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땅과 인간의 도시
젠시는 추돌을 반복하며 힘겹게 차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처음에는 한 줄기 희망 같은 밧줄에 매달리듯 운전대를 꽉 붙잡고 천천히 달렸다. 그러다가 점점 속도를 내며 질주했다. 머리의 피는 멈췄다. 눈가는 피멍이 들었고, 검붉었다. 핏가루가 무릎 위로 떨어졌다. 그래도 개의치 않고 도시를 뒤로 한 채, 계속 나아갔다. 해안가가 나왔다. 커다란 리조트 호텔이 지나갔을 땐 눈(雪)은 그치고 있었다.
젠시는 목적지가 없었다. 그저 달리기만 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바람 가는 길 따라, 운명을 좇았다.
보도를 넘어가 내리막길을 탔다. 그러다가 땅은 다시 평지로 돌아왔다. 지평선 위를 달렸다. 바로 옆에 유람선이 지나갔다. 한 때는 바다였던 곳. 이제는 딱딱한 자갈길로 변모해 있었다.
젠시는 차를 세웠다. 아무 이유 없이 세웠다. 차가 고장 났다거나 타이어가 모래에 빠졌다거나 해서가 아니었다. 젠시는 세울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를 찾지 못해서였음을 깨달았다.
금방이라도 울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어서 터져 나온 건 울음이 아니라 분노였다.
그는 분노했다. 주먹을 운전대에 사정없이 마구 내리쳤다. 불규칙하고 중후한 경적소리가 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혹한으로 덥힌 세상은 그 소리를 들을 리 난무했다. 울부짖는 소리도 없이 바람의 잔혹한 침묵에 휩싸였다.
“씨발!!!!!!!!”
차 안을 마구 내리쳤다. 주먹이 비껴나가 재생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난데없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랑에 관한 노래였다. 적당히 빠른 템포에 금방이라도 결혼하고 온 듯한 쾌활한 분위기였다.
“씨발! 씨발! 씨발!”
젠시는 운전대에 머리를 대고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들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벌어진 현실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괴로웠다. 그동안 너무도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무거운 마음을 꾹꾹 참으며 견뎌왔다. 하지만 이젠.
샤비가 숨을 거두었다, 약을 찾던 도중에 마지막 신음을 뱉다가 잠이 든 것이다. 젠시는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목이 멨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만, 깊이 오열할 뿐이었다. 오열은 어떻게 소리를 내야할지 모르는 외로운 바다사자의 울음소리 같았다.
노래가 중반쯤 갔을 때, 젠시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뒷좌석 문을 열고 잡동사니 더미를 뒤적거렸다. 액자를 발견하고 소매로 먼지를 닦았다. 젊은 에페와 여자 아이가 나란히 나무 아래에 누워 있었다. 에페는 눈을 감고 수영(樹影)을 만끽하고 아이는 금방이라도 키득거리며 웃을 것 같았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긴 삽을 찾아내고 문을 닫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막 얼어붙기 시작해서 날을 꽂기도 힘겨웠다.
삽이 땅에 부딪힐 때마다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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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개, 샤비가 여기서 잠 들다.’
젠시는 흐느적거리는 종이에 그렇게 적고 잘 폈다. 바람이 불었다. 종이가 바람에 날아갈 뻔한 것을 겨우 잡았다. 젠시는 돌을 줍고 종이를 돌 아래에 두었다.
무덤은 비참하리만큼 조촐했다. 언덕 같은 뭉툭한 봉우리에 돌 하나. 바람에 펄럭이는 종이쪼가리.
“초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
젠시가 말했다. 조문사가 없고, 해본 적도 없어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냥 내뱉었다.
“옆에 유람선 있으니까. 호화로운 거야. 저거 보이지? 엄청 비싸고 좋은 거다. 너 생각해서 일부로 여기까지 온 거야.”
젠시는 차가운 코를 매만졌다. 시선은 지평선을 조망하다가 무덤에 돌아왔다.
“거짓말 아니야. 정말로”
고개를 올려 창공을 쳐다봤다. 제각각 빛나는 신비로운 별들이 가득 메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서 고통을 비춰주는 찬란하게 빛나는, 자유를 향해 싸우던 역사적 영혼들 같았다.
“저것 봐, 유람선에다가 별들이라, 얼마나 낭만적이냐. 얼마나, 얼마나.......”
젠시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목이 탔다. 차에선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노래는 계속 바뀌었지만 곡조는 바뀌지 않았다. 여행갈 때 듣기 좋은 음악 베스트를 틀은 것 같았다.
무덤 위 종이의 글씨가 반대로 돌려져 있었다. 개(DOG)의 부분이 뒤집혀 있다. 참으로 재밌는 일이다. 모두가 제각각의 신이라는 에페의 말이 어쩌면 맞을 지도 몰랐다.
젠시는 오랫동안 앉아서 시간을 흘러 보냈다. 아름다운 노래에 눈을 뗄 수 없는 비경은 마음 한 컨에 미묘한 감정을 치밀어 오르게 했다. 그에게 죽음은 너무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아름다움 아래서 차츰 알아가는 중이었다.
