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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안녕, 우리
작가 : 기린초
작품등록일 : 2020.9.9

희대의 살인마가 귀환한 것인가.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범인을 알고 있는 이들은…

 
12. 일상이라는 건
작성일 : 20-09-16 14:37     조회 : 336     추천 : 0     분량 : 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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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디의 다섯 번째 사건은 조금 더 개방된 장소라는 특이점을 보였으나 그 외의 여타할 증거들은 발견할 수 없었기에 또 다시 미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경찰들을 향한 여론은 부정적이기 그지없었다.

 

 것도 그럴 것이, 오래전에 일어났던 사건임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고 할 수 있는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단서를 잡지 못 해 가장 갑갑하고 미칠 것 같은 이들은 다른 이들도 아닌 바로 경찰일 것임을 대중들도 알 테지만 지금은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불안을 특정 대상을 원망함으로써 호소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난 여론이 빗발치고 있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열심히 단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발견되는 것이 없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 * *

 

 지은이 강력계로 간 것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갔다.

 

 러디가 선전포고를 한 것도 벌써 두 달 전 일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너덜너덜한 시체가 나올 것 같았던 예상과는 러디는 잠잠했다.

 

 해진의 입장에선 굉장히 다행스러운 것이긴 했으나 러디가 지은의 안에 존재하는 한 섣불리 마음을 놓은 순 없는 것이라.

 

 해진이 목 스트레칭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최근 배당된 사건 때문에 신경을 썼더니 근육이 뭉쳐버린 모양이었다.

 

 해진은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세수만 했다.

 

 제 방을 나온 해진은 언제나처럼 지은의 방으로 갔다.

 

 노크하자 지은이 일어나 있었던 것인지 ‘네.’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진은 들어가자마자 ‘풉.’하고 웃었다.

 

 오늘따라 머리칼이 더 부스스하게 떠 있어서 모습이 꽤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에. 비몽사몽 한 상태이긴 했으나 제 모습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는 지은이 웃지 말라며 성질을 냈다.

 

 “아줌마도 꼬락서니 장난 아니거든? 세수는 했어?”

 “꼬락서니라니! 당연히 세수는 했지!”

 “한 번 더 하고 와. 절대 그 얼굴은 세수한 얼굴이 아니야. 대박. 못생김이 하나도 안 씻겼어.”

 “뭐? 야!”

 

 해진이 제게 뭐라고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지은은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갔다.

 

 세면대에 있는 거울을 보고 자신도 흠칫했다.

 

 순간 해진이 웃을 만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싶어서 어젯밤을 생각해보았다. 머리를 말리지 않고 잤던가.

 

 아, 조금 덜 마른 상태에서 잠들긴 했는데…. 이런 몰골이 될 줄이야.

 

 지은은 제 머리칼의 냄새를 한번 맡아보았다. ‘괜찮네.’ 하며 수도꼭지를 올렸다.

 

 욕실 문고리에 걸려 있는 머리끈을 빼 머리칼을 한 갈래도 단정히 묶었다.

 

 지은이 욕실에서 나오니 지은의 침대에 해진이 널브러져 있었다.

 

 잠이 깬 것 같았던 건 착각이었나. 지은이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그의 다리를 툭툭 찼다.

 

 해진은 눈을 살짝 떠서 지은임을 확인하고 ‘너도 더 자.’라며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지은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해진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지은은 ‘왜 저래’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지은이 방을 나오고 나서 바로 해진도 지은의 방을 나왔다.

 

 지은은 거실 소파에 앉았고 해진은 지은을 보며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지은은 기지개를 켜며 고민을 잠시 했다. 뭐, 이내 결론이 났다.

 

 “밥 먹어요, 그냥.”

 

 지은의 말에 알겠다며 부엌으로 간 해진. 하지만 이내 다시 거실로 나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쌀이 없어. 사러 가야돼.”

 “심부름 안 할 거예요.”

 “심부름 안 시켜. 나랑 같이 갈 거야. 빨리 준비해!”

 

 해진은 막무가내로 지은을 일으켜 다시 제 방으로 집어넣었다. 지은은 ‘아악!’하며 소리를 빽 지르고 구시렁댔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해진의 말대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해진의 차 앞 좌석에 나란히 오른 두 사람. 근처에 있는 마트로 가 카트를 끌고 곧바로 식료품점으로 내려갔다.

 

 쌀만 살 것처럼 온 두 사람은 어느새 코너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온 김에 ‘겸사겸사’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았다.

 

 지은이 제과제빵 코너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지은이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케이크였다.

 

 새하얗고 달콤한 생크림과 새콤달콤한 과일의 배합이 환상적인 생크림 과일 케이크.

 

 지은은 케이크를 뚫어지게 보다가 해진의 먹고 싶냐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아직도 빚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가. 아니라니까, 정말.”

 

 해진은 지은이 가만히 보고 있던 케이크를 그녀가 먼저 발걸음을 뗀 뒤에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지은이 해진에게 빨리 오라고 타박을 줄 때쯤 종업원을 불러 케이크를 달라고 했다.

 

 해진은 지은을 보며 해맑게 웃었고 브이까지 해서 보여주었다.

 

 칭찬해달라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지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도 그녀의 모습에 픽 웃으며 해진이 카트를 끌고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올 때까지 서 있었다.

 

 해진이 종업원에게서 케이크 상자를 받았다.

 

 카트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혹여 세게 밀어 모양이 망가지기라도 할까봐 천천히 카트를 밀었다.

 

 “지은아, 뭐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살 거 다 샀는데?”

