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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아주 사소한 연애
작가 : etcetera
작품등록일 : 2018.12.23

뛰어난 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까지 인정받은 30대 톱스타 배우 수한. 그러나 무성한 소문과 스캔들 속에 소속사에선 꿍꿍이를 숨긴 채 새로운 여자 매니저를 고용한다. 취업시장에서 허우적대다 톱스타의 매니저로 취직하게 된 지완. 자신의 역대 장래희망란에 ‘매니저’가 있어본 적은 없다. ‘연예인’은 있었어도. 그래도 사활을 걸기로 한다. 월급은 소중하니까.

 
9. 뜬금없는 소원
작성일 : 18-12-28 17:53     조회 : 254     추천 : 0     분량 : 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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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지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잠자코 그의 뒤에 가만히 있었다.

 

  보기 안 좋게 나뒹군 남자가 자존심이 상한 듯 거칠게 씩씩대며 수한을 손가락질 했다.

 

  “너 이 새끼, 내가 누군 줄 알고!”

 

  “알아봤자 엄마 아빠 밑에서 착실히 받은 용돈으로 거드름이나 피울 줄 아는 한심한 새끼겠지.”

 

  “이, 이 딴따라 새끼가...”

 

  “그 표현 꽤 오랜만인데.”

 

  수한이 진심으로 즐거운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이럴 시간에 지분 구조에 대해 더 공부하시는 게 좋겠어, JK물산 아드님.”

 

  수한이 자신의 아버지 회사를 이미 알고 있음에 남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버지 회사 주식마저 그깟 딴따라에 밀리면 쪽팔리잖아.”

 

  남자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분한 듯 이를 갈고 수한이 지완을 향해 돌아섰다.

 

  “가실까요.”

 

  매니저님. 뒤의 말은 아주 작게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며 수한이 앞장섰다.

 

  지완은 여전히 남아 있는 떨림과 그를 만난 안도감 사이에서 간신히 자신을 추스르고 그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호텔 뒤켠에 마련돼 있는 야외 테라스로 향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사람들이 붐비는 공간에서 분리되자마자 수한이 돌아보며 말했다.

 

  위기 상황으로부터 지완을 감쌌던 사람답지 않게 그의 얼굴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기서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해서...”

 

  “내 말이 그 말이야.”

 

  수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 왜 왔냐고.”

 

 남자의 차가운 눈빛은 다행히도 사생활을 침해받았다는 불쾌함이나 성가심이 빚어낸 결과물은 아니었나보다.

 

 오히려 약간의 염려 같은 게 묻어나는 것 같다고, 지완은 착각인지도 모를 감상을 느꼈다.

 

  “민철 선배한테 연락 받았어요. 잘못하면 나쁜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강민철, 이 자식.”

 

  “뭐라고 하지 마세요. 매니저니까 걱정되는 건 당연하잖아요. 제가 먼저 알았어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지완을 가만히 바라보다 수한이 피식 웃었다

 

  “누가 혼낸대?”

 

  “아니, 그냥 분위기가...”

 

  민망해진 지완이 작게 우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겁줄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지완이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노는 홀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 기억 안 나?”

 

  그 말에 그녀가 움찔했다. 아까 그 남자가 시도한 건 키스였지만 키스 후엔? 그걸로 정말 끝이었을까?

 

  지완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방금 전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러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힘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는데 작정하고 달려드는 남자한테는 역시 안 되네요.”

 

  “그걸 말이라고.”

 

  수한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며 씁쓸하게 웃다 지완이 새롭게 떠오르는 의문에 입을 열었다.

 

  “저라면 몰라도 수한씨 상대로 그런 성추행을 염려한 건 아니었을 텐데.”

 

 수한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해가 안 되는 듯 재차 말을 이었다.

 

  “민철 선배가 기겁하고 저를 보낼 만큼 여기에 있는 위험 요소가 뭐죠?”

 

  “네가 알면 곤란할 위험들이지.”

 

  “......”

 

  “......”

 

  “그냥 이대로 나가요, 우리.”

