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바탕에 시뻘겋게 쓰여진 문구는 분명 그렇게 쓰여 있었다. 성악대의 알아 들을 수 없는 노래는 기괴한 분위기를 한껏 더했다. 리메이서는 입을 가리고 뒤로 물러섰다. 다른 채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화면이 위에서 아래로 빙빙 돌아갔다. 익숙한 아나운서가 화면에 나왔다. 오렌지색의 넥타이가 조금 흐트러져있었다. 실시간으로 통신을 주고받는 중인지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거짓이었다.
“죄송합니다. 하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저희도 황당할 따름입니다. 잠시 누군가 저희 서버에 해킹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통신이 원활하지 못했던 점,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범인은 방송국 현장에서 바로 잡혔다고 합니다. 범인은 최근 바이러스처럼 번지고 있는 이른바 사이비 신기독교의 ‘광신도’의 일원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방위기지?”
리메이서는 담배를 씹었다. 한 번 빨아들인 후 바닥에 툭툭 치자 먼지 같은 불똥이 튀었다. 리메이서는 빌딩 아래 있는 활엽수의 수영을 받으며 바람을 쐬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플랭크와 라미온이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머릿속이 소용돌이쳤다.
“그게, 지원신청을 해서 되긴 됐는데, 꽤 중요한 국가사업인가 봐요. 기밀사업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밀리에 실시한다더군요.”
“너희들, 이미 스텔스 기업이잖아.”
“그보다도 더 숨기려는 거겠죠.”
플랭크가 말했다. 옆에 있던 동료인 라미온이 통지서를 건네주었다.
글자가 한 여름의 수림처럼 빽빽했다. 리메이서는 블라우스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샅샅이 살폈다. 난데없이 손가락이 불쑥 나타나 하단을 가리켰다.
“밑에 쓰여 있어요.”
라미온이 말했다. 리메이서는 안경 너머로 그녀를 흘긋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다.
리메이서는 그녀가 가리킨 부분에 눈을 돌렸다. 손톱 반달 정도 크기의 글자에 밑줄이 처져 있었다.
‘국가 투자 대상으로 선발된 단체, 혹은 기관은 기관장이 지명한 특정 구역에서 관련 연구를 해야함을 분명히 공지합니다.’
“특정 구역“
리메이서는 반복해 읽고 담배를 바닥에 버린 후 발로 살짝 밟았다. 불은 힘없이 꺼졌다.
“그게 어디라고는 안 나왔는데”
“그게,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다만 다른 계약서에 있었을 뿐이죠. 미안해요. 제가 제대로 알아보고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플랭크의 눈은 조금 불안한 듯 흔들렸다. 말에는 면접관에 선 듯 경직되어 있었다. 아마도 리메이서가 프로젝트를 거절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라미온은 반대였다. 뭐가 좋은지 아까부터 연애를 막 시작한 사람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
리메이서는 생각을 정리했다. 가족을, 일상을 잠시 포기해야하는가. 그렇지만 따지고 보니 별 생각도 없었다. 이미 자식은 제 살림을 차렸고 집에선 홀로 살아가던 참이다. 달라질 건, 글쎄, 그동안 먹고 싶은 건 맘껏 먹었는데 거기선 메뉴 ‘선택’은 할 수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의 혼돈이 싹 가셨다. 아마 소용돌이는 찻잔 속에서 벌어진 자그마한 해프닝이었던 모양이다.
“어디서 하든 상관없어”
리메이서가 그렇게 말하자 플랭크는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전혀 상관없는 건가요?”
“식사 메뉴만 선택할 수 있으면”
“메뉴요?”
플랭크는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고 되물었다.
“어딜 가든 식사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해. 그것도 안 된다면 자유가 아니지”
“지금 농담 하시는거죠?”
