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조심해!
검은 후드티를 입은 남자는 하린이 버둥거릴 수록 더 강하게 목을 졸랐다.
“이거 좀 놔! 놓으라고!!”
퍼억!
으윽..
태민이 검은색 후드를 입은 남자의 손목을 비틀면서 얼굴을 쳤다.
“하린씨 괜찮으십니까?”
“어? 신감독님!!!”
“제가 방금 경찰에 신고 했습니다.”
“경찰요!?”
그 때 태준에게서 맞은 검은 후드티의 남자가 일어 났다.
“누나! 이 사람 뭐야!! 왜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치고 그래요?”
“어.. 하준아 괜찮아?”
“누..나?”
“아..뒤에서 보고 오해하셨나봐요. 같이 사는 제 친 남동생이예요. 얘가 장난이 좀 심해서.”
“아..정말 이거 새로 산 후드티인데 완전 다 버렸네. 으..입에서 피도 나!!”
삐옹 삐옹 삐옹
경찰차가 멀리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치한이 나타났다는 신고 받고 왔는데요!”
“아.. 그게..”
태민은 곤란해서 말을 잊지 못했고 하린이 대신해서 설명했다.
“그럼 아무 문제 없다는 말씀이죠? 신원 확인은 됐으니 알겠습니다. 신태민씨라고 하셨나요? 앞으로는 사실 확인 후에 신고 부탁드립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들은 어이없다면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저기.. 죄송합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요.”
“누나. 그러니까 좀 팍팍 먹고 힘 좀 키워. 내가 살짝 목조르는걸 못 이기고. 안그래도 말라깽이인데 요즘 더 젓가락 같아지니까 이상한 아저씨가 따라 붙잖아.”
이상한 아저씨란 말에 태민이 하준을 쳐다 보았다. 그렇지만 지금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명백히 본인이 잘 못한 일이었다.
“도하준 그만해. 나 도와주시려다 그러신거잖아. 인사해. 여기 나랑 같이 일하는 신태민 감독님이야.”
하린이 태민을 소개하자 하준이 갑자기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오! 감독님이세요?”
하준은 바로 태도를 바꿔서 태민을 대했다.
사실 하준은 외국어고를 졸업하고 영어특기생으로 영문학을 전공한 수재였다.
혼자 멀리서 일하는 엄마와 누나의 용돈을 받지 않고 대학도 거의 장학금으로 다녔었다. 그러다 군대를 다녀온 후 작년, 24살 늦깎이 나이에 연극영화과로 다시 재입학 했다. 사람은 꿈을 쫓아서 살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곤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란 아르바이트는 모두 했다.
영어를 잘해서 영어 과외와 번역일을 해서 지금도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 충당하면서 살고 있었다.
“감독님이시라구요오.”
하준은 다시 초롱초롱한 눈으로 태민을 바라보았다.
“아..네네.. 어쨌든 오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오해를 해서 두 분을 곤란하게 했네요.”
“아니예요. 배우 하려면 여러 경험을 쌓는게 중요하니까. 오늘은 덕분에 치한 역할을 맞는 경험을 했네요. 좋은 경험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준이 해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저 자식이..왜저래..’
하린은 하준이 180도 달라진 태도로 태민을 대하는 것이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부끄러웠다.
“하준아 우리 이제 집으로 가자.”
“어 그래그래. 감독님,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치콜하실래요?”
“네?”
“아니 제가 누나랑 먹으려고 치킨이랑 콜라 사왔거든요. 저흰 둘 다 술을 못 마셔서.”
“아닙니다. 시간도 늦었고 저는 이만..”
“그래 이 시간에 무슨..그만 들어 가세요.”
하린은 당황하며 태준을 보내려고 했다.
“어허~ 누나 우리가 엄마 한테 그렇게 배웠어? 아무리 어렵고 없어도 먹을게 있으면 나눠 먹으라고 했잖아! 집도 요 앞인데 아~ 그러지 마시고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가시죠! 내일 어차피 토요일인데!”
하준 특유의 친화력이 발동을 했다.
태민은 미안한 것도 있고, 하준이 거의 떠밀다시피 했기에 하린과 하준의 집에 같이 들어갔다.
하린의 집은 오래된 집이었다.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래된 집에 있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벽돌로 된 2층 집이었다. 누군가 정성스레 관리하는 듯하게 정원도 정갈한 느낌이었다.
현관을 들어서니 티브이가 있는 벽에 가족 사진이 보였다.
엄마와 하린과 하준. 태민은 아버지의 부재가 눈에 들어왔다.
티브이가 없는 모든 벽면은 구석구석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어디든지 손이 닿는 곳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거실이 인상적이었다.