젠시는 손을 매만졌다. 생명을 부르듯 식은 입김을 불어넣었다. 불이 필요했지만 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전구 발열을 이용할 수 있겠지만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손전등은 박살나 벙커에서 리볼버와 함께 재가 됐을 것이다.
젠시는 일어나서 삽을 들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안에 삽을 넣으려다가 오르골 위에 금고가 보였다. 에페가 보관한 누군가의 ‘유품’ 뇌리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아버지의 유품은 아닐까.
젠시는 삽을 차에 두고 금고를 가지고 앞좌석에 탔다. 무릎 위에 금고를 놓고 생각했다. 비밀번호는 그간에 많은 번호를 넣었지만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8개의 숫자조합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였다. 우연히 맞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이번은 달랐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따랐다.
젠시는 자기 생년, 생월, 생일을 입력했다.
딸각거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위로 튀어 올랐다. 젠시는 금고를 열었다. 안에는 책 한 권 분량의 종이들이 들어있었다. 누군가의 일기로 보였다. 한 장을 들어 올려 찬찬히 글자를 더듬었다.
‘내 이름은 리메이서 콜린. 이렇게 된 것에서는, 세상으로 뻗어나가던 내 아들이 괴한의 침입을 받고 난 후다. 하지만 이야기는 처음부터 해야겠지‘
꾹꾹 눌러쓴 글씨체. 분명히 어디서 본 적 있는 글씨체였다. L-16 비디오테이프에 붙여 있던 메모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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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한복판에서 저 멀리 거대한 철로가 보였다. 젠시는 철로를 따라 달렸다.
차의 기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계기판이 고장나 있었다. 어쩌면 당장에 꺼질 수도, 며칠 갈 수도 있었다.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저 달리기만 했다.
희망이 없었다. 추위가 너무 심했다. 벙커가 사라진 지금,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메마른 바다는 점점 내려갔다. 낮게 뜬 달은 대지에 반쯤 걸쳐 있었다. 여명이 찾아왔다. 이제 곧 해가 뜰 것이다.
지루한 풍경은 계속 갔다. 끝없는 광야에서, 철로 위에 주차했다. 부디 유토피아호의 누군가 발견해 주길.
젠시는 차를 철도 위에서 세웠다. 그리곤 방독면을 빼서 머리에 씌고, 난방을 틀었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무 졸렸다. 의식이 터널 속으로 달리는 것 같았다.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생각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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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시는 눈을 떴다. 눈동자에 빛이 찾아왔다.
해가 떠있었다. 새 시대의 아침 새벽이 왔다. 강철에 반사되는 빛에 눈이 부셨다. 젠시는 미간을 찌푸리고 손으로 빛을 가렸다. 거대한 열차가 바로 앞에 있었다.
열차 머리의 출입문이 열렸다. 머리숱이 없는 남자가 내렸다. 두꺼운 옷을 입고 손전등을 비추고 있었다.
그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얼어디지게 춥군”
그는 또 말했다.
“거기 누구요?”
젠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방독면을 벗고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봤다.
“젠시? 젠시 제인?”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앞유리 너머를 뚫어져라 쳐다보느라 몸을 움직이면서도 고개를 고정했다.
“이럴수가, 정말 젠시가 맞군. 정말로 살아있었다니”
그가 달려왔다. 젠시는 문을 열고 나갔다. 다리를 절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젠시에게 포옹을 했다. 젠시는 천천히 남자의 등에 손을 올렸다.
“빨리 돌아가자고, 우린 서로 이야기 할 게 너무 많아”
“이건 환상인가요?”
“난 진짜라네”
“정말로 살아있는 인간인가요?”
“그래. 내 목소리와 손이 느껴지지 않는가?”
“어떻게 된 거죠?”
젠시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머릿속 기억을 더듬거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남자는 팔을 풀고 젠시 얼굴을 다시 확인 했다.
“내 딸이, 내 딸이 자네를 구하려고 승객 모두를 설득했다네. 낮을 건네자고.”
“그렇군요.”
“자네에게 미안하네. 내가 널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자네 말대로 미친 할망구가 에헴, 미안하네. 그러니까 오페밀러씨가 위조했던 거였더군. 그 당시 화재 소동을 틈타 만들었던 모양이야. 정말 미안해.”
“전 괜찮아요.”
젠시의 말투는 너무 차분했다.
새벽바람이 뺨을 때렸다.
“젠장, 너무 춥군. 어서 빨리 들어감세.”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문을 열고 닫았다. 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내부를 밝혔다. 창문은 없었고, 크고 기다란 물체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공간은 어둠이었다.
“젠장”
남자가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자네를 찾으려고 연료를 두 배로 써야했지. 덕분에 전기가 자꾸 나가는군. 아깐 괜찮았는데. 기다리게, 곧 불이 다시......”
그는 벽을 짚으며 허둥지둥 위층으로 올라갔다. 젠시는 가만히 서있었다. 어떤 감정도 그를 대변해 주지 못했지만 몇 가지는 확실했다. 너무 허무하고 힘이 빠질 것 같다. 심지어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손이 꽁꽁 얼어 숨을 불어놓다가 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무언가 잡혔다. 젠시는 그것을 집어 눈앞에 가져다댔다.
가느다랗고 한쪽 끝이 뭉툭한 방울뱀 같은 성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