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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신세계(완결)
작가 : 레일
작품등록일 : 2017.3.1

자전이 멈춘 미래. 생존의 사투와 종말에 엮인 거대한 비밀의 이야기

 
15화
작성일 : 17-03-01 18:11     조회 : 335     추천 : 0     분량 : 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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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냥에 조그마한 불이 붙었다. 불은 담배 끝으로 옮겨졌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한숨소리가 어두운 방 안에 자욱해졌다.

 리메이서는 타자기 위에 끼여진 빈 종이를 잠시 내려다봤다.

 

 “일기를 쓰라.”

 

 상담가의 말이 떠올랐다. 안경 너머에서 꿰뚫는 눈으로 바라보던, 머리 다 빠져가던 상담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일기가 아니더라도 뭐든 마음에 있는 말을 끄집어서 내뱉어보세요. 그러면 마음이 안정될 겁니다. 하루를 돌아보고 자신이 어느 우치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깨닫는 거죠. 아마 아드님께서도 살아계셨다면 환자분이 안정되기만을 기원하실 겁니다.”

 

 리메이서는 옆에 있던 비디오테이프를 옆으로 비껴두고 타자기에 손을 올렸다.

 

 ‘내 이름은 리메이서 콜린. 내가 이렇게 된 것에서는, 세상으로 뻗어나가던 내 아들이 괴한의 침입을 받고 난 후다. 하지만 이야기는 처음부터 해야겠지‘

 

 .

 

 “박사님”

 누군가 말했다. 귓가가 동굴에 들어온 것처럼 울렸다.

 

 “박사님. 괜찮으세요?”

 시야가 흐릿하게 되돌아왔다. 탁자 맞은편에 롱코트를 입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목소리는 꽤나 놀란 듯했다. 리메이서는 탁자 밑에서 촉촉이 젖은 눈망울을 뜬 채 그를 올려다봤다.

 

 “실수로 넘어지시다뇨, 오늘, 전혀 박사님답지 않으신데요?”

 

 “괜찮아. 어젯밤에 잠을 잘 못자서 그런가봐”

 

 리메이서는 반쯤 커피 잔을 줍고 의자에 앉았다.

 

 “그래. 플랭크. 어디까지 했더라.”

 

 “그러니까, 프로젝트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근데 라미온은? 안 온 건가?”

 

 “휴가 냈습니다. 어떻게 결정 나든 따르겠다고 하더군요.”

 

 리메이서는 이마에 손을 갔다댔다.

 

 “음....... 그 분은 프랑스인이라고?”

 

 “네. 근데 명성을 듣고 저희 연구소까지 오셨었죠. 저와 비슷한 나이댑니다.”

 

 “어디서 왔든, 나이가 뭐가 됐는지는 상관없어.”

 

 “리메이서 박사님, 이건 중요한 일이에요. 인체공학적으로나 인간의 역사로나 굉장한 업적이 될 거라고요. 인간 DNA를 디지털로 프로그래밍해서 컴퓨터 안에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요?”

 

 “음, 그렇긴 해”

 리메이서는 시선이 공허했다. 망설임이 극에 달한 것이다.

 

 “가능성 때문에 그러신가요? 우리 연구에선 이미 몇 달 전에는 개의 DNA까지 디지털로 구현했어요. 이젠 인간의 차례에요. 라미온과 전 유전학자로서 자신 있어요. 게다가 박사님은 안드로이드 분야에서 일인자시죠. 우리 셋이 힘을 합한다면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상상해보세요. 지금까지의 안드로이드는 ‘’인간 흉내‘에 불가했어요. 하지만 이건 달라요. 메모리칩 자체가 생명을 가지는 거니까요.”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그럴 리가요.”

 

 “그렇지만 제정은?”

 

 “이번에 발표된 국가공학투자안 아시죠? 미래 10대 투자 분야? 해양도시, 우주 식민지, 지진 조절. 등등. 지진이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 분야도 그중 하나에 들어갔어요.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우리 연구소가 신청만 한다면 제정 걱정은 싹 사라지죠.”

 

 플랭크는 리메이서를 유심히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플랭크의 휴대폰이었다. 그는 탁자 아래서 주머니에서 종이처럼 얇은 폰을 꺼냈다. 엷게 미간을 찌푸리며 ‘회의 중이야 나중에 전화해줘’ 라고 문자를 보내고 대화에 집중했다.

 

 “근데 이건, 이건 너무 위험해”

 

 “위대한 진화는 모두 위험하죠.”

 

 리메이선는 말을 멈췄다.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카페를 둘러보았다. 조잘대는 인간들의 잡음. 그들 옆에는 개인 비서로 일하는 안드로이드. 플랭크의 말에 따르면 리메이서가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는 모두 ‘가짜’ 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리메이서는 자신이 안드로이드 제품을 만들어냈지만 그녀에겐 개인용 안드로이드가 없었다. 그녀는 기계를 불신했다. 인간을 해할 수 없다는 로봇 제 3법칙도 언젠가 깨지리라 마음 깊이 믿고 있었다. 물론 소설 속의 법칙이지만,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플랭크가 의자를 당기고 앞으로 다가왔다. 어떻게든 끝장내 보겠다는 의지가 눈동자에 새겨져 있었다.

