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녁 노을빛이 황폐해진 폐허를 비추고 있었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허허벌판에는 철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 위로 열차가 질주했다. 앞머리에는 이름이 굵게 조판 되어 있었다. ‘유토피아호’
.
“이건 억압입니다”
열차 3 번 칸 주방 입구에서 젠시가 말했다.
맞은편에는 눈이 작은 조리장이 뚱한 표정으로 젠시의 말을 흘러 듣고 있었다.
“자유를 위해 싸운 인류는 말이죠. 지금까지 그 단어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까. 피를 흘러 세운 이 땅에”
“그래서?”
조리장은 노골적으로 귀를 후벼 팠다.
“그들의 숭고한 헌신에 반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선조들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할 거라고요”
“그래서,”
조리장은 눈을 가늘게 떳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이 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뜨뜻한 음식 접시로 가득 채운 배급차 손잡이를 꽉 쥐고 내밀었다. 언뜻 보기에도 짜증을 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한 밥을 안 먹겠다고?”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제 말은 그러니까 적어도 메뉴를 선택할 권리는 주셔야 한다는 것이 정론 아니겠습니까......”
“젠시 제인, 네 직책이 무엇인가?”
“네! 5호 칸 배급원입니다.”
“그럼 그 직책에 맞게 책임을 다하게. 승객들에게 접시 하나 건네주고! 다 먹은 그릇 가져오고! 그사이에 낄 허튼소리는 필요 없다. 그리고 식사 메뉴는 호메르스 기관장님이 정하신 거다. 따지려면 그쪽에 따져라.”
“그래도 메주콩에 마요네즈는 아니잖습니까. 정말이지, 치가 떨릴 정도로 최악입니다. 승객분들이 볼멘소리하는 걸 못 들으셨습니까?”
조리장은 쯧, 하고 혀를 차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지구 멸망 시점에 편식 같은 배부른 소리 하는군‘
“승객들은 좀 더 럭셔리하고 호화로운 메뉴를 원한다고요. 살짝 익힌 쇠고기 스테이크 같은.”
젠시는 말하면서도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거라면 2층 식당에 가서 찾으셨어야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민원 질이야! 정 메뉴가 맘에 안 들면 2층! 2층을 가라고”
어느새 논쟁은 사자후로 종결되어가고 있었다. 젠시는 거기에 아무것도 대응하지 못하고 완전히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네가 좋아하는 고기나 처먹어라! 여기서 헛짓거리하지 말고”
조리장은 씩씩거리며 문을 쾅 닫았다.
젠시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조금 끼는 듯한 웨이터복의 목 단추를 만지작대다가 배식차를 끌고 4호 칸 문을 열었다.
조금 쌀쌀한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양쪽으로 객실이 하나씩 나 있었고, 객실 사이로 두꺼운 유리창이 바깥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한없는 맑음. 잿빛 저녁노을과 말라버린 바다가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유리창 아래의 벤치에 앉아 있거나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들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 등등. 통로는 은근히 붐볐다.
한쪽 구석에서 로봇 청소기가 스스로 벽을 치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며칠째 고장 난 상태 그대로였다.
“아직도 저래”
옆에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며 동행했다. 젠시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젠시는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6번 칸 배급원인 블랙이었다. 한결 편한 표정을 보아하니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블랙은 일을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였다. 물론 본인은 부정했다. 그의 말로 따르면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넘치는 에너지를 단순 노동에 쏟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한다. 그게 그거지만.
“얼마나 멍청해졌는지. 저것 봐. 이젠 제 머리를 벽에 치잖아.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머리도 우리들처럼 핑핑 돌고, 그랬단 말이야.”
“그건 우리 아버지 세대지.”
“아, 그래. 아버지 세대. 그건 당연하지. 그땐 모든 게 멀쩡했었거든. 지구도 온건히 돌아갔었다지. 지금은 멈춰버렸지만.”
“우리 어렸을 때도 돌긴 했어”
“너 602호 할머니 알지? 그분, 오늘도 언제 해가 뜨느냐고 하더라고. 웃긴 일이지. 나도 본 적이 없는데.”
“오페밀러 할머니? 내 구역은 아니지만, 워낙 괴팍한 거로 유명하잖아. 듣기로는 치매시라던데. 그분은 아직도 자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 거야? 일 년이 하루가 된 지가 언젠데.”
“내 말이. 그래서 내가 말해드렸지. 지구는 자전을 멈췄고, 지금 이 해는 지고 있는 저녁이라고.”
