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젠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침대 위에 앉아서 탄창이 빈 리볼버를 만지작거렸다.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였지만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의식 저 너머에서 눕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어쩌면 초조함이 속삭이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조용히, 내 목소리를 들어봐’
낄낄거리는 소리, 잡담하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렀다.
젠시는 그에 맞춰 혼자서 낄낄거리다 울기를 반복했다.
3시간 후,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에 젠시는 눈을 떴다. 손은 총을 쥔 채 였다.
어김없이 시리얼을 찾아 창고로 향하고, 주린 배를 채웠다. 허전한 느낌이었다. 거실에서 서랍에 있는 비디오를 모두 꺼내 두세 번은 돌렸다.
어째서인지 어제 장면 외에는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교묘히 편집된 건 아닌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짧은 순간의 인생장면이라 해도 이름 한 번은 나올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젠시는 L-7을 틀고 문제의 장면에서 화면을 멈추고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이 지치자 정신도 따라 지친 모양인지 점점 확신이 떨어졌다. 내가 과대망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에페가 이름을 잘못 쓴 것일 수도 있고, 같은 학급의 다른 아이의 설문지를 위에 꺼냈을 뿐일 수도 있다. 물론 말이 안 되긴 하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다.
젠시는 비디오를 제자리에 넣으려다가 서랍 안쪽 면을 의시했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허리춤에서 손전등을 꺼내 빛을 비추었다.
안쪽 면과 옆면이 미묘하게 색과 무늬가 달랐다. 부서진 부분을 다른 목재로 붙여 놓은 것처럼.
서랍 안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그었다.
순간, 작은 틈을 발견했다. 젠시는 틈에 손톱을 집어넣고 잡아당겼다. 덜컹거리며 나무판자가 갈라졌다. 아주 좁은 공간에 비디오 하나가 있었다.
‘L-16’
심장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테이프를 집었다. 마지막 테이프가 분명히 L-15였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 후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검지에 거친 표면이 느껴졌다. 뒤집어보니 작은 메모가 테이프로 붙여있었다. 각을 세운 듯 정확하고 간격이 좁은 글씨체였다. 어린애가 어른이 쓴 글씨체를 흉내낸 듯한 글씨체.
분명히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누구였더라.
‘미안하구나. 난 너의 인생이 계속 되길 바라. 나를 용서해 줘’
젠시는 그 비디오를 재생시키고 뒤로 물러섰다. 화면에 섬광이 살짝 인 후 음성이 나왔다.
“화면 나와요?”
에페의 딸, 아울이 정면을 보고 말했다. 아울은 이제 막 언어를 배운 것처럼, 아이를 소중히 다루듯 또박또박한 목소리였다. 화면이 살짝 흔들리다가 고정됐다.
“그래”
화면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에페였다. 그들은 집 거실에 있었다. 아울 뒤에는 괘종시계가 조용히 초를 세고 있었다.
에페가 옆에서 등장하고 카메라 화면을 확인하며 손으로 만지작댔다. 균형이 맞춰지자 뒤돌아서 아울 앞에 앉았다.
“내일이 학예회입니다.. 보려 오실 건가요?”
“당연히, 완전히. 보러 갈게. 다시 약속할까?”
아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페는 미소를 머금으며 아울의 손가락에 약속 도장을 찍어주었다.
“그럼, 제 춤을 보실 준비가 되셨나요?”
“응”
아울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오디오 버튼을 눌렀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서 준비자세로 멈췄다. 차가우면서도 냇물흐르듯 부드러운 바이올린 음악이 흘러나오자 몸을 움직였다. 부드럽게 팔을 벌리고 다리 한 짝을 올린 채 제자리에서 돌았다. 젠시는 언젠가 비슷한 동작을 본 적이 있었다. 발레였다. 그녀는 발레를 막 배우기 시작하고 때마침 학예회 때 그 특기를 살리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음악을 방해했다. 묵직한 노크소리도 가세했다. 에페가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쳐다봤다. 그리고 아울에게 정중히 말했다.
“아울, 아울. 미안해. 손님이 왔어. 잠시만 멈춰줄래?”
“안 돼요.”
“잠시, 잠시만이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올게.”
.
아울은 동작을 멈추고 풀이 죽은 채 앉았다.
“알았어요.”
그제야 에페는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측면에 허둥지둥 나서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세요?”
“제이콥씨?”
그때 에페는 망치로 두드려 맞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이콥이라고? 그러고 보니 이름 칸에 쓰여진 철자도 J로 시작했었다.
“네, 접니다. 누구시죠?”
“IRS(국세청)에서 왔습니다. 문 좀 열어 보시죠?”
“무슨 일이신데요?”
“귀하께서 탈세 의혹이 있고, 거듭 이메일을 보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직접 찾아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실래요?”
“탈세요?
“그렇습니다”
“그런 적 없는데요?”
“그럼 일단 그 증명을 위해 문을 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에페 혹은 제이콥은 뜸을 들이다가 방문자가 의심스러웠는지 문 걸쇠를 걸고 열어주었다.
갑작스럽게 바람 빠지는 듯한 폭음이 났다. 검은 옷에 검은 중절모를 쓴 방문자가 문틈에 지렛대를 끼어두고 걸쇠에 권총을 쏜 것이었다. 걸쇠는 반으로 잘려 아래로 처졌다. 이어서 총부리가 문틈에서 두 번 더 발사되었다. 에페는 최대한 문을 밀었다. 팔에 피가 흘렀다.
“아울, 도망쳐!”
그러나 방문자는 이미 지렛대를 세워둔 상태인지라 에페의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에페는 뒤로 물러서다 가슴에 총을 맞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바닥에 수도꼭지를 튼 듯 선혈이 쏟아졌다. 중절모의 남자는 쓰러진 에페를 발로 툭, 건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남자는 에페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확인 사살했다.
아울은 제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비명을 지르다 울음을 터뜨렸다. 가여운 여자아이는 무기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 끔찍한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남자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냉시하며 최대한 절제된 동작으로 소음기를 단 권총을 들고 레버를 당겨 장전했다.
이어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한 번 더 진동했다. 혈우가 사방에 튀었다.
이어서 한 발 더.
확인사살.
그리곤 카메라가 고장 나면서 꺼졌다.
젠시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 끔찍한 말살은 둘째치더라도 한 가지 의구심이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혔다.
지금 살아있는 에페는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