 

  “안 돼.”

 

  “왜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수한과 지완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가 매니저로서의 본분을 다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나도 원하는 바지만, 이번만큼은 곤란해.”

 

  “......”

 

  “집으로 돌아가. 많이 놀랐을 텐데 돌아가서 쉬어. 아, 혹시 신고하고 싶나?”

 

  무슨 뜻이냐는 듯 그를 올려보다 아까 남자가 벌인 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저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났다. 지완이라고 현실을 모르진 않는다. 남자가 파티에서 키스하려고 시도한 걸 신고해봤자 들어주기나 하겠는가. 그것도 유명한 기업의 아드님이라는데.

 

  그래도 신고할 거냐고 물어보고 챙겨주는 그가 은근히 고마웠다. 그에 지완이 그를 가만 바라보며 말했다.

 

  “어떨 때 보면 당신은 참 젠틀한데.”

 

  그 말에 수한이 한쪽 눈썹을 비죽이 들어 올렸다.

 

  “그 속은 도저히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비밀도 많고.”

 

  “꼭 전부 다 알아야하나.”

 

  “매니저니까요.”

 

  “시시콜콜 다 알려주는 건 연인으로 족해.”

 

  “......”

 

  “가서 쉬어.”

 

  남자가 마지막 인사말을 남기곤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돌아섰다.

 

  “해야 할 일이 뭔데요?”

 

  수한의 걸음이 멈췄다.

 

  “매니저가 여기까지 찾아왔잖아요. 그리고 당신은 성추행 당할 뻔한 절 구해주고 걱정도 해줬죠. 그러면서도 여기서 나가자는 부탁은 들어주지 않네요.”

 

  말하다보니 지완의 의문과 반발도 점점 진심이 되어갔다.

 

  “이쯤 되면 궁금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까지 꼭 해야 할 일이 뭔데요?”

 

  수한이 다시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아까 말했잖아. 네가 알면 곤란할 일이라고.”

 

  그의 눈빛은 냉정했다. 순간 지완의 머릿속에 선배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보아하니 너 저 자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저 새끼 쓰레기거든.’

 

  ‘한수한 이 자식이 소문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아? 여성 편력 심하지, 인성 쓰레기에 약까지 손댄다는 얘기도 있어.’

 

  설마... 아니죠? 아닐 거야. 아니어야 돼요, 제발.

 

  그를 마주보는 지완의 가슴이 불안함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제가 곤란해져도 괜찮다면요.”

 

 “내가 안 돼.”

 

  마치 답을 두고 빙빙 도는 스무고개를 하는 것 같다.

 

  지완은 답답함에 이를 악물었다.

 

  문득 스치고 간 그에 대한 의심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한 번 시작된 불길한 상상은 점점 불안감을 불려 갔다.

 

  그렇다고 그에게 이 의심의 정체를 풀어줄 질문을 대놓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을 완벽하게 믿지 않는다.

 

  여기서 던지는 잘못된 질문은 둘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만들어놓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완은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 수한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다.

 

  그 사실에 지완은 씁쓸하게 웃으며 차선책을 선택하기로 했다.

 

  “좋아요. 일단 더 이상은 묻지 않을게요. 대신에 저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소원?”

 

  갑자기 꺼낸 그녀의 엉뚱한 말에 수한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솟아올랐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소원을 들어달라고?”

 

  “네. 소원이요.”

 

  지완은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수한이 잠시 말이 없다가 마치 졌다는 듯이 힘빠진 웃음을 지었다.

 

  “내가 소원을 들어주면 너는 내게 뭘 해줄 거지?”

 

  앗, 그 생각을 못했다. 기브 앤 테이크라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 그녀는 깜빡하고 있었다.

 

 지완이 잠시 당황했지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내뱉고 봤다.

 

  “저도 소원 하나 들어드릴게요.”

 

 그 말에 수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좋아. 거래하지.”

 

  철컥. 어디선가 제 발로 족쇄를 걸어 채우는 소리가 들린 듯도 했지만 지완은 일단 오늘만 살기로 했다.