리메이서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그녀는 짧은 회상에 빠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꽤 오래사셨어. 눈을 감으셨을 땐 이미 백이 넘으셨지. 1차 대전에 참전하셨어. 학살, 억압, 호수를 이룬 피 웅덩이. 모든 걸 보셨지.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자유가 찾아왔어. 그리고는 곧바로 대공황. 식량이 부족해서 풀떼기나 쥐고기, 썩은 수프나 먹었어. 할아버진 그 시절이 너무 끔찍했던 나머지 하신 말씀이 있어. 내가 먹을 걸 선택할 수 없다면, 자유가 다 무슨 소용이지? 식사메뉴를 선택할 수 없다면 자유는 죽은 것이다.”
플랭크는 리메이서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말을 하기 매우 망설여 하듯, 입을 움짝달짝했다.
“그래서, 하시겠다는 건가요?”
리메이서는 눈의 초점을 되돌리고 플랭크를 쳐다보고 말했다.
“할게.”
확고했다. 이미 낙장불입의 세계에 들인 것처럼. “방위기지라니, 무슨 대단한 국가 스파이라도 된 기분인데.”
그리고 씩 웃어보였다. 그녀가 지은 표정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내심 우울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려도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에 우울해했다.
“그럼 이만.”
리메이서는 난데없이 찻길로 나섰다. 플랭크와 라미온은 그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질주하는 차들 사이로 거침없이 걸었다. 그녀는 바쁠때면 늘 차선 위를 걸었다. 그녀에겐 익숙하고 평범한 일이었다. 가운데쯤 섰을 때 리메이서는 뒤를 돌았다. 차가 지나갈 때면 옷깃이 태풍과 맞닿은듯 휘날렸다.
“이봐, 플랭크!”
“네?”
“내가 왜 이 일을 하겠다고 했는지 말했던가?”
“아뇨!”
“저번에 아들한테서 연락이 왔어. 소식을 듣고선 몇 년 만에.”
“뭐라 했는데요?”
“괜찮으냐고.”
“그래서요?”
“그렇다고 했지.”
플랭크는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리메이서는 뒤를 돌았다.
“그 다음은요?”
“그것 뿐이야.”
덤프트럭이 그들 사이를 막았다. 리메이서는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차도를 가로질렀다.
“방위기지라니.”
웃기는군.
.
“인사해요. 저희 총괄자분이십니다.”
라미온이 어떤 여자를 소개하며 말했다. 그 여자는 어딘지 조금 들떠 보였다. 허나 들뜬 방향이 사람을 만나서 신남. 이 아니라 ‘맙소사 또 이 짓거리를 해야 한다니’, 하며 의례상의 미소가 왜곡되어 보인 나머지 불쾌감으로 들떠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리메이서는 옷에 손을 닦고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리메이서 콜린입니다. 흔한 공학도죠.”
그러자 총괄자는 껄껄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웃음을 끊는 타이밍이 참으로 기묘한데, 동영상을 실수로 누른 것처럼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여러모로 부실하고 빈 틈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흔하다니, 여기까지 오신 것만으로도 흔하진 않겠죠. 오페밀러 카터입니다. 직급이 있긴 한데, 군인도 아니시고 대충 그런 겉치레는 버려두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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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몇 번 순환하고 났을 때였다.
리메이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군인의 옷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 거의 울다시피 했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데,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분노와 잔혹한 충격의 투명한 피였다
“내보내 줘요”
“안 됩니다. 자정 이후에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제발, 내보내 달라고. 에페 얼굴을 봐야겠어. 난 봐야겠어. 제발.”
“죄송합니다. 윗선의 방침에 따라......”
“방침 따윈 다 좆 까라 그래. 내 아들이 살해당했는데, 연구에 지장이 있을까봐 숨겼다고? 좆 까, 좆 까라고”
리메이서가 에페의 죽음을 알 게 된 것은 불과 몇 분 전. 오페밀러의 말실수에서부터였다. 리메이서는 외부 접촉이 차단된 터라 정보에 대해 부쩍 예민해 있었다.
