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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신세계(완결)
작가 : 레일
작품등록일 : 2017.3.1

자전이 멈춘 미래. 생존의 사투와 종말에 엮인 거대한 비밀의 이야기

 
9화
작성일 : 17-03-01 17:54     조회 : 318     추천 : 0     분량 : 5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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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한동안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창 너머를 응시했다. 언덕에서처럼 눈에 잡히는 건 없었다. 고개를 돌려 조수석 창문에 고개를 돌렸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시는 침을 삼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손은 총을 꽉 잡았다. 생명을 붙들 듯, 절대로 놓치지 않을 정도로. 손을 바꿔 쥐고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전후좌우를 살폈다. 무너진 도심 속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때 멀리서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에페와 처음만났을 때 차 안에서 들었던 그 울음소리였다. 그게 이름이 뭐였더라.

 

 젠시는 발걸음을 쉽사리 뗄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자칫하면 목숨이 바람 날리듯 사라질 것 같았다. 대신 제자리에서 공기치기를 당기고 (그는 딸각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 바퀴를 더 돌았다. 허리케인을 직격으로 받아 거의 다 쓰러져가는 건물, 회색 콘크리트 더미. 글자가 지워진 간판들, 전선이 삐죽 튀어나와있는 깨진 전광판.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제법 가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이름이. 윙이었다. 젠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바닥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마치 빛이 비치는 것처럼

 

 소리는 위에서 났다. 젠시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날개달린 거대한 짐승이 거기 있었다. 날개가 반쯤 접혀있는데도 대략 지름이 1미터는 되어 보였다. 바로 거기, 박쥐의 머리를 한 놈의 배는 빨간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이 내리쏘았다.

 

 젠시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실눈을 뜨고 겨우겨우 총부리를 윙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발사되지 않았다. 심장이 출렁했다. 뒷걸음질 쳤다. 윙은 점점 다가오고, 젠시는 발사되지 않는 총으로 연사했다.

 

 날개바람이 스쳐지나갔다. 몸을 옆으로 던졌다. 뒤에서 차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합차는 검은 연기가 나며 불에 타올랐다. 젠시는 죽음 힘을 다해 마트 안으로 포복했다. 그리고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에페!”

 

 두어 번은 더 반복했다. 잠시 후 그가 서두르며 나왔다. 에페는 젠시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뭐야?”

 

 “바깥에 윙이 있어요!.”

 

 “대체 뭔 소리야?”

 

 “괴물이 있다고요”

 

 에페는 재빠르게 걸었다. 젠시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갔다.

 

 “가지 마요. 바깥에는......”

 

 젠시는 에페가 하늘을 쳐다보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쯤이면 그 괴물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기를 찾아 처리할 방법을 몰두하겠지. 하지만 에페가 다음 한 말은 그렇지 않았다.

 

 “일어나. 바깥은 아무것도 없어. 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가버린 걸까, 젠시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차가”

 

 “차가 뭐?”

 

 젠시는 방금 전까지 폭발에 그을린 차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 끝에 마주한 것은 평온한, 단지 시동이 걸려 부르르 떨고 있는 차였다. 앞문은 열려 있었다. 하지만 자욱한 연기라던가, 폭열, 불은 없었다. 마치 시간여행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괴상한 일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분명히 아까 괴물이 공격해서 폭발했는데”

 

 에페는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빨간 버튼을 눌렀다. 온풍이 꺼졌다.

 

 “난방은 틀지 마. 오염됐으니까.”

 

 .

 

 젠시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번에도 꿈은 꿨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어디론가로 사라지는 것처럼.

 

 젠시는 얼굴을 손에 감쌌다. 힘이 쑥 빠진다. 정신머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늘 뭔가 놓친 게 있는 느낌이고 혀가 잘려 말을 못하는 짐승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환영을 접했던 날로부터 며칠이 더 지났는데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한숨을 쉰 후,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기계 가동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간단히 얼굴을 씻고, 창고로 가서 먹을 것을 찾아 뒤졌다.

 상자에서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내용물은 반쯤 비어져 있었다. 갈색 상표가 보였다.

