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해. 어머니껜 안 이를테니까."
"일러도 상관없어, 뭐."
"너 진짜. 오빠가 담임 선생님 좀 찾아 뵈야 겠어?"
"알았어! 반성해. 반성하면 되잖아."
"백 번 네가 잘못 한거야."
"알았대도? 그래서 일 하겠다잖아! 이제 좀 있으면 시험기간인데! 그래도 일 한다고, 하겠다고!"
"시험은 원래 평소실력으로 보는 거고. 그리고 너 아직 중학생이야. 기말고사 한 번 망치는 게 네 인성 망가지는 것보다 백 번 나아."
"무슨 인성이 망가져? 그냥 다들 튀김이랑 맥주랑 먹고 있길래, 궁금해서 그런건데. 그냥 한 입만 먹고 버리려고 했어. 하준이가 먹어봤는데 엄청 쓰대서. 그래서 쓴데 왜 먹는지 궁금해서. 그래서 그런건데.. 오빤 무슨 내 인성이 망가졌다고.."
"화 난다고 남의 식당에서 물 컵 집어던지고, 너보다 훨씬 나이 많은 언니한테 대들면서 싸우고. 술은, 그래, 술은 궁금할 수 있어. 그것보다 그 식당에서 보인 네 태도가 더 문제인 거야."
"물 컵은.. 알아. 나도 던지고 후회했어. 그 언니가 자꾸 약만 안 올렸어도.."
"나중에 다시 가서 제대로 사과해, 오빠랑. 제대로 사과하고 반성하면 오빠가 맥주 한 캔 정도는 맛 보여줄게. 엉뚱한 데 가서 술 먹고 돌아다니지 말고 궁금하면 오빠한테 말해. 오빠랑 한 입 맛보는 건 괜찮으니까."
"치. 누가 술 사달랬나."
뾰로통하게 댓발은 나와있던 이연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척 하며 무게잡고 말하지만 도연을 무서워 할 이연이 아니었고, 역시 그 상황에서 제 오빠를 부른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자부하는 중이었다. 겁을 잔뜩 집어 먹은 하준이가 앞으로 절 만나줄지 안 만나줄지 그게 좀 걱정되긴 했지만 이만하면 대형사고를 친 것 치고는 조용히 넘어간 셈이었다.
알바도, 이제 겨우 열여섯인데 설마 진짜 빡세게 시키겠어? 오빠도 있는데, 하는, 하지를 결코 모르는 이연의 얕은 안도감이랄까.
"암튼, 다시는 그러지 마. 강이연."
"앰튼, 대시는 그르지매. 갱이옌. 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 무서울 줄 알구?"
"강이연. 오빠가 전화 한 통이면 너 일대일 특급으로 '정신개조 특전사캠프'에 입소시킬 수 있는 거 알아 몰라?"
"뭐? 오빠 나 지금 협박하는 거야?"
"아니. 딜. 거래를 하자는 거지."
"와, 미쳤나 봐. 오빠! 중헌오빠랑 다니지 마!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와 가지구!"
"그러니까 특전사캠프 가기 싫으면 앞으로 조심해."
어이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대는 이연을 귀엽게 바라보던 도연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연에게 으름장을 놓는데에 장난끼가 섞여있긴 했지만, 어린 동생의 '인성' 문제가 심각하게 고민된 건 사실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딸을 낳은 기쁨, 뭣 모르고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됐던 15년 전과는 다른 준비된 출산, 아기 때부터 어머니 미모를 빼어 닮아 인형같던 생김새, 뒤집기도 기기도 걷기도 전부 또래보다 빨라 늘 주변 관심을 한몸에 받던 아이.
그게 바로 이연이었다.
깨질까 망가질까, 금이야 옥이야 늘 벅찬 사랑만 받은 아이였고, 주변에 적이라곤 없던 아이였다.
그래서 저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진 건지.
물론, 그 원인의 80프로쯤은 제 책임이라는 걸 모를리 없는 도연이었다.
"일단 이번주는 오빠가 못 올 거야. 가게에는 내가 따로 연락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다음주부터 하는 걸로 하자. 벌 받는다고 생각하고 일하면서 성질 부리지 말고. 그 언니, 보통 언니 아니야. 너도 겪어 봤으니 알 거 아냐."
3년 전에 너한테 콜라 뒤집어 쓰고 라디오에 사연 보낸 언니도 그 언니란다.
하는 말을 지금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도연은 마른침만 삼켰다.
"알았어, 알았어. 아우, 근데 하준이가 왜 전화 안받지? 이제 내 전화 안 받으면 어떡해!"
벼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침 잘 됐다며 3년 전의 괘씸함까지 플러스로 부려 먹을지도 모르는데.
하준이가 전화를 안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네 주말이 문제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어, 여보세요! 하준아! 씻었어? 아니, 나 집 거의 도착했는데 너는 잘 들어갔나 해서! 웅웅, 많이 안 혼났어. 미안해, 오늘. 나 때문에 곤란했지? 웅웅."
천진난만한 얼굴로 하준이와 통화하는 이연을 바라보는 도연의 마음이 심란했다.
**
창문을 열어 둔 채 얼굴에 팩을 붙이던 하지가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패딩조끼를 집어 들었다.
다 좋은데, 뷰도 좋고 날도 좋고 다 좋은데, 추운 게 문제였다. 바닷바람도 차가웠고 방 안 공기도 차가웠다.