평소처럼 연구 보고를 올리던 도중, 오페밀러가 리메이서에게 뜬금없이 유감을 표했다. 수상스레 여긴 리메이서는 꼬치꼬치 캐물었고, 밀어 붙었다. 연구 데이터 자체를 디가우징 하겠다는 협박까지 하고나서야 오페밀러는 에페와 그 딸이 괴한에게 피살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하루종일 흐느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벽에 기대 얼굴을 두 손에 감쌌다.
“당신네들은 거짓말쟁이야. 모조리, 모조리 거짓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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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랭크, 이제야 드는 생각인데, 왜 방위기지일까?
리메이서가 말했다. 하루종일 설계도와 컴퓨터 앞에 있다가 의자에 몸을 완전히 파묻힌 채 눈을 잠깐 붙이며 쉬고 있던 차였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왜 방위기지일까”
“국가 안보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보죠, 뭐”
“아니야. 그것보단 뭔가 있어.”
플랭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단 뜻이었다.
“플랭크, 그....... 국가공.......투자안? 암튼 그 10대 투자 분야가 뭐라고 했었지?”
“DNA 안드로이드, 해저도시, 지진파 등등. 나머지는 모르겠네요. 나노 기술 관련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말이야. 만약 그들이 전쟁무기로 활용하려는 거면 어쩌지?”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플랭크는 컴퓨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생각해봐, C언어는 한정적이잖아. 자체적으로 여러 변수를 만들어낼 순 있지만 네트워크만 연결되지 않는다면 정해진 알고리즘 틀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어. 하지만 DNA는 달라. 한계가 없어. 기계가 의지만 있다면 뭐든 가능하지. 그래서 생각해 본건데”
리메이서는 뜸을 들이자 플랭크가 궁금증을 가지고 그녀를 쳐다봤다.
“기계 스스로 생각하게 해서 살인 기계로 만들려는 수작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럼 해저도시는요? 거기에 무기고 만들거다?”
“왜 그들이 뜬금없이 ‘지진’에 관심을 쏟을까? 아는 지인 중에 우리랑 독같이 지원했었던 지질 연구원이 있었는데, 결국 탈락했지만, 아무튼,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지진 그 자체 보다는 ‘생성 과정’에 관심을 보이더라 이거야”
“생성 과정?”
“지진 예측을 통해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 분야에 눈여겨보고 있더라하더라고”
“그가 직접 그래요?”
“연구원? 그렇다니까? 여기에 들어오기 전에 전화했었거든. 그때 분명히......”
“아니, 아니, 연구원 말고, 그 총괄자요. 우리처럼 총괄자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자가 그렇게 말했답니까? 지진을 만들어 달라고?”
“모르겠어, 근데 물론 그렇게는 안했겠지. 말하는 뉘앙스가 그렇게 풍기더라 뭐 그런 얘기지”
플랭크는 잠시 고민에 잠기며 턱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나라는 지금 인공 지진 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군요. 대체 왜? 누구를 상대로?”
“아마 광신도들?”
“요즘 나오는 말로는 완전히 바이러스라더군요. 숙주를 광신도로 만든데요.”
“그게 가능해? 바이러스가 생각을 조종한다?”
“저야 뭐 미생물학이 제 전공이 아니라서 모르죠. 하지만 불가능할 거라고 봐요.”
“근데 기생충들 중 일부는 그렇게 만들기도 하잖아.”
“그건 기생충이죠. 하지만 바이러스가 그런 고도 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곤 고작 숙주 단백질 내부에 DNA를 삐라처럼 뿌리고 다니는 거죠. 생각을 바뀌기 까지는 못해요. 그래서 이 가설이 조금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의심이 들어요.”
“세상만사 모르는 거지. 생물은 진화하잖아.”
“그렇다고 바이러스가 주교로 진화하진 않죠.”
“글쎄, 모든 생물은 단세포로부터 진화되어 왔는걸. 단세포 하나가 주교로 된 건 이미 실현되었어.”
플랭크는 잠시 말을 멈칫하다가 반박했다.
“바이러스 하나가 그렇게 빨리 변이하진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