 

 “리메이서 박사님, 잘 생각해요. 이게 만약 성공 한다면 이것으로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요. 지구의 모든 상황을 똑같이 설계한 후 시계바늘만 조정하는 거죠. 그 외에도 다른 여러―”

 

 “근데 나는 거기서 왜? 유전 정보만 메모리에 지구를 만든다면 그걸로 끝이잖아. 내가 끼어들 틈은 없는 것 같은데”

 

 “우린 거기서 더 나아가서 육신을 주려고 해요. 그게 포인트죠. 지구를 설계하면 너무 거시적인 데이터라 개인은 생략 되요. 하지만 개인을 실현시키면 훨씬 분명해지죠.”

 

 “그런 건 복제로도 할 수 있잖아.”

 

 “그건 너무 불안정해요. 강제적인 배양과 불규칙한 외부 환경이 문제죠. 항상 일찍 늙고, 이상한 병 하나 얻어 와서는 픽하고 단명 해버려요. 모든 생명학자들이 인정한 한계죠. 하지만 디지털은 달라요. 이건, 이건 그야말로 ‘완벽’이죠”

 

 “저기, 음. 조금 더 생각해볼게. 미안해. 그냥, 일주일만 줘. 그러면 그때 어떻게든 답을 해줄게.”

 

 한참의 고민 끝에 그녀가 들이민 대답은 그것이었다. 플랭크는 살짝 몸을 뒤로 뺐다. 그의 입 꼬리는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표정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요. 쉽지 않은 결정일거예요. 전 기다리고 있을게요.”

 

 또다시 진동이 울렀다. 역시나 플랭크의 휴대 전화기였다.

 

 “죄송해요. 잠시”

 

 플랭크는 끝을 흐렸다. 리메이서는 짧게 미소를 띠어 보내 전화를 받는 것을 허락했다.

 

 “회의 중이라니까”

 

 너머에서 무어라고 말소리가 들려왔으나 리메이서는 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래. 알았어. 한, 10분 후면 끝날 거 같으니까 그때 다시 전화 줘”

 

 전화가 끊겼다. 리메이서가 물었다.

 

 “가족?”

 

 “아, 네 우리 집 아들이죠. 이제 다섯 살인데, 한 번 폰을 사줬더니 계속 이러네요. 실례했습니다.”

 

 “괜찮아. 애들이 다 그렇지, 그 나이 대에 사리분별 다 되면 괴물이지 괴물. 하지만 다섯에 휴대폰이라...... 너무 이른 건 아닌가 싶은데”

 

 “사실, 애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이가 홀로 남아있어야 하거든요. 저 혼자 아이를 감당은 잘 못해서 사준 거라서요,”

 

 “그런 거였으면 괜찮아. 미안해. 그 아이 이름은?”

 

 “젠시요. 젠시 제인. 뭐라도 되려는지 아주 호기심으로 똘망똘망하죠. 박사님께서도 아드님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래, 있어. 에페 콜린. 대학생이지. 요즘 보니까 한창 연애 중인 모양이야.”

 

 플랭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아드님이 두 분인가요?”

 

 “한 명이지”

 

 “제가 알기로는 그의 이름이 제이콥 콜린이라고 들었거든요.”

 

 “그것도 맞아. 남편이 그렇게 지었고, 난 에페라 하지.”

 

 “에페는 단순히 애칭인가요?”

 

 “뭐 그런 셈이지.”

 

 “그렇군요. 우리집 애도 근사한 애칭 하나 만들어야겠어요. 어쨌든, 아드님께 자랑스런 어머님이 되시려면 이번 프로젝트를 맡아주시는 게 맞지 않을까요?”

 

 “글쎄, 자랑이 될지, 창피가 될지는. 두고 봐야지.”

 

 리메이서는 고개를 떨궜다. 시선은 빈 잔에 향하고 손은 천천히 잔을 문질렀다. 잠시 틈을 둔 후, 약간 중얼거리는 듯한, 그러나 중대한 고백을 하려는 듯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언젠가 한 번 사고가 난 적이 있어”

 

 리메이서는 자세를 고쳐 앉고 죄지은 어린애마냥 플랭크를 흘긋 쳐다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에페가 어렸을 때, 내가 만든 제품이 에페를 공격했어.”

 

 “뭐라고요?”

 

 “알아. 내가 멍청했지. 내가 부주의 했던 잘못이 커”

 

 “그거 로봇 3원칙을 위반한 거 아닙니까?”

 

 “아니야. 단순히 사고였을 뿐이니까. 가정용 로봇 초기모델을 테스트 하고 있었을 때였어. 지원자가 아무도 없어서 우리 집에서 테스트 기간을 거쳐야 했지. 우리 애가 캠코더를 좋아했어. 그래서 로봇을 찍었지. 그러다가 테스트 둘째 날에 갑자기 로봇이 캠코더를 부셔버리더라고. 그 과정에서 애를, 애를 밀쳤어. 아주 살짝.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충격적인 장면이었지.”