“그것도 영원한 저녁이지. 내내 해만 쫓아다니고 있으니. 마치 변태 스토커 같아. 뒤에만 몰래몰래 따라다니니까”
그들은 킬킬거리며 웃음을 훔쳤다.
대규모의 지진으로 자전이 멈춘 지구. 밤과 낮은 마이너스 플러스 50도를 맴도는 기후를 유지했다. 열차 유토피아호는 그런 지옥을 피해 적당한 온도를 지닌 해 질 무렵의 경도를 따라 달렸다. 다수의 과학자 집단, 엔지니어, 대규모 인부들이 동원되어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30칸, 위로는 3층까지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한 마디로 움직이는 피난처.
피난처라고 말하지만, 실상, 생활은 문명인의 수준이었다. 젠시가 느끼기에 살면서 걱정거리는 그다지 없었다. 지구 멸망 후라고는 하나, 너무도 평화로웠다. 머리 칸에서부터 꼬리 칸까지 승객들은 재즈 음악이나 들으면서 차 한 잔을 걸칠 정도의 잠재적 교양을 겸비하고 있고, 심심하면 2, 3층 문화 및 상업지대에 올라가서 심심풀이 영화나 한 편 관람하거나, 식사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취객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블랙은 웃음을 멈추고 객실 번호를 물어본 후 길을 알려주었다. 남자는 자꾸 입으로 끄억끄억 거리던 그는 보답으로 말린 양상추를 건네주었다. 지폐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블랙은 마지못해 그것을 받았다. 그리곤 곧바로 배급차 위에 올려두었다.
“벌주 대낮부터 술 잔뜩 마셨나 보네.”
“그러게. 근데 블랙, 별을 본 적 있어?”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당연히 없지. 별을 보려면 밤이어야 되는데, 보기 전에 얼어 죽고 말걸?”
“어릴 적에라도 없어?”
“그때라면 모르겠네. 아마 있었겠지. 잘 기억나지 않아. 근데 그건 왜?”
“어제 꿈에서 어렴풋이 본 것 같았어. 게다가 아버지도 봤던 것 같아.”
“네 아버지?”
젠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히지만”
블랙이 입을 다물었다.
젠시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끔찍한 사고였다. 달리는 열차에서 추락했던 것이다. 폭포로 떨어진 터라 그의 시신을 찾을 수도 없었다.
젠시는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오래 전 일이었고, 애틋하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눈물만 주구장창 흘릴 순 없으니까.
젠시는 5호 칸으로 가는 문을 열었다. 노파가 서있었다. 젠시가 아는 얼굴이었다. 불과 몇 분 전에도 거론되었던 인물.
노파는 그들을 냉시했다.
“비켜라.”
“아, 오페밀러 할머니, 어디 가는 길이세요?”
블랙이 말했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오페밀러는 어깨를 밀치며 그들 뒤로 지나갔다. 젠시와 블랙은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이라곤 기관실밖에 볼 일이 없을 텐데......”
젠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블랙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또 노망난 소리나 하겠지”
“노망난 소리라니?”
“요전부터 열차를 세우고 탈출하겠다고 하더라고. 자기 말로는 들판에 꽃을 따야 한데.”
“꽃이라......”
“좀 이상해. 원래부터 이상했지만 요 몇 년 새에 더욱. 저러다 뭔 사고라도 치는 건 아닌지 싶어.”
“옛날 생각나서 그냥 하는 소리겠지. 뭔 사고까지는 아니......”
“아니 아냐. 진짜로.”
블랙은 젠시의 말을 자르고 걸음을 멈췄다. 젠시도 따라 멈췄다. 블랙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한 층 진지해지고 거대한 비밀을 말하려는 듯이. 그는 좌우 통로를 살폈다.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불안한지 블랙은 목소리를 낮추고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어제 새벽에 엔진 쪽에 화재 난 건 알지?”
젠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꼭두새벽이었을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객실에서 잠에서 깼었다.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불 꺼진 통로에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몰랐다. 도로 잠자리로 돌아갔으니까.
“아침에 말로 들었어.”
“그 화재도 그분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어.”
“뭐? 에이, 설마”
젠시는 두 발짝 걸음을 옮긴 후 501호 객실 문 앞에서 배급차를 세웠다. 머리 바로 위에 걸린 벽시계에 눈을 돌렸다. 여섯시 정각이 되기 오 분 전이었다. 다시 블랙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분이 일부로 불을 냈다고?”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대체 왜 불을 질러?”
