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비오는 어느날
정신과 상담실. 하린은 상담을 받고 있다.
자신이 약간 이상한 것 아닌지 이빈후과도 가봤고 받을 수 있는 의학적인 테스트도 다 받았다.
그런데 하린은 실제로 귀에 들리는 말인지, 아니면 마음에 들리는 강한 소리인지 잘 모를정도로,, 그렇지만 너무나 분명한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건물 전체에 중앙냉방이 고장났다며 작은 선풍기를 틀어놓은 정신과 상담실.
의사는 했던 질문을 계속 다른 말로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다.
‘덥다 더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하린도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하린씨, 그러니까 들리는 소리가 명확하다는 말씀이죠?”
“네. 계속 들려요. 그것도 한명이 아닌 것 같아요.”
‘휴우..’
의사 자그마한 한숨소리. 유난히 귀가 밝은 하린의 귀에 울리듯이 그 소리가 들렸다.
“하린씨, 혹시 최근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닌가요?”
“작은 사고가 있긴 했지만 큰 일은 아니었어요.”
“어떤 사고였죠?”
하린은 일 주일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그날은 6월 말. 본격적인 여름 장마와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기상청 관측사상 최고의 더위라는 올 여름. 더위와 함께 긴 장마도 계속 되고 있었다.
뉴스에는 기상 이변이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하지만 프리젠테이션을 해야하는 하린은 이런 날씨에 높은 구두를 신발장에서 꺼내 신으며 한숨을 쉬었다.
‘왠 비가 이렇게 내려.. 하늘이 뚫린 듯이 내리는 구나..’
차 키를 찾던 하린은 키가 보이지 않자 남동생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씨. 너 이새끼. 차 가져가지 말라고 했지. 나 오늘 미팅 있다고.”
“누나, 누님, 오늘 나도 중요한 미팅있어.”
“니가 무슨 미팅이 있어!”
“내 친구가 미팅을 주선해줘서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있다니까. 누나 내가 오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나…”
뚜뚜뚜..
하린은 그냥 전화를 끊었다.
“카사노바 같은 놈..”
맨날 여자를 바꾸면서 늘 자신의 영원한 반쪽을 찾아다닌다는 하준이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날..”
하린은 할 수 없이 우산을 쓰고 지하철 역으로 걸어갔다.
우산을 썼는데도 너무 비가 많이 내려서 하린의 치맛자락과 어깨는 벌써 흠벅 젖었다.
하린은 이런 날에도 구두를 신고 출근해야 하는 미팅 스케줄에 짜증이 나려고 했다.
최대한 우산을 앞으로 하고 하린은 미팅을 위해 입은 정장을 빗속에서 구해내려 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골목의 벽쪽으로 걸으면서 비를 피했다.
빵앙!
끼 익!
퍼억!!
빗길에 속력을 내며 달리던 퀵 오토바이가 하린을 치고 넘어졌다.
우산에 가려 골목을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보지 못하고 사고가 난 것이다.
다행히 오토바이 운전자는 가까스로 하린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피했지만
하린은 넘어지면서 벽에 머리가 부딪쳐 잠시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 오토바이 운전자는 오토바이를 추스르더니 바로 도망쳤다.
아마 1분, 2분 정도 사이였다.
“아가씨 정신차려요. 괜찮아요 아가씨?”
요란한 소리였다. 아침 출근길이라 그런지 몇몇 사람이 몰려왔다.
움찔.
하린은 그 소리에 살짝 눈을 떴다.
눈에 희뿌옇게 안개가 낀듯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보세요! 정신 차려요!!”
‘정신차려!!’
‘아.. 누구지…목소리 좋네…’
‘정신차리고 이제 일어나야지.’
하린은 달콤하고 따뜻한 남자 목소리에 젖어 꿈인지 생시인지 잘 느껴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여보세요!! 이봐요!!”
찰싹!
“아!! 누구야!!”
그때였다. 누군가가 하린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것이다.
후두둑.
하린은 자신의 얼굴에 빗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아.. 으..머리야…누가 내 뺨을….!!!”
“이제 이 아가씨가 정신이 들었나보네. 일어날 수 있겠어?”
아까까지 들리던 달콤한 목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중후한 아저씨가 하린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디서 이 아저씨가 반말을 찍찍…’
그렇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다.
손을 잡아 일으켜주던 아저씨가 시계를 보더니 곤란한 얼굴을 했다.
물을 툭툭 털며 다시 일어났다. 아까 맞았던 뺨이 이제사 아려왔다.
그래도 하린은 자신을 도와준 중후한 아저씨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기 혹시, 오토바이 운전자는?”
“바로 도망치던데. 헬멧도 쓰고 있고 번호판도 없고… 그래도 오토바이 부딪쳐서 하나도 안다친게 어디야.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아저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으며 빠르게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가버렸다.
하린이 씩씩하게 일어나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우수수 흩어졌다.
도망친 오토바이에 대해 물을 틈도 없이 사람들이 사라졌다.