 “아니. 더 먹고 싶거나 그런 거 없냐고.”

 “쌀도 샀고 달걀도 샀고 내가 보고 있던 케이크도 네가 샀고. 뭐 더…. 우유?!”

 

 자신들이 산 것을 곱씹다가 ‘우유’라는 생각에 해진을 버려두고 유제품 판매대로 가버리는 지은.

 

 해진은 같이 가자며 지은의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우유를 비롯한 치즈와 요구르트까지 카트에 담은 뒤에야 그들의 장보기는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해진은 곧바로 요리에 착수했다. 지은은 요구르트를 하나 가져다 마셨고 이후로는 소파에 앉아서 TV를 시청했다.

 

 TV에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근래 들어 자주 보이는 정신적인 상태를 다룬 드라마였다. 왼편 상단에 드라마 제목이 적혀 있는데 그 아래 ‘전편 방송’이라고 찍혀 있었다.

 

 이미 끝난 드라마였지만 워낙 인기가 있었던 터라 오늘 전편 방송을 해주는 것이었다.

 

 지은은 조용히 드라마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거실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자 부엌에서 요리하고 있던 해진이 불안했던지 가스레인지 불을 줄이고 거실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지은이 다 마신 요구르트를 손에 꼭 쥔 채 TV 속으로 들어갈 듯 TV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해진은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거실로 걸어갔다. 지은을 보았다가 TV로 시선을 옮겨 드라마를 보았다.

 

 해진이 드라마를 챙겨보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챙겨볼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지금 드라마 속의 두 주인공이 주고받는 대화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 깊은 내용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두 사람이 어떤 감정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여자주인공은 말했다.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야.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혼자 그렇게 다 감당하고 아파하지 말아요.’

 

 남자주인공은 속에서 차오르는 울음을 참아내려 했다.

 

 끅끅대는 소리가 숨소리만이 존재하는 거실에 스몄다. 결국엔 울음이 터져버린 남자주인공. 여자주인공은 그런 그를 괜찮다는 듯 다독여주었다.

 

 해진은 잠시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해진은 생각했다. ‘저렇게라도 털어놓으면 좋을 텐데.’라고.

 

 해진은 앞치마를 입은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지은은 TV에서 해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해진을 불렀다. 하지만 그 가까운 거리에서도 들리지 않는 듯 그는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지은이 입을 비죽이며 ‘박해진!’이라고 큰 소리로 그를 다시 불렀다. 그제야 해진은 고개를 돌려 지은을 보았다.

 

 “드라마 취향이었어요? 난 드라마라곤 안 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10년 만에 처음 알았네. 뭐, 다른 드라마도 추천이라도 해줄까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앞치마 입고 그렇게 서 있으니까 진짜 아줌마 같아. 다 만들긴 한 거예요? 식는 거 아냐?”

 “다 만들었…. 아, 헐?! 타면 안 되는데!!”

 

 해진은 그제야 자신이 가스레인지 불을 올려 두고 왔다는 것이 생각났고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가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뭐, 다행히 냄비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타진 않았지만 조금만 더 늦었다면 타버릴 뻔했다. 아주 새까맣게. 무엇을 만들 것이었던지 조차 알 수 없도록 까맣게.

 

 국물이 생각보다 많이 졸여져 버려 걱정하며 맛을 보았다.

 

 해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살짝 짠 모양이었다.

 

 아, 저 표정은 ‘살짝’이 아닌가?

 

 지은이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가 보았다.

 

 냄비를 바라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해진의 옆에 섰다. 해진과 냄비를 번갈아 보다가 냄비 안을 들여다보았다. 딱 봐도 제 생각처럼 나온 모양새는 아니었다.

 

 “…먹을 순 있는 거예요?”

 “먹을 순 있는데. 그…. 좀 짜.”

 “진짜 ‘조금’ 짜요?”

 “…좀 많이 짠 것 같아. 버릴까?”

 

 지은이 해진을 살짝 밀어냈다. 그에게서 숟가락을 받아 맛을 보았다. 순간 인상이 찡그려졌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말대로 짰다. 좀…. 많이.

 

 해진이 지은의 눈치를 보며 다시 번 ‘버릴까?’하고 물었다.

 

 지은은 생각하는 듯 싶더니 밥이랑 같이 먹자며 전기밥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밥의 상태를 확인한 지은이 밥은 잘 됐다며 해진을 보고 씩 웃었다.

 

 자신이 무심결에 해주는 행동이 해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지은은 알고 있을까.

 

 지은은 밥주걱을 꺼내 밥을 퍼 식탁으로 날랐고 냉장고를 열어 간단한 반찬도 꺼냈다.

 

 해진은 그런 지은의 모습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거 그냥 가지고 와. 가운데 놓고 먹자.”

 “아, 어? 어.”

 

 해진이 냄비째 들고 식탁으로 갔다.

 

 지은이 미리 깔아 놓은 받침대가 식탁 가운데 올려져 있었고 해진은 그 위에 냄비를 놓았다.

 

 지은과 해진은 마주 보고 앉아 동시에 ‘잘 먹겠습니다.’라며 습관처럼 인사를 한 뒤 수저를 들었다.

 

 지은이 해진을 힐끗 보고는 꼭꼭 씹어 먹으라고 했다. 해진은 그런 지은의 말에 누가 누구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냐며 픽 웃었다.

 

 이렇게 살 수 있는데. 이들도 이렇게 살기를 바라는 것일 뿐인데.

 

 큰 걸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해진은 이런 날만 지속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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