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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신세계(완결)
작가 : 레일
작품등록일 : 2017.3.1

자전이 멈춘 미래. 생존의 사투와 종말에 엮인 거대한 비밀의 이야기

 
11화
작성일 : 17-03-01 17:56     조회 : 313     추천 : 0     분량 : 6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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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젠시”

 

 에페가 운전대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아, 네?”

 

 “왜 그래?”

 

 “그냥, 그냥 잠을 좀 못 잤어요.”

 

 젠시는 눈을 비볐다. 도심 속엔 유령의 안개가 피어올라 있었다.

 알 수 없다. 자신이 대체 무얼 하고 있는지.

 

 “불면증인가?”

 

 “그건 아니지만, 비슷한 거라고 해두죠”

 

 “비슷한 거라.”

 

 한동안은 말없이 달렸다. 차는 도시 외곽의 해안가 만에서 멈춰 섰다. 해안선에는 바다가 말라버린 황야가 있었다. 1시 방향에는 유람선은 옆으로 누운 채 쓰러져 있다.

 

 “내가 신호하면 나와라”

 에페는 차에서 내려 산탄총을 들고 사냥을 나갔다. 홀로 남은 젠시는 그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젠시는 차문애 손을 올려둔 채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다리는 준비 자세를 취하는 육상선수마냥 둥둥거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아주 멀리. 그가 없는 곳으로. 초조함이 차갑게 심장을 그을렸다. 마치 자신을 언제 죽일지 모르는 살인자와 동거하는 이 느낌, 대체 저 자는 누구란 말인가. 대체.

 

 젠시는 차문을 열고 나왔다. 찬바람이 그를 찔렀다. 날이 더더욱 추워지고 있었다. 이 날이 가장 추운 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 정도의 추위를 맞아 본 적은 꿈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느리게 걷다가 점점 걸음이 빨라지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 정한 목적지는 없었다. 그냥, 에페가 갔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한참을 갔다. 망치로 두들기는 것같이 머릿속이 쾅쾅울렸다. 도중에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스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Y자형 삼거리에서 멈춰 섰다. 앞에 웬 방울뱀이 나타났다. 벽에 딱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방울뱀이 아니다. 호화스레 생긴 건물의 네온사인이다. 열차서 낙오된 그 날 이후의 첫 재회였다.

 

 ‘길을 찾으라’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눈을 비볐다.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벌레라도 본 듯 마구 머리를 헝클어트린 후 다시 바라봤다. 그러나 방울뱀은 사라지지 않았다. 글자만 바뀌었을 뿐이다.

 

 ‘새벽이 온다.’

 

 참으로 기괴했다. 이럴 수 있을까. 실제로?

 젠시는 문을 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운동장 크기만한 넓은 술집이 나왔다. 거대한 원을 따라 그리는 암갈색 외벽. 바닥에는 대각선 유리 타일, 그 안에는 진주를 모방한 싸구려 구슬이. 주인 잃은 거미집이 모서리 곳곳에 있었고 탁자와 의자는 먼지에 덮인 채 쓰러져 있다. 홀 왼편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무대 위에 올라와 있다. 정 가운데애는 등이 깨진 샹들리에가 허공에 떠있다. 그 아래는 각종 술이 진열된 프론트가 보였다.

 

 그리고 그 프로트 안에는.......사람이 서있었다. 탁자에 손을 올린 채. 불그스레한 볼, 약간 통통하게 살이 올라온 배. 불처럼 붉은 재킷과 하얀 블라우스엔 먼지 한 점 없이 말끔해 주변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깃이 반듯하게 접혀있어 비싼 레스토랑의 종업원에서 두 탕 뛰는 사람 같았다.

 

 “어서오십시오.”

 작은 메아리.

 

 더 놀랐던 것은 젠시, 자기 자신의 반응이었다. 화들짝 놀라는 기색도, 주춤거림도 없었다. 오히려 늘상 있던 일인마냥 행동했다. 꿈에서 몸이 날아올라도 위심하지 않듯, 이 기괴한 일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젠시는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를 갖추고 구둣발을 뚜벅거리며 앞으로 다가갔다. 구둣발소리가 홀 안에서 텅텅거렸다.

 

 젠시는 바텐더 앞에 앉아 한쪽 입 꼬리를 올리고 앞으로 기댔다.