“아..잡았어야 되는데… 운이 좋기는…아.. 근데… 아까 그 감미로운 목소리는 누구지…”
하린은 아까 전 그 목소리를 생각하며 떨어진 우산을 주워서 집으로 다시 향했다.
미팅 때 이런 옷차림으로 갈 순 없으니 팀장에게 연락을 하고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갔다.
이 와중에도 팀장은 이 미팅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냐는 둥 늦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특유의 얇은 하이톤의 목소리로 짜증을 내는 것이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미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고요. 내가 한달을 이 걸 위해 준비했는데.’
하린은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프리젠테이션을 위해 준비한 기획서를 핸드폰으로 다시 읽는 중이었다.
‘아 정말..수박씨..바밤바.. 아니지.. 내가 지금 정신을 안차리면 한달 고생한거 다 날아간다.
도하린 정신차리자.’
“으.. 아파..”
살이 까진 팔꿈치가 아려왔다.
회사에 도착해서 프리젠테이션과 미팅을 끝냈다.
혹시 몰라 반차를 쓰고 병원에 가서 CT까지 찍어봤지만 아무 곳에도 이상은 없었다.
이마에 약간의 멍과 온 몸에 끓힌 상처들이 남긴 했지만.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하린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우유 사지마.’
편의점에 들러서 매일 사먹는 우유를 사려고 손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장대비가 내리는 아침부터 경미한 사고에 오토바이 운전자는 도망가고 오전 미팅은 죽을 쒔다. 다음 승진과 회사의 내년도 계약이 걸린 중요한 미팅이었다.
광고주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고 팀장을 따로 불러서 컨셉을 전면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3년이 넘은 광고주고 하린의 회사에서 가장 큰 건이었다.
올 겨울을 겨냥한 새로 나온 자동차 광고인데 거의 껍질만 바뀐 작년과 같은 제품이다. 감성적으로 가는 방향으로 합의했는데 갑자기 기능 설명을 넣으라니 이건 뭐.. 아이디어 부터 다시 내라는 소리였다.
광고주가 주님인 광고회사에서 까라면 까야하는 하루살이 대리인 하린은 억울했다.
그 메인 카피도 광고주가 오케이한 건이었다. 근데 다시하라니..
한달 동안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써낸 기획서가 바로 까인거다.
하루가 피곤했다.
입맛도 없었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한 하린은 편의점에 들러서 샌드위치와 우유나 사서 집으로 가려던 길이었다.
근데 편의점에 들어가서 샌드위치를 고르고 우유를 하나 집으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오늘은 그 우유 사지마’ 이러는 것이 아닌가.
좌우를 둘러 보았다. 편의점 직원은 다른 손님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편의점 직원은 1+1이 어제가 끝났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었고, 안경을 쓴 어린 학생은 아침까지 1+1이라고 봤다는 거다.
그런데 편의점 안에는 그 편의점 직원, 그 앞의 손님, 그리고 하린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지금 피곤하고 기분이 별로라서 헛것까지 들리나.’
우유를 집어든 하린은 계산대로 갔다.
“아..아침에 내가 분명히 봤는데..”
아까 그 손님은 결국 짜증섞인 말투로 자기가 아침에 1+1 봤었는데를 중얼거리며 편의점을 나갔다. 하린은 그 손님이 하는 작은 소리들이 웅웅 거리듯이 들렸다.
“저기 손님 죄송한데 이거 유통기한이 지났어요. 오전 근무자가 뺐어야되는데 깜박했나봐요. 제품 유통기한이 지나서 시스템에서 계산이 안되네요.”
놀란 하린은 직원을 빤히 쳐다봤다.
아까 그 목소리가 우유를 사지 말라고 했던게 떠올랐다.
같은 종류의 우유를 다시 집어들고 유통기한을 보았다. 모두 며칠씩 지나있는 것들.
그냥 샌드위치만 사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뭐야 이거’
그래 어떨때는 직감적으로 아닌 것 같을 때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이 드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직감이 발동한 것.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그 다음날 부터였다.
다음날 차를 가지고 나온 하린이 우회전을 하려고 할 때였다.
‘오른쪽 조심해!’
우회전을 하려는데 또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멈칫한 하린은 우회전을 하기 전에 다시 한번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 앞에 아주 작은 강아지가 길을 건너 가고 있었다.
‘끼익’
‘끄응…’
강아지가 애처롭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작은 소리가 들리네..뭐야.. 대체..어제부터.’
하린은 짖지 못하는 강아지인가보다 했다.
그래도 자꾸만 작은 소리들이 하린의 귀를 간지르듯이 들려왔다.
급정차를 하고 뒷 차에게 미안하단 표시로 깜박이를 넣고는 강아지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마터면 아침부터 강아지를 칠뻔한 것이다.
‘도대체 이거 뭐지?’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하린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목소리는 계속해서 마치 앞의 일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하린의 반보 앞에서 하린에게 경고나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며칠 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