“아, 감독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좀 낡긴 했어도 이 작은 책상이자 밥상이 치킨 맛을 돋궈 준다니까요!”
태민은 하준이 권해준 자리에 앉았다.
하린은 어느새 부엌으로 가서 음료수와 치킨을 덜어 먹을 접시를 가지고 나왔다.
“두 분이서 사시는 집인가요?”
“지금은 둘이 살아요! 엄마는 해외 출장이 잦아서 거의 집에 없는 편이시구요.
혹시 신민 작가라고 아시나 모르시나? 책 좀 읽으시는 분들은 다 아시는데.”
“야! 도하준!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아 왜 엄마 유명한 작가잖아! 에세이도 많이 쓰고!”
“[시간이 지나면]의 신민 작가님요?”
“어? 엄마 책 읽으셨구나!”
하린의 얼굴이 굳었다.
태민은 하준이 자신의 엄마 이름인 신민 작가를 말하자마자 책 한권이 떠올랐다.
신민 작가라면 태민이 고등학교 때부터 즐겨 읽던 소설과 에세이를 쓴 작가였다.
그리고 그 작가 쓴, 소설과 같은 내용의 자조적인 에세이 [시간이 지나면]은
출판계에서 유명했다.
신민 작가 자신의 가정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내용이었으니까.
물론 자식들에 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거의 언급하지 않아서 베일에 쌓여있었지만 신민 작가가 남편과 사별한 후의 삶에 대해 굉장히 자세하게 나와있는 책이었다.
베스트셀러가 된 후에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에도 다 거절하고 오랜 기간동안 얼굴도 잘 드러내지 않는 작가로 유명했다.
“저 신민 작가님 팬입니다.”
“어! 우리 엄마 팬이셨어요?!”
“네, 고등학교 때부터 위로가 많이 되던 책이라서.”
“우와! 신기하다! 나중에 엄마 스페인에서 들어오면 말해드려야지!”
“스페인에 가셨나요?”
“네, 여행이요. 엄마는 스페인 배낭여행 가셨어요. 거기서 머물다가 남미 몇 몇 나라 돌아다니시면서 다음 작품 구상하신다구.”
“다음 작품이 또 기대되네요.”
하준이 정신 없이 떠들고 있을때에도 하린은 아무말 하지 않았다.
“저 과일 좀 내 올께요.”
태민은 그런 하린을 슬쩍 바라 보았다. 그 자리에 있기 싫은 표정이었다.
하린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서 참외와 복숭아를 꺼냈다.
‘도하린! 그만 좀 생각해.’
홍이 생각에 잠긴 하린을 불렀다.
“뭘 말이야?”
하린은 거실 쪽에 소리가 들릴까봐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아니, 너 저 사람이 책에서 너희 집 일에 대해서 읽은 걸 생각할까봐 신경쓰는거 아니야?’
너무 정곡을 찔러서 하린은 할말이 없었다.
“내가 아빠없이 자란게 자랑거린 아니잖아.”
‘너네 어머니는 책까지 쓰셨는데 뭘.’
“신민은 가명이야. 우리 엄마인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구.”
‘그래도 알만한 사람은 알아. 네 동생은 신경도 안쓰는 것 같은데.’
“쟤는 너무 어릴 때라서 잘 기억을 못하는 거구. 나는.. 내 기억엔 선명하게 아버지가 살아있어.”
하린이 칼을 가지고 과일을 깎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좋은 기억, 나쁜기억이 뒤엉켜 있겠지.’
“그래..좋은 기억도 있었지... 그런데 엄마의 책을 읽고 거의 나쁜기억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야.”
홍도 더이상은 말을 하지 않았다.
하린은 참외를 다 깎아서 접시에 담고 복숭아를 집어 들었다.
괜한 기억이 하린을 사로 잡았다.
어릴때의 기억.
가능하면 기억의 저 편에 묻어두려 했던 것이 꿈틀꿈틀 나오려 했다.
8살 생일날. 엄마 아빠의 방 옷장 안.
거기에 하린은 몰래 숨어 있었었다. 엄마 아빠가 들어오면 놀래켜 주면서 아빠와 엄마의 품에 안겨 생일 축하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데 하린은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고 말았다.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오르자 하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조심해!’
“아악!!”
하린이 과일을 다 깎아서 접시에 담아 거실로 가는 중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하린은 오래된 집의 부엌 턱을 못 보고 걸려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했다.
그리고 얇은 유리로 된 과일 접시가 하린의 발등에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순간 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갔다.
하린은 떨어지는 유리접시를 떨리는 얼굴로 쳐다 보고 있었고 소리를 듣고 거실에 있던 태민과 하준이 부엌 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태민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부엌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때 무언가 반짝 하는 빛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