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인큐베이터를 나가면서 다시 두 사람을 더 죽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 소년은 내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테스트하는 중일 것이다. 다만 이 소년은 나와는 다르게 사람을 죽이는데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먹은 이상 나도 더 주저할 수는 없었다. 소년이 사라졌다면 찾아내어 죽여야 했다. 나는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사라진 소년이 아무것도 학습된 것이 없는 지금 상태에서 당장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금’이라는 단서가 달려 있었다. 시간이 주어지면 이 상황도 바뀔 것이다.
내가 처음 시스템의 기계어를 배우는데 걸린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배워야 할 기계어를 당장 나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명령어로 제한한다면 필요한 시간은 하루가 안 되는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 바로 시스템 앞에 앉아 소년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첫 에러메시지는 병원 인큐베이터실에서 두 명의 작업자를 죽이면서부터 시작 되었다. 그리고는 소년이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 더 이상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초조해졌다. 나는 다시 병원에서 작업자가 죽은 시점부터 에러메시지를 샅샅이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 언뜻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는데 옆구리로 차가운 그리고는 곧 뜨거운 무언가가 살을 찢으며 들어왔다. 소년이었다.
소년은 아무 표정 없이, 내가 소년을 죽이려고 들고 왔던 작대기를 내 옆구리에 쑤셔 넣었다. 이미 몇 번이나 사람을 죽여본 경험으로 내 목을 노렸지만 내가 돌아보는 순간 공격 목표를 내 옆구리로 바꾼 듯 했다. 소년은 내 옆구리에 꽂힌 작대기를 빼내기 위해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것을 뽑아내면 내 옆구리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올 것이고 소년이 쥐고 있는 작대기는 다시 내 목을 노릴 것이다.
나는 한 손으로 옆구리의 작대기를 잡고는 있는 힘을 다해 소년을 밀쳐냈다. 아무리 어린 소년이 상대라고는 하지만 옆구리에 작대기를 꽂은 채로 싸워서 상대를 제압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 소년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쉽고 익숙하였다. 나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문 밖으로 뛰어 나간 후 문을 닫았다.
시스템 방 밖으로 나와 한 손으로 옆구리를 감싼 채 힘겹게 계단을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 소년이 시스템을 장악하기 전에 바깥세계로 몸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도 이 곳은 일상과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이 곳에서 작대기를 뽑아내고 찢어진 살을 꿰맨 후 바깥세계로 향했다. 시스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한시라도 빨리 가야 했다.
바깥세계로 나가서 바로 드론을 불러 내렸다. 바깥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드론은 없어서는 안될 도구가 될 것이었다. 나는 먼저 드론의 송수신 안테나를 부러뜨려 제거하고는 송수신 케이블을 내 명령어 입력기와 직접 연결시켰다. 이제 곧 소년이 시스템을 장악하면 명령어 입력기로 시스템에 접속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내 손과 발이 되어 줄 드론을 조정하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갈 곳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시스템의 영향력이 가장 작게 미치는 곳.
'바다.'
바다로 향하는 길에 몇몇 드론을 보았지만 나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안전이 보장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를 가질 수 없이 해안까지 내달렸다.
바닷가에 도착하자 이내 긴장이 풀렸다. 지금까지는 살기 위해서 무작정 안전한 곳을 찾아 달려왔지만 이 곳에 도착하고 나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응급처치를 했다고는 하지만 옆구리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내렸고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까만 물속에서 배가 찢겨진 돌고래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있었다. 분명 내가 죽였던 놈이었다.
나를 보며 무언가 말을 하는 듯했는데 멀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움에 갇혀 있던 내가 그 돌고래를 향해 다가갈 수도 없었다.
‘힘들었지?’
웅얼거리는 소리 속에 작고 나지막한 말이 들린다. 순간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그래 힘들었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었다. 배고프고 아픈 것도 모르던 나였는데. 그냥 시스템이 원하였던대로 사람들을 다 죽이고 나도 죽었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뱃가죽이 찢어져서도 살기 위해 물 속을 헤엄쳐야 하는 저 돌고래가 나와 같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예쁘장한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세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불필요한 치장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옷과 여자의 옷이 다를 것이 없었고 머리카락은 똑 같은 모양의 단발로 정리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멋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체온을 조절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머리카락이 길었다. 긴 머리카락은 몇 가닥씩 땋아져 빨간색 끈으로 묶여 있었다. 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더 커졌다.
“엄마! 이 사람 깨어났어. 엄마!”
아이의 호들갑스러운 행동에 순식간에 내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깨끗하지만 낡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정신을 잃은 나를 이 곳으로 데려와서 돌봐 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내가 어색한 발음으로 입을 떼자 사람들은 조금 놀라고 신기해 하는가 싶더니 서로 무어라 얘기하며 웃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중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그는 내 상처를 만져보며 내게 물었다.
“상처는 어떤가?”
웃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내게 물어 볼 것이 많았을텐데 내 몸 상태를 먼저 물어 보는 것을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살아온 세월의 연륜만큼이나 배려심이 있는 사람 같았다.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누워 있는 나를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봐들, 이 녀석 좀 쉬게 내버려둬.”
노인의 말에 사람들은 아쉬운 듯 하나 둘 발걸음을 돌렸다. 이 곳의 생활도 꽤나 무료했던지 외지에서 온 이방인의 입에서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우선은 몸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처음 보았던 여자아이가 나를 돌보아 주었다. 죽 같은 음식을 먹여주고 상처를 감싼 천을 갈아주고 내 몸을 닦아 주었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일을 하러 흩어졌다가 식사시간이면 한 곳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며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시스템의 영상에서 보았던 것 보다 더 활기찬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