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갔다.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흘러간다는 느낌도 없이 폭포 물처럼 그냥 마구 쏟아져 내렸다. 그의 말대로 시간은 무의미했다.
늘 깨어나면 에페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다가 저녁 시간 때(시계는 없었지만, 잠자기 전의 마지막 식사를 할 때 즈음)에 사냥한 고기를 들고 왔다. 젠시는 창고에서 꺼낸 옥수수와 같이 들었다. 반면 에페는 창고에 있는 식료품에 일절 손대지 않았다.
에페는 늑대가 떨어져 간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평소 보다 멀리 나가야 겨우 발자취를 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해 졌다고 한다.
젠시는 창고에 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의 반응은 부정이었다.
“난 식물성 지방을 소화하지 못 해”
그게 대답이었다. 젠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세상은 이해하지 못할 병들 투성이다.
그 대답을 들은 이후에는 에페와 거의 대화하지 못했다. 얼굴을 본 일도 흔치 않았다. 새벽에 물을 마시려 나왔을 때 잠깐 스쳐갈 뿐이었다.
작은 방에 가서 샤비에게 햄 통조림을 그릇에 담아 주었다. 빈 방은 언제 봐도 방의 분위기는 으스스했다. 환기구에서 꾸역거리는 바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젠시는 샤비의 목줄을 풀어주고 괜찮으냐고 말을 걸었다. 샤비는 그릇을 핥기만 했다.. 잘 지낸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쭈그리고 앉아서 샤비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젠시는 내가 살던 세상의 유일한 흔적이 사라질까,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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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자기 방에서 침상에 누워 눈을 뜬 채 가만히 있었다. 생각했다. 뭐든 생각했다. 열차, 승객들 그러다가 점점 회의적 고찰에 다가갔다.
여기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의미가 있을까. 먹고 자고 소화하고 분비물을 만든다. 그런 삶은 진정으로 의미가 있을까.
그가 한 마지막 생각은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버지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자신까지 해서 네 명이었다. 셋은 긴 옷을 입고, 오직 젠시만 나체였다. 그들은 무언가에 화를 내고 있었다. 대부분은 동굴에 갇힌 것처럼 귀가 멍멍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고, 단 하나, 간신히 들렸던 말은 어느 늙은 여성이 아버지에게 했던 말뿐이었다.
“플랭크, 이건 다시 생각해야 해. 정말로 후회 없어?”
젠시는 무어라고 말을 했지만 제 자신도 어떤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젠시를 보다가 가차없이 팔에 주사를 놨다.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젠시는 잠에서 깼다.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먼 옛날의 정오처럼 아련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눈을 비볐다.
거실로 나왔다.
아무도 없었다. 에페의 방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정말로 아무도 없는 것이다.
소파에 앉아서 쿠션을 품 안에 끌어당겼다.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몇 초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그들이 보고 싶다. 블랙, 라르, 필라, 심지어는 호메르스까지. 돌아가신 아버지도 생각난다. 깃이 각진 롱코트의 차림의 그. 한 때 알아주던 인체 공학자였지만 허무한 추락을 맞이한 그. 외로움이 귓가에 바짝 대고 속삭인다, 그리움이 사무친다. 하루 빨리 제자리를 찾고 싶다.
창고에서 스틱과자 한 봉지를 꺼냈다. 작은 방으로 가서 샤비의 목줄을 풀어주고 그와 함께 나눠먹었다. 소소한 놀이를 했다. 뭐가 우스운지 혼자서 낄낄거렸다.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침묵 속에서 웃음소리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정색했다. 젠시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달 위의 찻집처럼 정적은 참으로 기묘했다.
젠시는 작은 방에서 화장실용으로 깔아두었던 신문지를 갈았다. 신문지에 날짜가 적혀 있다. 그곳에는 시간이 존재했다. 일면의 굵은 문자가 스쳐지나가듯 읽혔다. ‘국방부. 냉전 시기, 이대로는 안 된다. 극단의 조치 취할 것.’
