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는 조용한 목소리로 아주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걱정 마. 거짓말처럼 아주 쉽고 간단해. 내가 널 살려준 이유는 네가 날 유토피아호로 데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젠시는 두 팔을 올리고 겁에 질린 눈을 떴다.
“내 질문에 빨리 대답하던가. 여기서 죽던가 선택하라. 이제 곧 윙이 몰려 올테니 시간이 없다. 정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에페는 고개를 기울였다. 좌우 눈을 이상하게 떴다. 한쪽 눈은 반쯤 감기고 다른 한쪽 눈꺼풀은 파르르 떨렸다. 마치 심신이 고장 난 것처럼. 젠시는 에페가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혹은 마약에 찌든 사람이거나.
“윙에 쫒기던가. 대신 놈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마라. 만약 대답한다면, 바로 앞에 은신처가 있다. 30센치 방호벽으로 만들어져서 윙은커녕 핵탄두 미사일도 못 뚫지. 거기 들여보내 준다. 자, 이제 대답할 마음이 생겼나?”
“넵.”
“좋아. 유토피아호가 오면, 날 데려간다. 그래 줄 거지?”
“넵”
갑자기 주위에서 적막함이 깨지고 까마귀 같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시는 그 윙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심각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에페는 젠시를 응시하다가 멱살을 놓고 총을 내렸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편안하게 돌아왔다. 젠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말투도 급변했다.
“모질게 대해서 유감이군. 나쁜 감정은 없어. 단지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니까. 원하는 걸 얻는 방법 중 하나는 일초 사이로 목숨이 오가는 긴박한 상황 속의 협상이거든.”
젠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걸로 합의. 서로 윈-윈으로 가자고.”
에페는 악수를 청했다. 젠시는 손을 뿌리치고 위협했던 것에 대해 따지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지만 그 손을 빨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윙인가 뭔가 하는 괴물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머리에 구멍 나기 전에 빨리 내려”
.
잿빛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젠시는 허리 위로 잘린 아파트 지하에 있는 벙커에 들어갔다. 아파트는 포탄을 맞은 흔적이 남아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그나마도 어둠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젠시는 머리를 털고 구둣발을 바닥에 툭툭 내리쳤다. 더러운 물기가 떨어졌다.
잘 정돈된 벙커 내부는 대체적으로 그 먼 예전의 자연 같은 초록빛을 냈다. 단순한 빗줄기 무늬의 초록벽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초록 소파, 초록 쿠션. 그 아래에는 커다란 융단 카펫. 그 위에의 적갈색 원목좌탁. 초록 식탁보. 그 앞엔 서랍과 텔레비전. 유토피아호의 객실과 같은 편안한 분위기였다.
젠시는 안정감을 되찾아 방금 있던 위협도 금세 싹 잊고, 열차 안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기가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젠시는 전등을 처음 본 사람처럼 신기해 하며 전등 스위치를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이 한 줄기 빛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는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서랍 위에는 액자가 있었다. 차에서 봤던 액자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액자를 꺼내 소매로 먼지를 닦았다. 사진에는 높게 뜬 태양아래 어린 소녀가 미끄럼틀 아래서 해맑게 웃고 있었다.
샤비는 호기심 가득 찬 아이처럼 마냥 돌아다녔다. 쿠션에 냄새를 맡는가 하면 어느 방에 들어갔다 나오기도 하고. 낯선 곳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젠시는 샤비를 내버려두었다. 그는 말썽을 피우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거실 오른쪽에 부엌이 나왔다. 좀 더 안쪽으로는 창고가 있었다. 슈퍼마켓 창고와 비슷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대개 통조림 종류이고 유통이 오래가는 것들이었다. 옥수수 통조림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두세 개를 제외하고 거의 가득 채워져 있었다.
손끝에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에 까맣게 먼지가 묻었다.
뒤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젠시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에페가 늑대 시체를 담은 비닐을 내려놓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비닐에는 검붉은 핏물이 고여 있었다.
“이것저것 함부로 건들지 마라. 특히 식량은 중요하니까 더더욱.”
“먹을 게 이렇게 많으면 여기서 몇 년은 견딜 수 있겠는데요?”
“성인 한 명 기준 정확히 20년 치 식량이다.”
“준비성이 철저하네요?”
“내가 아니야”
여전히, 에페의 화법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공허하고 어설프다.
“무슨 말이에요?”
“내가 이 벙커를 지은 게 아니다”
“그럼 원래는 누가 주인이었죠?”
“이 벙커는 비어있었어. 난 운 좋게 발견한 거지. 어쨌든 거기서 나와라.”
젠시는 조용히 손가락을 문지르며 먼지를 닦고 창고에서 나왔다. 에페는 안을 들여다보다가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끼익거리는 마찰음이 굵게 울렸다.
샤비가 부엌에서 마구 날뛰고 있었다. 에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샤비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치 경멸을 표출하듯 손가락을 뻗었다.
