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엘리베이터 안에서
“후..흡…허..헉…후….후…휴…”
“이제 숨쉬기가 어때요?”
“네..이제 많이 괜찮은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 남자가 준 봉투로 천천히 호흡을 하던 하린은 점차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괜찮아, 정전이야. 이제 곧 괜찮아질거야.’
그리고 그 목소리가 조금은 하린을 안심하게 만들어주었다.
띵똥.
정말 목소리가 말했던 대로 전기가 들어왔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어? 하린아? 신감독님?”
한정우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놀란 눈을 한 정우가 하린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바닥에 쓰러진 하린을 보고 얼른 달려가서 부축을 하며 일으켜 주었다.
엘리베이터의 남자는 정우가 달려와 부축하는 것을 보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스튜디오에서는 스텝들이 정전이라 잠시 멈추었던 촬영 세팅을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정우는 하린을 부축해서 정우의 분장실로 옮겼다.
하린이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바닥에 쓰러져서 페이퍼백을 하고 있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모양이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정우가 하린에게 물을 건네주었다.
“정우야, 나 이제 괜찮아.”
“아니, 하린아 어디 않좋은거 아니야? 왜 쓰러져있던 거야? 병원 가야 하는거 아니야?”
굵고 차분한 따뜻한 정우의 목소리가 분장실을 울렸다.
“나 정말 괜찮아. 아까 잠깐 정전이라….좀 놀랬었나 봐.”
“아..그래.. 정말 괜찮은거 맞지?”
“응, 정말 괜찮아. 고마워.”
정우는 씩 웃으며 하린을 쳐다보았다.
그의 웃는 얼굴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곧 촬영 시작됩니다. 준비해 주세요.”
그때 스텝이 들어와서 촬영 시작을 알렸다.
“나 먼저 나갈께. 준비하고 나와.”
하린은 먼저 촬영장으로 나갔다.
촬영장은 분주했다.
멀리서 하린을 본 스튜디오의 김성하 대표가 하린에게 다가왔다. 옆에는 아까 엘리베이터 안에서 봤던 그 남자가 함께 서있었다.
“아 도대리님, 여기 인사해요. 우리 스튜디오랑 같이 일하게 된 신태민감독. 뉴욕에서 영화 공부하고 광고랑 커머셜 단편 드라마 쪽에서 일하다가 지난달에 귀국한 감각있는 친구예요. 나랑 친한 대학 후배이기도 하고. 여기는 HW애드의 에이스이신 도하린 대리님.”
김성하 대표가 하린과 신태민 감독을 소개시켜줬다.
“괜찮으십니까?”
“아..네..”
아까의 상황이 기억나 어색한듯 하린은 태민에게 인사했다.
눈치가 이상한지 김성하 대표는 태민과 하린을 쳐다보았다.
“이미 둘이 아는 사이?”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해두지.”
“흠.. 뭐 어쨌든 인사는 했으니 이제 일을 할까요? 오늘 추가 촬영은 신감독이 할거예요. 오늘 촬영은 수정된 콘티를 찍는 거니까. 신감독 이거 봐봐.”
그때 정우가 메이크업을 끝내고 스튜디오로 나왔다. 그리곤 스텝들을 제치고 하린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따뜻한 차를 주며 이마에 손을 살짝 얹었다.
“하린대리님, 열도 좀 있는 것 같고. 앉아있어요. 아직 안색이 않좋아요.”
정우의 걱정스레 하린을 쳐다보는 눈빛.
사람들이 있을 때 정우는 하린에게 하린 대리님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하린이 일 할 때는 고등학교 친구라는 사적인 관계를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순간 촬영장 스텝들이 수근거리며 하린과 정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로 대하는 정우이지만 특정한 누군가에게 스킨쉽까지 하며
특별한 친절을 베푸는 모습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선을 느낀 하린이 정우가 내민 머그컵을 받았다.
“아..그러죠.. 대표님 수정콘티는 여기있구요. 제품이랑 배우 위치, 그리고 동선을 이렇게 짜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잠깐 팀장님과 통화 좀 하고 올께요.”
빠르게 김성하 대표에게 말을 전하고 바로 자리를 옮겼다.
하린이 잠시 나가서 팀장에게 현장을 보고 했다.
“네 팀장님, 말씀드린대로 지금 촬영하고 있구요. 네네. 알죠. 그 시간까지 끝내고 네네. 여기서 편집도 다 하는거구. 음악은 새로 나왔는거 깔거구요. 네.. 제대로 하겠습니다.”
휴.. 한숨 돌린 하린은 아까의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복도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과호흡증후군 증세가 온게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가 또 다시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정우는 남들 있는데서는 그렇게 친한 사이인 것을 티내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러고..
‘정우가 왜 저러지..’
‘왜 저러긴.. 너는 일할 때는 빠릿한데 이럴때는 눈치가 없더라.’
“뭐?”
‘눈치가 참 없으시다구요.’
하린은 주변을 살폈다.
또 그 목소리였다.
“대리님 통화 끝나셨으면 여기 한번 와보시겠어요?”
촬영 스텝 중 막내로 보이는 남자가 와서 하린을 불렀다.
“네. 금방 갈께요.”
하린은 잠시 숨을 골랐다.
아직도 호흡이 조금은 불편하게 쉬어졌다. 그래도 촬영 끝날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스튜디오는 시끌시끌 했다. 간단한 첫 번째 컷 촬영을 마치고 다시 다음 컷을 찍을 준비를 하기에 한창이었다. 그때 스튜디오로 다인이 들어왔다.
“어머, 안녕하세요. 김대표님. 오랜만이예요. 보고싶었는데 여기서 뵙네요.”