거실 소파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틀었다. 전파가 잡히지 않아 신호대기 화면과 함께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젠시는 텔레비전 밑 서랍을 열었다. VHS 비디오테이프가 무더기로 있었다. 젠시는 그 중 하나를 골랐다. 그는 늘 몇 번씩 그것을 돌려보곤 했다.
테이프에는 표지가 없었다. 앞부분에는 제목이 써져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원문처럼 휘갈긴 서체였다.
젠시는 소리 내어 읽었다. 글을 못 읽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존재의 유무를 확인하고 싶었다.
“L-12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비디오재생기에 넣어 재생시켰다.
결혼식이었다. 주홍빛 샹들리에 아래 에페의 얼굴, 그리고 그의 아내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은 엇비슷했지만 지금의 에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좀 더 생동감이 있다고 해야 할까.
젠시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 막 세상사 다 겪어 봤을 것 같이 생긴 늙은 주례사가 말했다.
“둘의 사랑은 영원을 하기를 약속하는 바이며 이 시간으로부터 배우자와 자식의 사랑을 베풀 것을 최대의 덕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들을 죽을 때 까지, 설령 크게 다투고, 마음이 상하게 되었을 지라도......”
옆의 액자 사진이 눈에 띄었다. 어린 소녀의 미소. 젠시는 화면을 껐다. 다른 테이프를 틀었다. ‘L-1’이라고 제목이 붙여 있었다. 결혼 장면과 달리 부제는 없었다.
갓난아이가 나왔다. 지휘자가 되려는 듯 팔을 공중에 휘저었다. 방긋 웃는 모습이 내내 보였다.
“안녕, 아기 천사”
영상 속에서 여자가 말했다. 에페 어머니, 리메이서다.
다음 비디오를 틀었다. 방금의 아이가 조금 커서 아동기가 되었다. 캠코더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집을 찍었다. 베란다 창가를 다가갔다. 얼굴이 비췄다. 지금의 에페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시소를 찍었다.
“안녕”
에페는 방향을 돌렸다. 리메이서가 카메라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뭐하고 있어요?”
“음, 일하고 있어”
“그건 뭐예요?”
에페는 바짝 다가가서 푸른 종이를 찍었다. 빽빽한 줄이 잔뜩 그어져 있었다. 맨 위 칸에는 AD-1 수정안 이라고 쓰여 있었다.
“설계도야”
“설계도가 뭐예요?”
“음, 뭔가를 만들 때 미리 그려보는 거야”
“재밌어요?”
“그다지. 넌 이런 일 하지 마. 공학도 말이야. 너무 힘들 거든.”
젠시는 모든 비디오를 순서대로 감상했다. 대략적인 인생이 눈에 들어왔다. 4월 21일, 봄꽃이 만발하는 봄날에 태어난 아이는 캠코더를 좋아한다. 학교에 들어가고 진로희망에는 영화감독을 적어놓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학업보다는 자신의 특기에 열정을 쫓는다. 예술대학에 들어가고 영화 공부에 매진한다. 많은 배우 지망생들을 만나게 되고 그 중 한 여자가 그의 눈에 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딸를 낳고, 이름을 ‘아울’이라고 붙인다.
처음 비디오와 거의 똑같은 영상이 나왔다. 아이가 미소를 가득 머금고 팔을 휘저었다.
“안녕, 아울”
에페가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도 들렸다.
그러다가 그의 인생은 어느 순간에서 끝이 났다. 아울과 떠난 여행 중 찍은 동영상이 마지막 테이프였다. 항상 그 부분이 의문이었다. 대체 뭐 때문에 갑자기 때려치운 걸까. 혹시 다른 비디오가 더 있는 것일까.
벽이 덜컹거렸다. 방호문이 열렸다. 에페가 돌아왔다. 이전에는 거의 없던 일이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머리에 내려앉은 눈을 털었다. 등불을 불어 끄고 탁상에 올려두었다.
“일찍 오셨네요?”
에페는 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갔다. 그러다가 다시 나왔다.
“오늘은 너도 따라 나와”
.
그들은 빈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젠시는 그가 운전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운전대를 다르는 모습, 페달, 시동법.