 

 ‘땅콩버터’

 

 젠시는 뚱한 눈으로 유리병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식물성 뭐시기, 못 먹는다 하지 않았나?”

 

 전방에 놓인 뜯지 않는 상자들에 시선을 훑었고, 다시 땅콩버터로 돌아왔다. 병을 도로 집어넣고 발걸음을 돌리려다가 돌아와 다시 땅콩버터를 집어 들었다. 어제 먹다 남은 시리얼도 폼에 안겼다.

 

 샤비가 있는 방으로 갔다. 목줄을 풀어주고 거실에 나와 유리그릇에 시리얼을 나눠주었다. 샤비는 그릇에 시리얼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을 가져다 댔다. 젠시는 샤비 바로 옆에 앉았다. 그제야 혀를 되찾은 듯 평안해졌다. 입을 열고 마음껏 혀를 사용했다.

 

 “어제 왜 그렇게 짖은 거야? 배라도 고팠나, 응?”

 

 아이의 몸을 씻기듯 털을 크게 쓰다듬었다. 쫑긋 세운 귀를 만졌다. 부드러운 촉각이 느껴졌다.

 

 “자는 사람을 깨워서야......”

 

 젠시는 자기 그릇에 담긴 버터 바른 시리얼을 입에 넣고 우걱거렸다.

 

 “그러면 안 돼. 사람 잘 땐 짖지 말라고”

 

 .

 

 젠시는 거실에 나와 서랍에서 VHS 비디오 하나를 꺼냈다. ‘L-7’ 대사를 통째로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수십 번은 더 돌려보던 것이었다.

 

 그가 매번 느끼는 거지만, 재생기 가동음이 너무 과도했다. 바퀴 회전소리와 거기에 버무린 둔탁한 중저음의 연속은 자를 책상에 대고 튕기는 소리 같았다.

 

 “그걸 틀어 놓을 거니?”

 

 화면 속에서 선생이 말했다. 에페는 초등학생 저학년 즈음 되어보였다. 선생과 에페는 어느 교실에서 탁상을 사이에 두고 상담 중이었다. 젠시는 이 둘이 첫 만남으로 때인 것으로 추정했다. 탁상에는 어떤 흰 메모지가 있었다. 칸을 복잡하게 그어져 있고, 거기에 맞게 채워져 있었다.

 

 “네. 찍고 싶어서요. 혹시 찍히기 싫으신가요?”

 

 “아니, 아냐. 괜찮아. 그냥 찍을 만한 건가 싶어서.”

 

 “전 모든 걸 찍어요. 새, 나무, 사람”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혹시 찍게 된 계기가 있니?”

 

 “순간을 남기고 싶어요.”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놀란다.

 

 “세상에나,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거니?”

 

 “흐음........ 모르겠어요. 텔레비전 광고인지도 몰라요.”

 

 순간, 젠시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뭐야?”

 

 젠시는 급히 화면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되감았다. 다시 재생시켰다. 화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시선은 메모지에 고정했다.

 

 “네. 찍고 싶어서요. 혹시 찍히기 싫으신가요?”

 

 “아니 아냐, 아냐. 괜찮아. 그냥 찍을 만한 건가 싶어서.”

 

 젠시는 화면을 멈췄다. 메모지가 가장 가까이,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이었다.

 글씨가 너무 엉망이었다. 장래희망 칸을 제외한 다른 란에는 거의 못 알아 볼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내가 왜 여태 이걸 못 봤지?”

 

 에페 콜린(epe colin)라고 써져 있어야할 이름 칸에 쓰여진 단어가 너무 길었다. 몇 자가 더 쓰여 있었다. 게다가 첫 알파벳이 J였다.

 

 젠시는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집에 침입한 도둑처럼 급하게 서랍에 있는 비디오를 모두 꺼냈다. 첫 번째 비디오부터 차례로 돌려보았다. 그 어디에도 어느 화면에도, 어느 장면에서도 이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결혼식 테이프만을 남겨뒀을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날 저녁이었다. 젠시의 접시에는 각지 다른 통조림 세 개를 섞어 만든 옥수수 샐러드가 담겨져 있었지만, 그는 입맛이 나지 않았다. 에페는 평소와 같았다. 그저 날이 점점 더 추워지는 것에 적응할 뿐이었다.