“어 다인씨. 더 이뻐졌네. 그렇게 예뻐지면 다른 여배우들은 어쩌라구.”
“대표님은 저만 보면 칭찬해주시구 늘 감사합니다.”
“하하하. 다인씨는 말도 예쁘게해.”
김대표는 웃으며 신감독 쪽으로 몸을 옮겼다.
“오빠, 오빠도 여기서 촬영중이네. 나 지금 여기스튜디오B에서 촬영하고 있었는데.”
“어. 다인아.”
유다인. 정우와 같은 소속사 배우이고 오랜 연습생 생활을 거쳐 걸그룹 여사친의 멤버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정우와 드라마로 호흡을 맞추고 뜨고 있는 배우이다.
다인은 촬영 중 잠깐 쉬고 있는 정우 곁에 가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정우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안 바빠?”
“나 완전 바쁘지, 지금도 새벽부터 광고 촬영하다가 이제야 잠깐 쉬는거야. 오빠 지금 촬영 왔다길래 얼굴보러 왔지.”
스튜디오로 하린이 들어왔다. 스텝들은 촬영 제품인 냉장고의 위치를 옮기며 다음 컷을 준비 중이었다. 정우와 다인의 모습이 보였다. 하린은 김대표에게 다가갔다.
“첫 번째 컷은 잘 나왔어요?”
“아 도대리님, 그럼 첫 컷이야 지난번 촬영 때랑 비슷하니까 쉽게 갔구, 이제 수정컷 여기서 부터 찍을겁니다. 아, 정우씨 준비해야 되는데 다인씨 왔으니까 좀 쉬게 둘까 안그래도 오늘 스케줄 꽉 찼었는데 겨우 빼고 왔다고 하더라구요.”
“네. 저희가 좀 급하게 스케줄 잡았죠?”
“아니예요. 뭐 늘 있는 일도 아니고, 다행히 우리도 여기 스튜디오 오늘 잠깐 비었으니까 괜찮아요. 도대리님이 우리 일 많이 주잖아.”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근데 저 부르셨다구요.”
“다른게 아니라 여기에서 정우 표정이랑 이런게 좀 모호하다구 신감독이 이야기를 하네. 한번 이야기해봐요. 컨셉이랑 연결되고 제품이 더 돋보이려면 지금 이 부분에서는 여기 이것보다는 동작을 좀 더 작게 표현하는게 좋겠다구.”
“신감독님과 이야기 해 볼께요.”
신태민 감독에게 가려는 하린에게 다인이 낀 팔짱을 풀며 정우가 다가왔다.
“하린대리님, 좀 괜찮아요?”
다인은 하린을 쳐다보았다.
“네. 저 정말 괜찮아요. 신경 안쓰셔도 되요.”
“정우오빠, 누구야?”
“HW애드 도하린 대리님이셔. 나 3년전 그 광고 메인으로 뽑아주신 분. 내 은인.”
“아~안녕하세요. 저 아시죠? 유다인이예요.”
“네.”
“저보다 조금 나이 있어 보이시는데 언니라고 부를께요. 괜찮죠?”
하린은 어이가 없었다.
‘언제 봤다고 언니야.’
“마음대로 하세요.”
“언니 되게 시크하시다. 도도한게 컨셉이신가봐요.”
“야! 유다인!”
정우가 다인의 말을 막았다.
“적당히 해라. 여기 일하러 온거 아니야? 얼른가.”
“알았어. 나중에 봐.”
다인은 하린을 한번 더 쳐다보며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스튜디오를 떠났다.
“쟤가 원래 그렇게 무례하진 않은데 오늘 이상하네. 하린아 몸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
“하린아, 내일 시간 어때? 우리 저녁 약속 한거 내일 만나자.”
“아..밥..사기로 했지..근데 내일은.. 나 야근해야되서. 프로젝트가 있어.”
“그럼 토요일 저녁 어때?”
‘그냥 오케이하는게 어때?’
또 그 목소리였다.
‘이제는 별걸 다 신경쓰는…’
“도대리님, 여기 콘티 좀 보시죠.”
신감독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우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급하게 스케줄 잡아준 것이 고마운 하린이었다.
“음..그래. 오늘 급하게 스케줄 잡아줬으니까.”
“뭔가 겨우 허락 받은 느낌인데.”
정우가 하린을 보며 씨익 웃었다.
어떨떨한 하린.
***
“다들 수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촬영이 끝났다. 다음 스케줄이 있는 정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촬영장을 나갔다.
나갈 때까지 하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다음 스케줄이 있어 매니저와 함께 가장 빨리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편집실에 촬영분이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새벽1시에야 겨우 하린은 집으로 향했다.
운전을 하고 가기는 무리인 것 같아 대표에게 말하고 차를 세워두고 가기로 했다.
‘아..머리야..너무 무리했나..아까 엘리베이터에서 그래서 그랬나..으..너무 자고 싶다. 순간 이동 같은게 있었으면..’
그렇게 하린이 겨우겨우 정신을 차려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휘청.
하린은 중심을 잃고 살짝 넘어 질뻔 했다.
‘아..왜 이러지?’
아마도 아까 엘리베이터에서의 충격이 남아 있었나 보다. 촬영 중에는 티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었던 것이 이제야 긴장이 풀려서 피곤과 함께 그 여파가 몰려왔다.
택시가 멀리서 다가 오고 있었다.
손을 내밀고 택시를 잡으려는데 조금 앞에서 어떤 술취한 아저씨가 그 택시를 타고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린이 서있는 곳은 새벽 시간에도 택시 잡기 어려운 강남 한 복판이었다.
다시 휘청.
하린은 이제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길에서 살짝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였다.
끼익!
빵빵!
하얀색 SUV 차 한대가 하린의 앞으로 와서 클락션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