“어디로 가요?”
젠시가 물었다.
“마트. 가지러 갈 게 있어서”
젠시는 저번의 그 마트를 떠올렸다. 몇 초 간격을 두고 물었다.
“저번은 무슨 볼 일로 오셨던 건가요?”
“오늘과 같은 이유”
“그게 뭔데요? 어려운 일인가요?”
“보면 알아”
젠시는 그의 대답이 불만족스러웠다.
마트에 도착하자 젠시는 차에서 내렸다. 얼굴을 바깥에 내미는 동시에 칼로 난도질하는 듯한 추위가 찾아왔다. 젠시는 옷깃으로 잽싸게 얼굴을 감췄다. 그래도 추위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달빛이 거리를 비췄다. 세상은 이틀 전보다 조금 밝았다. 형체가 어렴풋이 보이고 간판의 글자들은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에페는 등불을 들고 뒷좌석에서 불쏘시개를 꺼내 불을 붙였다.
“예전 직업이 뭐였어요?”
젠시가 물었다. 답변이 하나로 정해져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대답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경호일. 단 한 사람을 위해 일했다.”
“경호원이라고요?”
“그래”
젠시는 잠시 대화를 중단했다.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캠코더를 든 소년을, 영화를 찍다가 에페의 아내를 만난 그 순간을. 그는 거짓말을 하는 걸까? 무엇 때문에? 젠시는 다시 말을 걸었다.
“사실 저 비디오를 봤어요. 완전 딴 사람 같더라고요. 거기에는 직업이 영화감독이시던데”
“맞아”
“아깐 경호원이라면서요.”
“감독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한 거지”
젠시는 그 다음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직업은 바뀔 수 있다. 젠시는 전세대의 직업세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갔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라는 것만은 안다. 영화감독에서 경호원으로? 글쎄, 대학 전공과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인물전에서도 종종 보인다. 하지만 영화감독에서 경호원으로? 정말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군.”
에페는 도로와 젠시의 눈동자를 번갈아보며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누구나 거짓말은 하지 속임수는 송충이도 한다. 심지어는 신도 거짓말을 하지.”
“방금 한 말이 거짓이란 거군요?”
“아니 이건 사실이야. 경호원 일을 했다.”
젠시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쩌라는 거야. 도모지 좋은 대화상대라는 생각은 못하겠다. 차라리 샤비와 대화하는 편이 휠씬 죽이 잘 맞았다. 적어도 말뜻을 이해하려고 골치 아플 일은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지만 방정맞은 입은 소나기처럼 급작스러운 호기심을 채를 거치지 않고 따라갔다.
“아까 단 한사람을 위해 일 했다고 했는데 한 곳에서 오래하면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그래요? 고용인이 잘 대해주던가요?”
“좋은 분이었지”
“진심인가요? 대체로 상사는 꼴통이라 들어서요”
“아냐, 그러지 않았어. 그 분은 달라”
“에이, 눈치 안 봐도 되는데”
“좋은 분이었어.”
그는 꼿꼿이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어.
어느새 그들은 슈퍼마켓으로 도착해 있었다. 네온사인과 진열대까지 젠시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 그대로였다. 곧장 창고로 들어갔다. 요전번 모닥불을 피워 바닥이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소생고에 있는 시체를 스쳐지나갔다. 젠시는 쳐다도 보지 않고 에페를 따라 창고 뒤편으로 넘어갔다.
에페는 공간을 가늠한 뒤 상자를 치웠다. 벽이 조금 뜯어져 있었다. 에페는 등불을 내려놓고 벽에 난 틈에 도끼질을 해 양철조각을 떼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그림자의 모습은 마치 시체를 벽에 박아두고 도륙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건 뭐하려고요?”
젠시가 손에 입김을 불며 물었다.
“지하수가 범람하는 바람에 때문에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보조 공사를 해야 하지.”
젠시는 절벽 아래 흐르던 개울을 떠올렸다. 이제야 비정상적인 형성이 지하수가 넘쳐서 지상으로 솟아 오른 것이었음을 알았다.