“개 좀 어떻게 좀 하는 게 어떻겠나? 목줄은 안 하고 다니나?”
그는 개를 ‘저것’ 이라고 짐짝 대하듯 말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안 했습니다. 목줄은 자유를 억압하지 않습니까.”
“웃기는군.”
“자유를 무시합니까?”
“자유란 한 마디로 밤하늘의 별 같은 거야. 이상향처럼 바라만 보지만 아무도 가져본 적 없고 가질 수 없거든. 목줄은 억압이다 같은 시답잖은 철학은 듣기 싫고 개나 잘 묶어두게. 집안 꼴을 엉망으로 만드는 건 별로 반갑지 않으니. 저것 보게.”
샤비는 당장에 그걸 증명하듯 식탁 옆, 벽지를 물어 뜯어내려했다.. 앞발로 긁어대며 듣기 거북한 소리도 냈다.
“당장 처리하도록”
.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이렇게 편안히 앉아서 음식을 먹는 게 꽤 오랜만의 일로 느껴졌다. 4인용 식탁에는 늑대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 나이프, 포크가 놓여 있었다. 젠시는 거실과 등지고 앉았고 에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샤비는 젠시 아래서 햄 통조림을 담은 접시에 코를 박고 있었다.
요란하던 바람 소리 조차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적막함이 흘렀다. 그 가운데 그들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니까 전 주인을 전혀 모른단 말이죠? 예?”
에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젠시는 고기를 썰고 입에 넣었다. 입 안에 고기를 굴리고 천천히 씹으며 미각을 열었다. 괜찮은 솜씨였다. 평범한 ‘정석 레시피’ 같다. 다만, 핏물이 다 빠지지 않아 피비린내가 났다. 그렇지만 그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곳을 찾아내신 거죠?”
에페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나가다가”
“운이 좋아도 몇 년 치 운을 한꺼번에 쓴 셈이네요.”
“뭐, 그렇지”
“얼마나 오래 머무르셨나요?”
이번에는 에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생각을 하느라 대답을 망설이는 건지 못 듣는 척하는 건지 젠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입이나 닥치고 고기나 먹자고 마음먹었을 때 간신히 대답이 돌아왔다.
“몰라”
김빠질 정도로 짤막하고 허탈한 대답이었다. 젠시가 에페를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여긴 시계가 없어. 빌어먹을 하루 시간 가는 게 알 수가 있어야지.”
에페는 물을 한 모금 삼켰다.
“하지만 해 지는 건 여러 번 본 것 같군. 적지 않게. 네 나이가 몇 이지?”
“아마 정규 교육은 마쳤습니다.”
“거기서?”
“네”
에페는 휴지로 입을 닦았다.
“여기선 시간이 의미가 없지. 말했다시피 하루가 가는 것도 모르겠고, 나이 드는 것도 몰라. 언제 밥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지. 그냥 본능에 모든 걸 맡기는 거야. 순간에 영원히 갇힌 것처럼.”
“사람도 없고 시간도 없는 곳에서 살만 하던가요?”
“어떨 것 같아?”
“답답할 것 같은데요.”
에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젠시는 그렇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전기는 어떻게 들어오는 거예요?”
“아래에 지하수가 빠르게 흘러. 그걸로 터빈을 돌려 만들어내지”
“전기도 들어오고 식량도 많겠다. 여기서도 지낼만 하다면 왜 굳이 유토피아로 가려 하는 거죠?”
“내가 질문 하나 하지. 날 만나지 못하고, 여기에 오지 못했더라면 자네의 원래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설마 거기서 죽치고 있지는 않을 테고. 열차에서 떨어지고 나서 애초 계획이 뭐야?”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열차로. 행로 방향과 반대로 쭉 따라가는 거죠.”
“왜 굳이 돌아가려고?”
“으음, 제가 자란 고향이니까요.”
“그 뿐인가?”
젠시는 깜짝 놀랐다. 그것 외에 다른 답이 있을까. 그러고 보면, 마음에 맹새코 신중하게 답하라면 자기 자신도 답을 몰랐다.
“거기가 더 편하고, 걱정거리도 없고, 비록 밥은 맛없지만 가끔은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또?”
“블랙, 헨드, 달튼, 필라 친구들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맙소사”
순간, 젠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케케묵은 과제를 제출일 하루 전에 발견한 것 같았다.
“라르”
“그건 누군가?”
에페는 쩝쩝대며 흥미로운 눈을 했다.
“어떤 여자애에요. 그 애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저 밖에 없어요. 전, 전 그 애를 구해야 해요.”