왜, 라는 질문도 궁금하지만 어떻게, 라는 질문도 신경 쓰였다. 엔진실은 2번 칸 지하 칸에 있다. 조종실과 가까운 데다 보안부들이 늘 감시하고 있다. 엔진실에 불을 내기는커녕 접근하기조차도 어려웠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뭐, 어디까지나 소문이니까. 이 좁은 바닥이야 들리는 뜬소문이 워낙 파다하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
사람 한 명이 그들 뒤로 지나갔다. 둘은 잠시 침묵했다가 행인이 다 지나가자 블랙이 말을 이었다.
“그걸 믿는다는 건 아니야. 그런데 아마도, 그게 사실이라면 열차를 세우려는 의도였겠지.”
“근거는 뭐야?”
“평소에도 그런 말을 하고 다녔잖아. 아까 말했듯이 불을 질렀다면 당연히 열차를 세우려고―”
“아니, 오페밀러씨가 불을 질렀다는 근거가 되는 게 뭐냐고. 왜 그런 소문이 돌아?”
“어젯밤에 통로를 지나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거든. 그게 오페밀러씨라는 거야.”
“확실한 거야?”
“모르겠어. 보안부에 있는 사람 말로는 그래.”
젠시는 생각했다. 이것이 과연 진실의 목도일까. 헛소문에 불과한 걸까. 평소 행실에 근거한 섣부른 예단은 아닐까.
여섯 시 일 분 전이 되었을 때 블랙이 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아, 너 여기서부터 배급이지?”
“어디가?”
“여친이랑 저녁 약속 있어서”
“망해라”
젠시는 표정은 진지했지만 장난 투로 말했다. 블랙은 킬킬거리다 가운뎃손가락을 쳐들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여섯 시 정각이 되는 동시에 501호 객실에 노크했다. 정확히 박자를 갖춘 단 세 번의 두드림.
문 너머로 대답이 들려왔고, 젠시는 배급원이라고 알린 후 잠시 옷을 점검했다. 가슴팍에 붉은 반점이 묻어있었다.
“엑, 뭐야”
반점을 털었다.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자, 내버려 두었다.
객실 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맞아주었다. 머리가 젖어 있고, 방 안에 따뜻한 습기가 흐르는 것을 보아, 금방 샤워를 마치고 온 상태라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한마디는 시큰둥하고, 매우 무서우리만큼 간단했다.
“아아, 밥, 그래.”
“공주님께서는 여전히 무례하시군. 예의를 갖춰 말해라”
“싫은데. 그리고 난 공주가 아니야.”
필라는 그렇게 말하고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젠시가 그녀를 보고 공주라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토피아호의 총괄자인 호메르스 기관장이었다. 한마디로 왕의 딸인 셈이다.
“여전히 단칼에 거절이시네. 남 기분 나쁘게 시리”
“미안.”
필라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낸 후 젠시가 건넨 접시를 받았다.
“아버지는? 집에 계셔?”
젠시가 물었다.
“아니, 일하러 나가셨지.”
“교대 시간 아니었나?”
“어제 엔진에 문제가 있어서 동료가 그쪽 일 갔다나 봐. 그래서 대신 맡고 있지”
“아아, 엔진.”
젠시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놈의 엔진. 그게 그렇게도 중요한가? 중요하겠지. 피난인의 생사가 달린 문젠데.
“아버지한테 할 말 있는 거면 나한테 말해. 이따가 돌아오시면 전해 줄게.”
실제론 말만 전달해주는 것뿐이 아니었다. 딸의 말 한마디면 아버지를 뒤흔들 수 있었다. 숨겨진 실세나 다름없었다. 젠시는 자기가 메뉴에 대한 불만을 전하는 모양새를 머릿속에 그렸다. 꼬락서니가 영 말이 아니었다.
“아냐, 됐어. 나중에 말하지, 뭐”
“그래, 어 너 밑에 빨간 거 묻었다.”
“아, 이거. 방금 알았어. 나중에 세탁소에 맡기지 뭐. 다른 건?”
필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꼬리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검지를 세웠다.
“잠깐 기다려봐, 네게 줄 게 있어.”
그녀는 음식을 식탁에 내려놓고 어딘가로 뛰어갔다. 맨발 소리, 서랍 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그리곤 다시 와서 무언가를 내멀었다.
사진이었다. 아주 오래된 필름. 누군가가 예전의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모서리에 꾸겨지고 흑갈색 얼룩이 묻어있었지만 사진 속에 갇힌 웃음은 평범한 행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서 난 거야?”
“지난번에 주운 책 사이에서 찾았어.”