 

 “안녕하세요.”

 메아리.

 

 바텐더에게서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라벤더 향이 주변의 술 냄새를 감출만큼 강했다. 그렇지만 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적당한 선을 알고 있었다.

 

 “여기 장사 잘 되요?”

 젠시가 물었다. 그러자 바텐더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부드러이 말했다.

 

 “물론이죠.”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왼편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재즈풍의 피아노곡이다. 웅성임도 들렸다.

 젠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피아노 의자엔 나비넥타이 정장에 머리가 뻗친 남성이 찬찬히 건반을 두들겼고, 탁자마다 서로를 마주보며 잡담하는 손님들로 가득 차있다. 그들 각자는 현대 귀족들처럼 멋지게 치장한 채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뭘로 하실 겁니까?”

 

 “고를 수 있나요?”

 

 “뭐든요.”

 

 젠시의 얼굴에 환희가 피어오르고 옳거니, 하며 탁자를 한 번 두들겼다. 그리곤 말했다. 각 단어마다 영혼을 담아가며

 

 “오늘 점심 메뉴를 선택할 수 없다면, 자유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옳으신 말씀이군요.”

 

 “내 아버지의 말씀이었어요.”

 

 “그렇군요. 자유를 얻으셨나요?”

 

 젠시는 입 꼬리를 내리고 쩝, 소리를 내며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유는 얻었지만 다가갈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뭐랄까. 겉에 있어도 잡을 수 없는 느낌이죠.”

 

 “별처럼요?”

 

 바텐더의 답에 젠시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네, 별처럼. 그런데 여긴 뭐가 좋죠?”

 

 “뭐든 좋지요. 오늘 추천을 뽑는다면 진 앤 토닉 정도가 괜찮겠군요. 그 중에서도 싱가폴 슬링.”

 

 “그럼 그걸로 해요.”

 

 “그러죠”

 

 바텐더는 탁자 아래서 재료를 꺼내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중단하지 않았다.

 

 “상가폴 슬링. 싱가포르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그리고 일본에게 지배당했었죠.”

 

 “그런가요?”

 

 “그 후 독립은 하게 되지만 단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말레이시아와 합병을 할 것인가 분리 독립을 할 것인가. 이 사안을 국민투표로 부치게 되고 합병 찬성으로 나왔지만 일부 극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때문에 결국은 반강제로 독립을 하게 되죠.”

 

 바텐더는 잔을 내밀었다. 안에는 칵테일이 붉게 빛나고 빨대가 중간쯤에서 둥둥 떠 있다.

 

 “자유를 자유로서 쟁취하지 못한 겁니다.”

 

 젠시는 빨대를 빼고 한 모금 홀짝였다. 짜릿했다. 목구멍으로 넘기는 즉시 목가가 살짝 허했다.

 

 “그러고 보니, 손님을 보자는 분이 있습니다.”

 

 바텐더가 말했다. 젠시는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그게 누구죠?”

 

 “그 손님이 말하길, 보내준 에펠탑 사진을 잘 봤다고 하더군요.”

 

 모호한 힌트였지만 그게 누군지 알아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르요?”

 

 바텐더는 답하지 않았다. 잔을 더 채워주고 건넬 뿐이다.

 

 “여기 있다고요?”

 

 반대편에서 바텐더를 부르는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낮은 음성, 바닐라처럼 부드럽고 잔잔한 파도가 굳어진 얼음같이 어른스러운 목소리. 바텐더는 짧게 대답 한 후 그쪽으로 갔다. 젠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보려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곧장 머릿속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라르의 얼굴이 보였다. 새하얀 얼굴, 귀로 넘긴 갈색의 긴 머리. 젠시가 처음 봤을 적엔 단발이었지만 어느덧 길게 자라있었다. 그녀의 눈은 달빛 같은 옥색으로 빛났다. 몇 년을 볼 수 없었던 눈빛이지만, 기억 속에서 생생했다. 죄책감 때문인지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젠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시선은 그녀에게서 떼지 않은 채로 곧장 걸어갔다. 피로 이어진 인연을 향해.

 

 “안녕?”

