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너 누구야!
“타요.”
“네?”
“타라구요. 집까지 태워줄께요.”
하얀색 SUV가 하린의 앞에 서 있었다.
하린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집으로 가던 신태민 감독이었다.
“괜찮아요. 택시타면 되요.”
“괜찮다고 말하는게 취미 입니까? 그렇게 촬영할 때도 괜찮다고 하더니. 얼굴은 나 이제 곧 죽을 것 같아라고 써있습니다.”
찡. 한쪽 머리가 아파왔다.
2년전부터 하린을 매번 괴롭히는 편두통이 찾아온 것이다.
사실 택시를 기다릴 힘 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남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도움을 받는걸 싫어하는 하린이었지만 지금은 아무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나도 모르겠다..’
철컥.
하린은 차 문을 열고 태민의 차에 탔다.
“집이 어디예요?”
“은평구예요...구청 앞으로 가시면 되요.”
“멀리도 사시네..네 가시죠.”
차 안은 적막했다.
태민은 조용히 째즈 음악을 틀고 말이 없었다.
하린도 찌를듯한 편투통 때문에 거의 비몽사몽이었다.
그렇게 30분가량 아무런 말 없이 차를 타고 달렸다.
내부순환로를 따라서 한참을 달리던 태민의 차는 정릉터널을 지나 은평구청 앞에 차를 세웠다. 하린은 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태민은 한동안 푹 잠이 들어버린 하린을 바라보았다.
너무 곤히 잠든 하린이 조금 애처롭게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그렇게 기절 할 듯이 숨을 못쉬더니 다른 스텝들을 보고 일을 시작 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태민은 그렇게 6시간도 넘는 촬영을 끝내고 아무렇지 않게 하린이 스텝들에게 감사 인사를 밝게하고 스튜디오를 나오는 것까지 보았다.
사실 괜찮은지 병원을 가는게 어떤지 묻고 싶었지만 친한듯 보이는 정우가 물어봐도 계속 괜찮다고만 하는 하린에게 차마 더 물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태민이 차를 타고 분당의 집으로 향하려는데 길에서 택시를 잡고 있는 하린이 눈에 띄였다.
머리가 아픈건지 아직 몸이 좋지 않은건지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휴우..”
태민은 살짝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45분.
여기서 잠시 더 자게 두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집에 들어가서 잠시라도 푹 쉬는게 나을 듯 했다.
“저기.. 대리님.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으음..아..으..”
살짝 기지개를 켜며 눈을 뜬 하린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잠시 생각을 못했다.
“여기가..아.. 벌써 다 왔어요?”
“새벽이라. 이제 그만 들어가서 주무시죠.”
“아..제가 너무 깊이 잠들었나봐요. 죄송해요.”
“들어가세요.”
하린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태민은 바로 차를 출발해서 가버렸다.
하린이 집으로 가는 골목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빗줄기가 굵게 변해갔다.
태민이 내려준 곳에서 10분 이상 골목을 걸어들어가야 하린이 사는 연립주택이 나온다.
이번 여름의 장마는 길고도 길게 느껴졌다.
‘비 맞고 가지마 감기걸려.’
“뭐?”
‘비 좀 피하라구.’
“됐어..다 왔잖아..나 지금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야..”
이제 목소리에 익숙해진 것일까.
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사실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누가 물어보고 있고 누구에게 답해주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아직 멀었는걸..’
“괜찮아. 금방 가면되.. 근데 머리 아프니까.. 너 좀 조용히해줄래,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요?”
“그래!”
“그럼 이만 전 가겠습니다.”
깜짝 놀란 하린은 뒤를 돌아 보았다.
태민이 비를 맞으며 쓰고 온 우산을 하린에게 건네주었다.
“왜 다시 오셨어요..”
“갑자기 비가 내려서요. 조심해서 가세요.”
“아..괜찮..”
“또 괜찮다는 겁니까. 쓰고 가시죠. 가겠습니다.”
“감사해요..”
손을 흔들며 태민은 다시 큰 길로 비를 맞으며 걸어 갔다.
하린은 우산을 쓰고 쓰러질 듯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기절 한 듯이 잠이 들었다.
***
하린은 꿈을 꾸었다.
어딘가 갇혀 있는 듯한 하린. 입이 테입에 의해 막혀 있고 숨을 쉬기 어려운 하린이 공포스러운 눈빛으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추워...누군가 나를 좀 꺼내줘....’
멀리서 아주 조그마하고 따뜻한 빛이 하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아..따뜻하다..’
하린은 답답한 느낌이 사라지면서 다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
‘이제 그만 일어나지.’
“으..음..좀만 더..”
그 목소리에 깨 살짝 눈을 뜬 하린은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반사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 뭐야!!”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지난밤에 야근을 했지만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을 때 지각이라니!
아침에 팀장과 함께 미팅이 잡혀 있었던 것이 떠 올랐다.
하린은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하는 것을 잊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알람을 못들은 것이 아니라 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런... 팀장이 또 난리치겠네…’
어제 하린이 얼마나 몸이 좋지 않았는지 느껴졌다.
