는데만 급급하였습니다. 그리고...왕은 백성을 버리고 가장 먼저 도망갔지요."
몽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침만 꼴깍 삼켰다.
"심지어 호란 때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수많은 여자들은 남자들은 어찌 대했습니까? 화냥녀라 부르며 핍박하고 그녀들의 자식은 호로자식으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광목은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을 더욱 힘주어 말하였다.
"왕이 무능하여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고 환난은 극복하였으나 공은 양반들의 것이요, 돌아오는 것은 핍박 뿐이니 그 한이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른것입니다."
"그 한을 풀려면 어찌 해야 합니까?"
"그것이 바로 세자께서 가셔야 할 길입니다. 켜켜이 쌓인 원혼들이 그릇처럼 세자께 담겨 있다가 출궁하신 지금, 그들 역시 세상 밖으로 나와 팔도의 기운이 흐트러 졌습니다. 이제 흐트러짐 속에 온갖 기괴한 일들과 요망한 것들이 난무할 것이니 세상을 널리 다니시며 그들의 한을 푸셔야 합니다."
"저......혼자요?"
몽한의 당황함에 광목은 껄껄 웃었다.
"글쎄요, 세상이 넓으니 기연도 얻으련만 저는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럼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가르쳐 주시는 건가요?"
"제가 불이라도 날리고 물을 집어 삼키는 능력이라도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범인에 불과하니 가르쳐 드릴 수 있는건 세자께서 가실 길 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서 깨우치고 배우실 것입니다."
심각한 대화 속에 동자승이 가져온 차는 반도 채 비우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들을 한 번에 알게됨과 막막함으로 몽한은 바람이 쐬고 싶어 광목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대사님께서 아까 말씀하셨던 왜란과 호란에 대한 것들은 정말 처음 듣는 내용이신가요?"
어느새 따라 나온 동자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로구나."
동자승은 자신도 아는 것을 왜 모르냐는 듯 키득 거렸다.
"남이 알려주는 것만 들으니 그렇죠."
"그래...... 내가 너만도 못한 것을 보니 주입식 교육은 참으로 할 짓이 아니로구나."
어느덧 달이 차 컴컴한 가운데 산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험난한 몽한의 여정을 경고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