 젠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탁자 위에는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잔이 있었다. 내육이 드러난 레몬 반쪽과 소품용 우산이 꼽혀 있다. 라르는 말없이 웃다가 옆자리를 내주었다. 젠시는 거기에 앉았다. 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눈동자만을 응시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넌 열차에 있어야 하잖아.”

 

 “오빠를 보러 왔어”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건 오빠만이 알지”

 

 “난 이해가 안 가”

 

 “걱정하지 마. 원래 이해되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쪽 상황은 어때?”

 

 “내 상황?”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어. 난......”

 

 젠시는 라르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휘저었다. 계속 말을 이어보라는 신호였다.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나는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여태까지는 단순히 재수 없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젠 힘들어. 너무 힘들어. 끔찍하고 고통스러워. 이건, 불지옥에 억지로 밀어놓은 것 같잖아.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 첫 날은 다리를 접질린 채에서 장정 1킬로를 뛰어야 했어. 둘째 날은? 폐병원에서 돌아다니다가, 썩어가는 시체를 봤어. 그리곤 아무것도 안 보이는 곳에서 늑대 두 마리와 싸워야 했지.”

 

 젠시는 목이 메인 듯 간절하게 자기 잔을 들이켰다. 꿀꺽 삼킨 후 몸을 좀 더 앞으로 내밀고 말을 이었다.

 

 “이후엔 에페라는 사람을 만났어. 자기가 그 도시의 마지막 생존자라나 최후의 생존자라나, 여튼, 그랬어.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서운 사실이야. 홀로 살아남았다고. 그게 뭘 뜻하겠어? 아아, 또 있어. 그 사람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속이고 있어.”

 

 “어떻게?”

 

 “우선은 이름을 숨겼어.”

 

 “그리고?”

 

 젠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어.”

 

 라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입 밖으로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입모양은 그게 사실이야?를 말하고 있었다.

 

 “내 말이.”

 

 “어떻게 그게 가능해?”

 

 “나도 모르겠어. 전혀, 전혀 모르겠어.”

 

 “죽은 게 확실해?”

 

 “아주 확실한 증거가 있어.”

 

 “그 사람한테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볼 순 없는 거야?”

 

 “장난으로 한 소리지? 응? 그 사람한테 가서 ‘실례지만, 당신 이미 죽지 않았어요? 여기 증거가 있어요. 봐요, 죽었네요? 하하’ 이런다고? 기가 찰 정도로 소름끼치네. 넌 할 수 있을 것 같아?”

 

 “과연, 그렇구나. 근데 말이야. 이건 조금 과하겠다 싶지만, 그가 사이코패스 살인마일 가능성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게 그거야. 그가 살인마일 수도 있어. 생존자들이 단체로 방위기지에 갔던 날 혼자 살아남아 돌아왔다는 것도 수상하고. 벙커를 뺏으러 그 사람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어. 얼굴이 닮은 건,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젠시는 에페가 늑대고기를 썰던 모습이 떠올랐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라르는 그 손을 잡아주었다.

 

 “그래서 여기로 도망쳐왔구나.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젠시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지 홀 안은 어수선했다. 겉치레 미소와 절망과 우울이 어우러진 홀 안을, 젠시는 정처 없이 두리번거렸다.

 

 “이거 진짜 현실이지?”

 

 그러자 라르는 젠시의 뺨을 어루만진 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앞을 가렸다.

 

 “당연하지. 내 손이 느껴져? 칵테일과 음악소리는? 황홀을 느껴봐.”

 

 젠시는 조금 몸을 빼고 말했다. 라르는 손을 내렸다.

 

 “그쪽은 어때? 네 얘기가 듣고 싶어.”

 젠시가 말했다.

 

 “열차? 아니면 나?”

 

 “너, 몸은 어때? 다 나은 거야?”

 

 “그렇지 않으면 여기 있게?”

 

 “하긴”

 

 “내 몸엔 오빠의 피가 흘러.”

 

 “뱀파이어냐, 그런 말하게?”

 

 “뱀파이어 몸에도 피가 흘러?”

 

 “그건 모르겠는데 네가 하는 말이 딱 그렇다고. 뱀파이어, 내 피 빨아 먹고 사는 존재”

 

 “어쩔 수 없잖아. 오빠 피는 맛있는데”

 

 그녀는 장난조다. 몸을 비틀면서, 고양이 같은 손으로 콱, 할퀴는 시늉을 한다. 유혹하려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연상된다.