 

 “캠코더는 왜 부셨답니까?‘

 

 “그때 에페가 마당에서 놀다가 베란다에서 들어왔거든. 로봇이 보기에 비정상적인 루트로 집으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여서 애를 침입자로 인식하고 캠코더는 무기로 오판한 거지.”

 

 “침입자라도 사람이면 공격하지 못하도록 되있지 않나요?”

 

 “요즘은 도둑 퇴치용도 환영을 받아서 말이야.”

 

 플랭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국 그 모델은 파기되었겠군요.”

 

 “AD-1 모델은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하고 파기되었지. 이후 개선해서 시중에 내놓긴 했지만 난 그 장면이 너무도 생생해.”

 

 “그래서 이 일을 망설이시는 겁니까?”

 

 리메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가가 텁텁함을 느꼈다. 목을 조금 빼고 카페를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흡연금지’ 라고 쓰여있는 경고문이 눈에 들어오자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기억하세요. 이건 C언어 알고리즘이 아니라 DNA 알고리즘임을.”

 

 바깥에서 소란소리가 들렸다. 플랭크와 리메이서 둘 다 창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도로 건너편의 회색 가로등 밑에 가공되지 않는 가죽을 걸친 듯한 누더기 복장의 늙은이가 있었다. ‘새로운 주를 맞이하라’라고 써있는 팻말을 걸고 한 손에는 확성기를 들고 외치고 있었다.

 

 “새로운 주를 맞이하라! 믿어라! 이 땅에 새로운 천국이 오심에 귀를 기울여라!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이제 더 이상 인간은 희망이 없다!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 곧 종말이 올 것이다” 오직 새 주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불이 타오르리라.

 

 “신고해야 되지 않을까요?”

 플랭크가 말했지만 리메이서는 눈썹만 추켜올렸다. 막 경찰이 출동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이미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노인은 경찰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설파했다. 하지만 경찰은 노인의 몸을 거세게 잡고 차에 머리를 밀었다. 수갑을 채우고 차에 억지로 꾸겨 넣었다.

 

 최근 들어 사이비 종교 범죄가 급격히 늘어 단속이 심화된 터였다.

 

 리메이서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정말,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 아닐는지”

 

 플랭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종말이 오더라도 발자취는 남기고 가는 게 좋지요”

 

 .

 

 리메이서는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고, 머리를 싸매다가 결국 이불을 걷고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었다. 리메이서는 휴대폰을 들고 컵에 따뜻한 물을 받은 후 창가로 나왔다. 고가의 호텔답게 도시의 야경이 휘황찬란하게 어리는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빛나진 않았지만 뿌연 달무리가 떠있었다.

 

 물 한 모금을 조심스레 삼키자 신호음이 멈췄다. 리메이서는 얼른 컵에서 입을 떼고 말했다.

 

 “여보세요? 박사님?‘

 

 “할게.”

 

 “잠깐만요, 정말요? 진심이세요?”

 

 “응”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말문이 막힌 듯 버벅거렸다.

 

 “아 아니, 그, 어.......약속 하신 날짜에 11시 50분이군요. 하, 정말 아슬아슬 하네요”

 

 안도감에 한시름을 놓은 것 같은 피식 소리가 리메이서의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안 돼?”

 

 “아뇨, 아뇨 아뇨. 당연히 아니죠. 언제나 환영이에요. 근데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일주일째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다른 분을 구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냥 그렇게 됐어.”

 

 “이유 없어요?”

 

 “응”

 

 “아무것도?”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저희들 애간장 태운거다?”

 

 리메이서의 대답은 조금 뒤에 돌아왔다. 물을 홀짝이고, 집 안으로 눈을 돌렸다. 어두침침해서 희미한 윤곽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응”

 

 “알았어요. 꼬치꼬치 묻는 것도 별로 좋진 않겠죠. 이해해줘요. 저의 나쁜 버릇이에요.”

 

 “괜찮아”

 

 “그럼, 내일 뵙기로 하죠.”

 

 “어디랬지? 너희들 스텔스 기업이라 인터넷에도 안 나와.”

 

 “저희 연구소요? 지금 문자로 주소 드릴―”

 

 그때, 묵직한 폭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리메시어는 물을 쏟았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 밖으로 푸른 야경 사이에서 거대한 불꽃이 보였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폭발물이 터지고 있었다. 한 번 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세상에, 맙소사”

 

 이윽고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음으로는 사이렌소리가 몇 초 지나지 않아 들렸다. 귀가 멍멍했다.

 

 “무슨 일이에요?”

 스피커 너머에서 목소리가 의식을 잡아주었다.

 

 “폭발이 일어난 것 같아.”

 

 “폭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갑작스레 전화가 끊겼다. 기분 나쁜 기계음만 반복되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통신 상황이 고르지 않아......”

 

 리메이서는 폰을 만지작댔지만 계속 불통이었다. 거실을 두리번댔다. TV 리모컨을 찾다가 눈에 보이지 않자 수동으로 TV를 틀었다.

 화면은 단 한 문구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새 주를 맞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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