 

 “에페”

 

 에페는 고기를 입에 넣고 쳐다봤다. 젠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형제 있어요?”

 

 “형제가 있냐고?”

 

 “네. 닮은 형제. 쌍둥이라던가”

 

 젠시는 마음을 졸았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에페는 고기를 입에 넣었다.

 

 “없는 것 같군”

 

 젠시는 그 말에 유의했다.

 ‘없는 것 같다? 없으면 없는 거지, 없는 것 같다는 뭘까.’

 

 “넌 있나?”

 

 “아뇨”

 

 “근데 형제는 왜?”

 

 “그냥요”

 젠시는 얼버무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햄에 시선을 고정했다. 에페의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조용히, 고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젠시는 에페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젠시는 괜히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 후회했다. 이제라도 화제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페”

 

 “왜?”

 

 “신을 믿나요?”

 

 “신을 믿냐고?”

 

 “네”

 

 에페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굴렀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건 왜 묻는 거냐?”

 

 “그냥요”

 거짓말이었다. 광신도는 열차를 타지 못한다. 선별했던 기준도 우선적으로 광신도였는가를 따졌다. 그가 광신도라면,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믿어”

 

 순긴 마은 깊은 곳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금쯤 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 구운 늑대고기나 먹고, 날짜 지난 햄이나 쩝쩝대고 계시는군.”

 

 “우리요?”

 

 “그래.”

 

 “우린 신이 아니에요”

 

 “우린 이 세상에 홀로 남았어. 지금 당장 증권거래소에 가서 불을 질러도, 은행에서 금고를 따도, 사람 한 명쯤 죽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 여기선 무엇도 할 수 있어. 이게 전지전능하신 신이 아니고 뭐겠어?”

 

 “그건 전지전능이 아니에요. 신이라면 예컨대 어, 죽은 목숨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고요”

 

 “구원?”

 

 “그거 하곤 다르죠.”

 

 “잘 들어봐, 신이라고 뭐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자기 신도들이 몰살당한 이번 종말은 막지 못 했잖아? 아니, 애초에 전지전능하다면 인간들 가지고 시시한 추종자 모이기 놀이나 하는 건 대체 무슨 헛짓거리일까, 왜 그렇게 애써서 설득시키냔 말이야. 전지전능? 그거 다 개소리야. 무능한 늙다리 신 따위 엿이나 먹으라지. 저주와 구원을 치하할 수 있는 건 우리들이야. 봐, 그 조그만 생명체 하나가 행성하나를 날려먹었다고. 오히려 우리들 각자가 지구의 신이지. 내가 신이고, 너도 신이야. 그 지랄 맞은 개새끼도 신이고.”

 

 “샤비요?”

 

 “그래, 지랄 맞은 개새끼”

 젠시는 입을 살짝 비틀었다. 동의할 수 없다는 표시였다. 신이라는 부분과 지랄 맞다는 부분 둘 다.

 

 “제가 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방금은 지적할 필요가 있겠네요. 우린 인간이죠.”

 

 그러자 에페는 피식 웃었다.

 

 “틀렸어 젠시“.

 

 빈 접시에 나이프와 포크를 올려두었다. 집시바닥에는 검은 핏물과 기름이 어우러진 채 흩뿌려져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인류’가 아니야.”

 

 “저번에 했던 애기 기억나요? 신도 거짓말을 한다?”

 

 “그래”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도 악의를 가질까요? 아니, 악의라기보다는, 그러니까 제 말은 선의를 가지고도 인류를 해치려 할까요?”

 

 “그건 모르는 법이지. 우리를 구원하려 많은 자원을 쓰려할 지도”

 

 “얼마나 많이요?”

 

 “지구를 되돌리기 위해 모두를 희생시킬 만큼”

 

 그의 대답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모두를 희생시킨다면 구원한들 무슨 소용인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신이 항상 인간의 편이라는 법은 없지. 인간을 모기같은 존재로 판단하면 기꺼이 자신의 피조물을 부수고 다시 반죽할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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