그녀는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의 모든 책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선지 과거를 수호하는 도서관장 같은 지적인 인상을 주었다. 물론 실제론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젠시는 잘 알고 있었다. 정규교육 기간에 지켜 본 바, 수학엔 씻을 수 없을 만큼 염병이었으니까.
젠시는 사진을 바라보았다.
에펠탑의 기세등등한 풍매는 분명히 우아했다. 그렇지만 현재의 시점에선 그저 초라했다.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영광과 같은 것이다. 실제 에펠탑은 어딘가에서 절반은 철가루가 된 채 바다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라르한테 잘 전달해줘. 그 애가 좋아한다며.”
라르는 젠시보다 몇 살 더 어린 소녀였다. 전 세대의 지구 사진을 모으는 아이였다.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그래, 고마워, 너에게서 받았다고 전해줄게.”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502호 객실에 노크한 후 기다렸다. 열차 모퉁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기관장, 호메르스의 목소리였다.
“승객 여러분께 잠시 안내 말씀드립니다. 지금 도시구역을 지날 예정이니, 외부의 급습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창문에는 사막을 뒤로하고, 도시가 찾아왔다. 햇빛에 반사되어 윤기 흐르는 빌딩은 온데간데없고, 포탄과 불에 어둡게 그을린 흔적, 찌그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폐건물이 어지러이 서있었다. 자동차는 영원한 교통체증 속을 헤매고 무질서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늘 어딘가 바쁜 행인은 없고 죽음을 조롱하는 영인만 있을 뿐이다.
젠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찬란한 문명이라는 세계는 아버지 세대. 젠시가 보기에는 늘 이런 유렁 도시뿐이었다.
"빌어먹을 광신도 놈들."
뒤에서 연륜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시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돌리고 흘끗 눈길을 던졌다. 창가 밑 의자에 흰머리가 듬성한 늙은 남성이 앉아있었다. 낡아 해진 중절모에 손에는 커다란 굳은살이 박혀있었다. 옆에는 아들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노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둘 다 젠시가 못 보던 얼굴이었다.
“알아요. 다 알아”
중년 남성이 말했다.
“모두 그 빌어먹을 광신도 놈들 때문이야.. 알아들어?”
“네 그렇고 말고요. 모두 알아요. 손자들한테도 몇 번이고 얘기하셨잖아요. 여기까지 와서도 이러시면......”
“이거 보여? 창문에 금이 갔어. 놈들은 우릴 학살시킨 데다 우리 보금자리인 이 열차까지 빼앗으려 했다고.“
노인은 쿨럭거린 후 말을 이었다.
“이 창문은 내가 만들었어, 폭발에도 견디도록 지옥불 같은 열기 속에서 버티면서까지 가공한 유리였다고. 그걸 깨뜨리려고 했다니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야”
“예, 하지만 이제 놈들은 없어요. 놈들이 안 나타난 게 벌써 오래 전 일이라고요 패전국 생존자들은 다 죽은 게 틀림없어요. 밖을 보세요. 움직이는 거라곤 신문지와 먼지덩이 뿐이에요.”
광신도들. 젠시는 역사수업 때 했던 이야기를 떠올랐다. 그들은 이런 사태를 만들어낸 주범이었다. 아주 오래 전, 광신도들은 단 세 명뿐이었다. 그들은 새 주를 찬양하고 그가 오염된 지구를 새로 갈아주리라는 교리를 표방하며 신도들을 모았다. 처음에는 뒷골목에 늘 존재하던 평범한 사이비 종교 수준이었다. 신도들도 그리 많지 않았고, 당국과 경찰은 물론, 주민들마저도 별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나게 퍼져버린 것이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치사율은 없으면서 감염성은 지독하게 높은 바이러스. 광신도 바이러스는 한 구역을 덮고, 옆 구역에 퍼져나가고, 지역을 이루고, 옆 지역에 퍼져나갔다. 게다가 특별한 이동수단을 거치지 않아도 인터넷이 있는 곳 어디로든 퍼져나간다. 광신도들의 영역은 거의 보이지 않는 빨간 점에서 선을 이루고 면을 이룬다.
급기야는 테러가 발생한다. 커피 한 잔을 사려 나왔던 카페에서 난데없이 폭탄에 터지고, 급수 시스템이 해킹당해 물이 단수된다. 중앙 집권체제가 붕괴되고 경제는 주가조작으로 파탄난다. 어디서나 모든 것이 마이너스가 된다.