 

  “그래서 소원이 뭐지?”

 

  “제 소원은요. 여기서 우리 둘이 같이 이대로 나가는 겁니다.”

 

  “......”

 

  “......”

 

  “네 소원이랑 바꿀 만큼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매니저로서는 소원으로 빌 만큼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으니까요.”

 

  수한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래, 뭐 귀찮게 됐지만 할 수 없지. 소원이라는데.”

 

  그리고선 불길하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나도 영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의 웃음을 보며 지완은 내심 찝찝했지만 이대로 무사히(?) 그와 빠져나갈 수 있다는 데에 모든 가치를 걸기로 했다.

 

  한 번 결론을 내린 이상 미련 둘 것 없다는 듯이 한수한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이 파티가 벌어지는 홀을 가로질러 입구 쪽으로 향하는데 난데없이 장애물이 끼어들었다.

 

  “한수한.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그를 붙든 음성의 주인공은 고급 슈트를 차려입은 30대 남자였다.

 

  수한이 잠시 성가신 표정을 짓다가 교묘한 각도로 지완을 가리며 그를 향해 돌아섰다.

 

  잠시라고 할 수 있는 그 찰나에 수한과 지완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완은 남자에게서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며 서 있다 수한이 그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조용히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뭐야. 벌써 누구 한 명 낚은 거야?”

 

  남자가 지완을 가리킨다는 것을 수한과 지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각자 자기 할 일을 했다.

 

  수한은 계속해서 말을 돌렸고 지완은 무사히 문을 빠져나가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아주 간만에 만난 내 취향이라.”

 

  수한이 능글맞게 말하자 남자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호오, 이거 궁금한데.”

 

  “미안한데 내가 급해서 말야.”

 

  그 말에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지완은 그 사이 입구를 완전히 빠져 나왔다.

 

  “아, 뭐 이해해. 그런데 이거 아쉬운 걸.”

 

  방금 전까지 웃던 남자의 눈빛이 금세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오랜만에 이벤트가 마련돼 있는데 말야.”

 

  “아쉽지만 다음에 하기로 하지.”

 

  “음, 자주 있는 이벤트는 아니라서.”

 

  수한과 남자의 시선이 말없이 부딪쳤다.

 

  “오늘은 내가 운이 없나 보지.”

 

  수한의 차분한 응수에 남자가 침묵하다 느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다음에 또 기회가 오겠지. 좋은 시간 보내라.”

 

  남자가 그 말을 끝으로 미련 없이 돌아섰다. 수한은 그가 멀어져 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 지완이 빠져나간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지완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호텔 입구가 보이되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를 빤히 지켜보던 지완의 고개가 서서히 숙여지고 그녀는 조금 초조한 듯 발장난을 쳤다.

 

  문득 우습다고 생각했다.

 

  새삼 우리가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이라는 걸 깨달아놓곤 방금 전 둘은 한 마디 말도 필요 없이 팀처럼 합을 맞춰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은 수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분명히 나올 거라 믿으며.

 

  그깟 ‘소원’ 운운한 게 뭐라고. 안 지키면 그만인 것을.

 

  제 이율배반적인 마음과 행동에 어이없어 그저 발끝을 톡톡 두드리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땅으로 향해 있는 시야 끄트머리에 질 좋은 구두를 신은 두 개의 발끝이 걸렸다.

 

  그 발은 참으로 크고 듬직해 보였다.

 

  “차 안 가지고 왔어? 왜 밖에 서 있어.”

 

  남자의 목소리에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소원 성취한 사람치곤 표정이 안 좋은데.”

 

  그가 두 눈을 찌푸리며 말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표정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뒤돌아섰다.

 

  지완이 주차해 놓은 차를 찾기 위해 앞장서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 지금 나름대로 신나 죽을 것 같은 표정인데요.”

 

  피식거리는 그의 웃음소리와 함께 자신을 뒤따라오는 큰 발자국 소리가 듣기 좋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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