죽다 살아났던 순간은 평생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한다. 어릴 적, 라르와 함께 멋대로 유원지에 갔었다. 유원지는 이미 오래 전에 폐쇄되어 있었다. 회전목마는 돌아가지 않고, 롤러코스터는 영원토록 멈춰있었다. 라르는 가기 싫다고 했지만 젠시 괜찮다며 앞장섰다. 그러다가 그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거기에는 웬 괴한들이 숨어 있었다. 광신도들의 스파이가 정보를 넘기는 숨겨진 본거지였던 것이다. 젠시와 라르는 뜻하지 않게 현장을 목도했고, 결국 총알은.
“전 돌아가야 해요. 제가 없으면 그 애는 분명......”
“넌 나와 같은 족속이야. 운명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거든. 몇 번이고 탈선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말지. 헤맬 순 있어도 도착은 하는 거야. 나도 자네와 같은 이치야. 열차에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그게 뭔가요?”
“뭔가 중요한 것”
“당신도 구할 사람이 있는 건가요?”
“아주 많지.”
젠시는 순간 멈칫했다. 포크를 잠시 내려놓았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경계심이 들었다.
“당신도 열차에 탄 적이 있었단 말입니까?”
“아니”
“그럼 승객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그 얘기가 아니야.”
젠시는 그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고기를 입에 넣고 쩝쩝 댈 뿐, 시원스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연스럽게 살짝 주제를 바꿨다. 젠시는 그가 말을 돌리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정말로 수상쩍었다.
“유토피아호에서는 지금도 나 같은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아는가?”
“아마 거의 모를 겁니다. 저도 몰랐고요.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살아 있을 거란 생각을 했겠어요?”
“사실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지. 대다수가 탑승권이 없는 패전국들이었어. 불법 점거 소동도 몇 차례 있었으니 기억날 법도 한데”
젠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아직 지구가 돌긴 했을 때였죠.”
젠시는 광신도들이 철로를 톱으로 절단하고 창문에 제조 폭탄을 던졌던 그 날을 기억했다.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을 버리는 그들.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어째서 살기를 포기하는가.
“다른 사람들도 아직도 살아 있나요?”
“다른 곳에 모여살기로 결정했지. 여기서 몇킬로 떨어진 지점에 방위기지가 있는데, 그곳이라면 꽤 넓고 버섯이나 재배하면서 먹고 살 순 있거든.”
“방위기지?”
“지하에 숨겨져 있어서 아무도 몰랐던 모양이야.”
“어떻게 발견한 거죠?”
“내 어머니, 리메이서 콜린이 사람들에게 알려줬지.”
“어머니가 군인이신가요?”
“아니. 다만 거기서 잠깐 일하긴 했지.”
“생존자가 모두 거기 있는데 당신은 여기 남아 있네요.”
에페는 어깨를 으쓱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원래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거기에 있어야 했지. 하지만 실패했어.“
젠시는 그 의미를 파악하는데 몇 초가 걸렸다.
“혼자 살아남으셨군요..”
“방위기지는 풍족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저녁이 밤으로 뒤바뀌는 게 순식간이었지. 게다가 방위기지 근처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다. 그래서 우리는 살기 위해서 도박을 해야 했어. 추위를 견뎌가며 황무지를 걸어갈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간간히 버티다 죽어갈 것인가. 우리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났지만 방위기지는 폐쇄되어 있었어. 결국 우리 모두가 추위에서 떨며 죽어야 했지.”
그의 이야기가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정말 모두가 죽은 건가요?”
에페는 젠시의 눈을 피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평행하게 내려놓았다. 그의 접시는 깨끗이 비어져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후 말을 꺼냈다.
“식사를 마쳤으니 여기에 있을 동안 규칙 몇 가지를 말해주지.”
“뭐라고요?”
젠시는 고기를 삼키고 에페를 쳐다봤다. 규칙이라니. 자유주의자인 젠시로서는 벌써부터 목이 죄여온다.
“하나, 네가 데려온 네 발 생명체는......”
“샤비에요”
“뭐라고?”
“이름이요. 샤비라고”
“뭐가 됐든, 그 생명체는,”
“아니, 샤비라고요. 아저씨에겐 어떻게 보일진 몰라도 저에겐 소중한 아이에요.”
“근데 왜 이름이 샤비 (shabby : 쉐비/낡은)야?”
“제 방에 있는 낡은 커튼을 좋아하거든요”
에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샤비를 곁눈질했다.
“어쨌든, 절대 목줄을 풀지 말기를 바란다.”
젠시는 눈을 돌리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그리고, 둘”
에페가 다시 말하기 시작하자 젠시는 고개를 다시 돌렸다.
“내 방은 절대 들어오지 말 것. 창고에서 뭘 먹는 건 괜찮아도 내 방에 들어오는 건 절대로 용납안할 거야”
“그 방이 어딘데요?”
“거실에서 오른쪽.”
젠시는 고개를 돌려 그 방을 쳐다보았다. 문이 닫혀 있었다. 손잡이에는 스마일 마크가 새겨져있었다. 젠시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보통 영화에선 들어가지 말라하고 들어가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