'그러게 이 방은 그냥 창고방으로 쓰고 너는 안쪽 방 쓰라니까.'
이 집으로 끌려 내려오고 첫 겨울, 추워서 못살겠다고 징징 거리던 하지를 향해 엄마가 잔소리와 함께 꺼내주신 조끼였다.
어릴 땐 몰랐는데 나이가 드니 추운 게 싫다고, 바닷가에서 못살겠다고 한마디 더 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었던 그 날 이후로 늦가을부터 늦 봄까지 이 조끼는 늘 하지와 함께였다.
물론, 이 방에서만.
아무리 추워도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뷰를 포기할 순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인 셈이었다.
"눈 오면 진짜 죽이는데."
깊은 겨울 밤, 바다도 사람도 다 잠들어 있을 시간, 때맞춰 흰 눈이 펑펑 내리면 그 풍경을 감상하느라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넋 놓고 창문만 바라보던 하지였다.
꽤 굵은 눈발이 바다에 내려 앉을 때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땅에는 소복히 쌓여 가던.
너무 깜깜해 바다도 땅도 분간이 안가지만 그 날만큼은 검은 건 바다요, 흰 건 땅임을 확신하던.
저 멀리 보이는 초지대교 난간 위도 흰 눈이 쌓이고, 더러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차들의 속도도 눈에 띄게 느려져 이런 날이면 눈 맞으며 초지대교 위를 걸어도 좋겠다, 싶던.
그러니 추워서 아무리 오들오들 떨고, 내복에 수면잠옷에 조끼에 양말까지 끼고 잔들 방을 포기할 하지가 아니었다.
딩동-
정확히 15분이 지났음을 확인하고 얼굴에 붙어있던 팩을 조심스레 떼어내던 하지가 알림음 소리에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한건식 집에 도착 했나보다."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낼 사람은 건식 밖에 없으니 보나 마나였다. 술을 제법 많이 먹었는데, 이 추운 날 다행히 입 멀쩡히 집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강도연입니다. 본의 아니게 자꾸 사과드릴 일만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주무실 시간이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오늘을 넘기기 전에 다시 한 번 사과드리고 싶어 메세지 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열 두 시 넘었으니까 오늘 넘긴거거든요?"
딱딱한 도연의 문자에 하지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입항인지 출항인지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연락할 일이 많을 것 같다며 번호를 알려달라더니, 이렇게 딱딱하고 사무적인 문자를 보내려고 그랬나 보다.
"버릇없는 꼬맹이가 오빠 하나는 잘 뒀네."
[아직 안자요. 괜찮아요. 꼬맹이 버릇 고쳐서 다시 제대로 사과받으면 되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최대한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를 쓰려고 애쓰느라 별로 길지도 않은 용건에 답이 10분이나 걸려 버렸다.
더이상 답이 올 것 같지는 않아 하지는 창문을 닫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이 방을 옮길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침대에 누워서도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작은 창이 아니라 가로로 제법 길게 나있는 창문이라 침대에 누워서 고개만 돌리면 바다도, 멀리 초지대교도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왜 이렇게 무식하게 크게 냈어? 이러니까 방에 우풍이 심하지! 누워 있으면 코가 시려, 코가!"
'5성급 호텔도 침대에 누워서 바다 못 봐, 이 기지배야! 복 받은줄은 모르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방 옮기라니까? 네가 원하는대로 안쪽 방으로 옮겨! 아주 너한테 딱이야. 코딱지만 한 창문에 앞집 건물 옆집 건물에 가려져서 바람도 안 들어와! 어때? 당장 옮길까?'
'푸하하. 5성급 호텔은 개뿔. 엄마, 바다도 바다 나름이지. 여기가 해운대야, 광안리야! 아니면 강원도 청정동해바다야! 웃겨. 대명항 바다는 돈 주고 보래도 안 본다!'
'어쭈! 이게 대명항에서 나고 자란 게 대명항을 무시해? 그러니까 방 옮기래도!'
'싫어! 코 시리고 귀 시려도 그냥 있을 거야, 귀찮아!'
'으이구, 저놈의 기지배! 그럼 징징대지나 말든가!'
'미쳤어? 엄마가 지겨워서 나 서울 보내줄 때까지 징딩댈 건데?'
'어이구 지겨워! 저놈의 기지배!'
그 땐 흘려넘겼던 엄마의 말이 요즘은 하지의 가슴에 와 닿고 있었다.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은 건, 바로 이 무식하게 큰 창문때문이니까.
그래도 두꺼운 방음 겸 방한용 암막 커튼을 치지 않으면 제 말마따나 입돌아가기 딱 좋아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하지는 커튼을 쳤다.
고새 아늑한 온기가 방안을 채우는 느낌이다.
큰일났다.
자꾸 이 방에 정들면 서울 못가는데. 서울 가도 향수병에 금새 다시 오게 될 텐데.
정 좀 붙이지 말아야지.
"그나저나 얘는 집에 잘 도착한 거야, 어쩐 거야."
먼저 연락은 하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궁금해 하지는 머리맡에 둔 핸드폰만 만지작 거렸다.
뭔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어차피 놔두면 제 기분에 따라 묻지 않은 일까지 술술 불어버리는 놈이니깐, 뭐.
며칠내로 불러내서 기분 좀 확실히 풀어줘야지, 생각하며 하지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