 

 “마그네슘 많이 먹으면 설사 한다더라”

 

 “에에, 더럽게.”

 

 젠시는 낄낄댔다. 라르는 입을 가리며 웃다가 한 모금을 들이켜 목을 축였다.

 

 “난 오빠 없이는 못 살아.”

 

 사실이었다. 젠시는 늘 그런 사실을 인지해왔다. 그것은 지극히 객관적이고 의학적인 사실이다 논점은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도 없었다.

 

 “내가 없으면 넌 죽지”

 

 “그 날, 기억나?”

 

 “그 날?”

 

 “사고 난 날.”

 

 젠시는 곧장 떠올렸다. 또다시 죄책감이 옥죄었다. 칼날 같은 의무감이, 목 위에 올라간 느낌이었다. 그 날을 떠올리면 냉풍보다 더 서늘하다. 죽음을 잘 아는 사람처럼.

 

 “어렴풋할 뿐이야.”

 

 “그 날 이후였어. 내가 이렇게 된 건.”

 

 “미안해. 그건 미안해.”

 

 “오빠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이미 다 지난 일이니까.”

 

 “난 널 지키기 위해, 살리기 위해 뭐든 할 거야.”

 

 “날?”

 

 “그래”

 

 라르는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그건 좋아. 하지만 우리 전체를 봐줘.”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엄마, 필라 언니, 블랙 오빠, 헨드 오빠, 호메르스 아저씨. 우리 전체를 봐줘. 유토피아호 전체로 눈을 돌려줘.”

 

 “알았어.”

 

 “우리의 마지막 보금자리니까”

 

 “알았어.”

 

 “우리를 지켜줘. 그래 줄 수 있지?”

 

 젠시는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노곡은 어느새 막바지에 돌입하고 있었다. 여느 재즈곡과는 다르게 끝을 달리면서 격렬해지고 빨라지고 있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된다면 하루 종일도 얘기하고 싶어.”

 

 “아무래도 그럴 순 없을 것 같아.”

 

 “왜?”

 

 “그가 점점 다가와”

 

 “젠장.”

 

 “마지막으로 더 이상한 건 없어?”

 

 젠시는 잠시 입을 닫은 채 가만히 있었다.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잔을 쭉 들이켰다. 마음 한 컨에 보자기에 숨겨진,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빼먹은 듯한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서 그 보자기를 치워야 한다. 젠시는 눈을 굴렀다. 시선은 허공을 떠돌다가 바텐더에 고정했다. 그는 진열대 한 컨에 놓인 증기기관차 모형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에페가 왜 날 살려줬는지 알아?”

 

 “왜?”

 

 “유토피아호로 데려다 달라고”

 

 “에페가, 유토피아호에 데려다 달라고 했어?”

 

 고개를 끄덕.

 

 “대체 왜?”

 

 “모르겠어. 그땐 너무 정신이 없었단 말이야. 총으로 위협했다고.”

 

 “그리고 오빤 그걸 허락한 거야?”

 

 젠시는 헉하고 입을 벌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왜 여태까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

 

 “오빠, 정말 허락한 거야? 정말로? 그 사이코패스를 여기로 불러들인다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말도 안 돼. 그는 우릴 죽일 거야. 열차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한테 한 짓을 잊었어? 창문을 깨려 했다고.”

 

 “그는 자기 자신을 신으로 알아. 요전번의 그 노인 말이 맞아. 그 또한 광신도나 마찬가지야. 그 빌어먹을 광신도들.”

 

 “오빠, 우릴 구해줘. 그가 오지 못하도록 해줘. 그리고 거기서 도망쳐 나와.”

 

 젠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선 채로 잔을 한 번에 쭉 들이켜 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곤 읊조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젠시는 밖으로 걸어갔고, 그가 남기고 간 잔의 동그란 밑면이 출렁거렸다.

 

 .

 

 스마일 마크가 새겨진 문손잡이의 동그란 정면이 떠올랐다. ‘탈출용 도끼(Crash Axe)’ 라고 써진 도끼날이 그 손잡이의 목을 벴다. 금속이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젠시는 도끼를 몇 번 더 휘둘렀다. 날은 문 반대편까지 꿰뚫었고, 손잡이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비밀의 문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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