거의 기절한 듯이 잔 것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오랜만에 잠은 푹잔 듯 했다.
하린은 핸드폰을 켜서 엄청난 톡과 전화를 확인했다.
회사에 전화를 한 하린은 팀장의 찌르는 듯한 야단을 들어야 했다.
욕만 안했지 거의 욕을 들은 기분이었다.
“차라리 욕을 하지..”
하린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간단하게 옷을 차려 입고 회사로 향했다.
광고회사의 좋은 점은 특별한 프리젠테이션이나 미팅이 없다면 편하게 옷을 입고 출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메이크업도 패스였다. 그렇게 달리듯 골목을 뛰어 나간 하린은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비로 월급 다 날리겠어…’
알뜰한 하린이 며칠째 택시비만 몇 만원을 쓴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앞머리 없는 짧은 단발의 머리가 얼굴을 간지럽혔다.
머리를 넘기며 하린은 창문 너머 성수대교의 모습을 보았다. 시야 넘어로 이어지는 강줄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택시는 하린의 회사가 있는 역삼동 방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강남 거리는 한산했다.
도착한 회사의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모두 회의실에 모여있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간 하린은 팀장에게 인사를 했다.
“하린씨! 지금..회사가 장난이야? 회의 끝나고 따로 보자구!”
팀원 모두가 하린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면서..”
아주 조그맣게 혼자 중얼거리는 미나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하린만 이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미나씨는 하린이 어제 늦게까지 촬영하고 들어간 것을 미안해 했다.
보통 다른 동료들이 새벽까지 촬영하고 다음 날 늦는 것은 팀장이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런데 팀장과 동료들은 하린에게는 늘 냉정했다.
하린의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가 하린이 있는 기획1팀으로 모두 몰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하린의 기획 능력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기획의 방향이나 아이디어가 하린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러다 보니 회의 중에 다른 동료들의 아이디어가 묻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드러나고 세상에 알려지길 원했다. 그런데 광고주의 선택이 거의 하린의 아이디어로 결정되기 쉽상이었다.
처음에는 하린을 일 잘하는 동료, 부하직원으로 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시기의 대상, 경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하린이 회의실로 들어갔을 때는 다행히 회의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신입 조미나씨가 조심스럽게 미리 의자를 준비해주어 더 소란스럽게 만들지 않고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하린을 챙기는 것은 그런 사정을 잘 모르는 신입 조미나씨 뿐이었다.
하린은 회의 동안 어제 수정컷을 찍은 촬영 보고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프리젠테이션에 대한 회의가 이어졌다.
회의가 끝나고 문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대리님!”
“어, 미나씨.”
“어제 촬영 잘 됐다고 난리예요! 더 잘 찍혔다고! 역시 대리님! 정말 멋지세요!”
미나는 하린을 동경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미나씨도 스튜디오 스케줄 잡아주느라 수고했어.”
하린은 이런 상황이 어색했다.
‘뭐야…미나씨..귀여운 구석이 있네..근데 눈 앞에서 저렇게 사람에 대해 칭찬하다니...’
사무실로 돌아가자 팀장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푹 잔게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오늘 야근 해야되는데 잘 된건가..’
아침에 들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목소리가 하린을 깨워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하린은 다시 이어지는 오후 미팅과 회의가 계속 되어 길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없었다.
하린은 팀원들과 저녁을 먹은 후 다음날의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며 회사에 혼자 남아서 발표 연습을 하며 파워포인트로 만든 기획서를 수정하고 있었다.
“젠 자동차는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서 올 해에는 혁신적인 기능을 타겟 소비자에게 소구하는 제품으로서…………….
아.. 기능이 똑같은데 무슨 새로운 기능을 넣었다고 말하라는 거야..
소비자들이 바보인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발표 준비를 하는 하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동차 광고는 감성을 흔드는 컨셉으로 가기로 했었는데 전면 수정되어서 기능성 광고를 해야했다. 그런데 이 제품의 기능은 2년째 실제 바뀐 것이 없었다. 그냥 제품의 디자인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광고주는 경제사의 비슷한 새로운 제품이 기능에 따른 광고컨셉을 가기로 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강조하지 않았던 기능을 새로 바뀐 것처럼 소구하는 것으로 전면 수정을 요구했다.
“소비자가 호구도 아니고..”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던 하린은 피로가 느껴졌다. 어제 하루 아무리 잘 잤다고 해도 계속 된 야근에 피곤한 하린이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탕비실에서 믹스커피를 따서 컵에 넣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부었다.
“하아암~”
긴 하품이 새어 나왔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면서 하린은 비몽사몽 살짝 정신을 놓고 꾸벅꾸벅 졸았다.
그 사이 정신이 없는 하린의 컵에 있는 뜨거운 물은 거의 넘치기 직전이었다.
‘정신차려!’
“어? 허억. 앗뜨..”
하마터면 하린의 손에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질 뻔했다.
“대체..누구야..아니 누구세요?”
이 목소리는 환청 같은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며칠 째 계속해서 하린이 필요할 때마다 목소리가 하린을 도와주었다.
오늘이야말로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누구..세요? 혹시..귀신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