감염 지역은 점차 나라로, 나라로. 마치 냉전시대가 다시 초래한 듯, 세계국가들은 서로 무신자와 광신도로 갈라진 채 대립하기 시작했다. 광신도 국가들은 연합하여 국제 협정을 위반하며 대량학살 무기를 꺼내들었다. 생화학무기는 물론, 전략핵무기, EMP, 마침내 ‘인공지진’ 까지. 결국, 광신도들은 자기들 무기를 남용했다. 지구 핵 중심부를 건드려 지구를 서서히 멈추게 하고 재생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꿈에서 보았던 그 날의 지진은 그들의 첫 번째 공식 공격이자, 마지막 공격이었던 것이다.
객실 문이 열렸다. 젠시를 맞이한 것은 라르의 어머니였다. 금방이라도 운 듯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오, 그래 젠시. 오늘도 배달 온 거니?”
“아......”
젠시는 그녀를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과 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위층으로 올라간 것이리라.
“안녕하세요.”
젠시가 접시를 내밀자 라르 어머니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는 거짓이었다. 그녀의 우울은 한 장의 미소로 감출 수 없었다.
“배달이 아니라 배급입니다. 저 또한 배달부가 아니라 웨이터의 개념입니다, 굳이 배달이라 부르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만, 라르는 어때요?”
젠시는 방 너머를 기웃거렸다.
“괜찮아. 네 덕분에 호전되고 있단다.”
“아, 건네 줄 게 있는데 잠시 들어가 봐도 될까요?”
“안 될 건 없다만......”
어머니는 어딘지 망설이는 듯한 말투였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표정과 행동이었다. 마지못해 하며 한숨을 쉰 후 들어오라고 말했다.
거실을 지나 라르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침대에 곱게 누워 있었다. 이불은 흐트러짐도 꾸김도 없었다. 젠시는 그녀 옆에 앉았다. 미소를 지어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불치병으로 호흡기를 단 채 긴 잠을 자고 있었다. 며칠 마다 이따금씩 깨진 했지만 아주 잠시 뿐이었다.
“라르, 네게 줄 선물 하나를 가져왔어.”
젠시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필라에게서 받은 사진을 꺼냈다.
그녀 앞에 사진을 가져다 보여주었다. 그리고 간병 의자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
“그래 맞아. 에펠탑이야. 네 어머니 고향이기도 하지. 너 에펠탑을 가지고 싶다고 했지?”
“......”
“필라가 너에게 전해달래.”
“......”
젠시는 고개를 돌리고 맨 윗 서랍을 열었다. 그녀의 사진첩이 자그만 공간을 혼자 채우고 있었다. 그 위로 사진 몇 장이 포개어 있었다. 이 안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억하고 있는 건 과거의 영광들이 모여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첫 페이지는 자유의 여신상. 두 번째 페이지는 아마 노이슈반스타인 성.
“여기 둘게.”
사진첩 위에 에펠탑 사진을 살포시 올려두고 다시 서랍을 닫았다.
젠시가 방에서 나오자 어머니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식탁 위의 접시는 아직 뚜껑을 열지 않은 채였다.
“젠시, 너에게 신세 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에 망설이는 듯, 간격을 두었다.
“그래도 그런 건 가져오지 않았으면 해.”
“사진 말인가요?”
어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다 지난 일이잖니. 돌아오지 않는 과거의 유품들은 이제 잊어야 해. 헛된 희망은 아무것도 없느니만도 못해. 솔직히 저 사진첩도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지만 워낙 애가 아끼던 거라서....... 하지만 난 더는 그 사진첩을 채우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도 그 애에게는 그게 필요할 겁니다. 그것이 살아갈 동기 같은 것이 있다면 더더욱요. 그것이 유일한 걸요.”
“난 잘 모르겠다. 이해는 간다만, 그게 꼭 좋은 건지 모르겠어. 옷이라던가, 음식 같은 다른 거라면 몰라도 예전의 유물이라면....... 사라져 벼렸잖니.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답답해서 그렇단다. 그러니 인제 그만해주는 건 어떻겠니. 지나간 건 이제 잊어 보낼 수 있게”
.
객실 문을 닫았다. 라르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지만 젠시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더불어 이해할 수 없었다. 정녕 과거는 버리는 것이 옳은 것일지, 그는 쉽사리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편으론 그렇게 까칠하게 대하는 건 이해가 갔다. 그녀가 그렇게 된 것은 분명 젠시, 본인의 책임이었으니.
젠시가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열차 내부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기관실에서 젠시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일이 끝나는 대로 ‘기관실’에 찾아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