“벽이 무너지지 않을까요?”
“그건 이미 계산에 넣었어.”
“그럼, 전 뭘 하죠?”
“밖에 나가서 무슨 소리가 나면 불러”
“불러 놓고 저리가라고요?”
“아니, 망을 보라고. 진짜 할 일은 따로 있으니 이따가 부르겠다.”
젠시는 뜸들이다가 말했다.
“등불은 가져갈까요?”
“아니. 놔둬. 없어도 차까지 갈 수 있잖아. 에서 기다리다가 뭔가 발견하면 알려달라니까.”
“안 보이는데요?”
“볼 수 있어.”
“그럼 신문지에 불 좀 붙여가도 될까요?”
“안 돼, 그냥 가. 넌 볼 수 있다고.”
“알았어요.”
모든 게 자기 맘대로. 젠시는 투덜거리며 창고로 나왔다. 확실히 달이 떠오른지라 이전보다 밝아지긴 했다. 그렇지만 완전한 어둠에서 폐허 속을 돌아다는 정도로 변했을 뿐이다. 눈 뜬 장님이라는 사실은 다를 게 없다, 젠시는 바닥에 쓰러진 진열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다친 곳은 없었다. 아니, 하나 있는 것 같다. 평정심에 손상이 간 것. 젠시는 손을 땅에 짚고 다시 일어났다.
“넌 볼 수 있어 차츰 어둠에 적응해 봐”
젠시는 중얼중얼 비아냥거렸다. 창고 쪽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하다며 걱정해 주는 이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그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도와 달라 했을 때, 군말 없이 나섰지 않은가. 그렇지만 불 좀 달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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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볼 수 있다고, 제지랄.”
입구에서 어둑한 자동차의 윤곽이 겨우 보였다. 젠시는 무릎을 털고 그 형체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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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시는 차 안에서 몸을 떨었다. 난방이라도 틀어달라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키는 꼽혀 있었지만 어떻게 시동을 거는 지 확신이 없었다. 자동차설명서를 떠올렸다. 희미하긴 하지만 그림이 천천히 그려졌다. 분명 키를 사용해야 했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키를 만져보다가 돌렸다. 차가 다 죽어가는 노인이 음침한 헛기침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젠시는 몸을 녹이고 싶었다. 하지만 난방 기능을 어떻게 가동시키는지 알지 못했다. 이것저것 만져보았다. 와이퍼가 돌아가고, 노래가 나오다가 꺼졌다. 빨간색 버튼을 누르자 그제서야 환풍구에서 미약한 온풍이 나오기 시작했다. 젠시는 거기에 머리와 손을 바짝 갖다 댔다.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털이 곤두섰다. 고개를 뒤로 빼고 기다렸다. 냄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대로 기다렸다. 종종 입김을 불어넣었다. 온기는 금세 사라져 소용없었다. 손이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머리가 찌릿, 아프기 시작했다.
왜 그는 날 여기로 데리러 온 갈까. 정말로 단순히 정찰일로 부른 것일까. 그에 대해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애초에 온건히 벙커를 운 좋게 발견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지구가 멈춘 건 한 순간의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몇 년을 걸쳐 끝나버린 세계였다. 그동안 벙커 주인은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정말로.
혹시 그는 살인자가 아닐까, 벙커를 차지하기 위해 원래의 주인을 죽인 게 아닐까, 그래, 원래 미치광이들은 과거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잖아. 최후의 생존자라는 명패는 자신을 제외한 이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증표가 아닐까.
조수석 밑에 있던 상자를 발견했다. 이전에 에페가 어느 망자의 유품이라고 했다. 그게 무얼까. 비밀번호 입력칸은 금속으로 되어있었다. 보통 이런 부분은 불에 그을린 듯 갈색으로 녹이 슬텐데 최근까지도 사용한 듯 말끔했다.
그때, 입구에서 무언가 보였다. 젠시는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기를 찾아 허벅지를 더듬거렸다. 리볼버가 잡혔다. 단 한 발 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손전등을 들어 입구에 불을 비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낡은 신문지만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총을 들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