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 속 배열된 음료수 캔들이 그의 눈을 스쳤다.
그리고 네 글자가 그의 눈을 멈추게 했다.
[밀크커피]
노인은 한번 씨익 웃으며 동전 몇 개를 투입구에 넣고 밀크커피 밑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오랜만이네 이 맛, 네가 좋아하던 거였는데, 소연아, 그치?
노인은 옛 생각에 미소 지으며 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곧...
노인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하철이 지나간 대합실엔 아무도 없었다.
10시가 넘은 시각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이제 곧 그들이 올 것이다.
노인이 기다리는 그들이 올 것이다.
“장군님, 아직 결함이 조금 있지만,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을 겁니다! 몇 번 안 되지만 전에 말씀드린 그 멈춤 기능도 추가로 완성시켰고요! 미리 은퇴선물 드립니다! 함부로 쓰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장군님! 즐거운 여행 되십쇼!”
노인은 부대장이 준 시간조절장치를 꺼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과학수재 중 한명인 부대장은 노인에게 은퇴선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군, 이 기능도...
어느 순간, 노인의 얼굴은 경직되고 그의 몸 구석구석에 지진이 일었다.
왔구나!
“남현이 걔는 왜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거야? 사람 피곤하게! 안 그래?”
“그러게, 참, 피곤하게, 뭐 잘 가겠지 뭐...”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두 남녀가 계단을 올라오는 뒷모습이 노인의 눈에 비쳤다.
하얀색 떡볶이코트에 뒤로 멘 검은색 프라다가방, 굽 낮은 구두에 청바지와 회색 폴라 스웨터에 살짝 걸친 털목도리, 그리고 그녀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모든 것이 노인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노인은 그 모습을 보자니 얼어붙은 손가락이 떨려 가벼워진 종이컵을 떨어트릴 뻔 했다. 컵을 급하게 쓰레기통에 버리고 노인은 자판기 옆으로 숨었다.
그 두 남녀는 노인이 서있던 벤치에 앉았다.
“전철 오려면 아직 좀 멀었네?”
여자는 말했다.
“그러네?”
남자는 왠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근데 있잖아, 내 머리 어때? 괜찮아? 예뻐? 너무 칠렐레 팔렐레 한 것 같지 않아?”
“아, 아니야! 괜찮아, 괜찮은데 왜?”
“아니야~, 너무 파마가 쎄게 된 거 같단 말야.”
“그, 그런가?”
“너 칠렐레 팔렐레가 뭔지나 아는 거야?”
“아, 뭐, 어쨌든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여자의 말에 옆의 남자는 계속해서 변명스러운 대답들을 가까스로 이어나갔다.
넌, 뭘 해도 사랑스러워.
노인은 그 광경을 훔쳐들으며 생각했다.
어쨌든, 회장님의 비서처럼 졸졸졸 따라다니며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보이는 남자였다.
“민혁아~! 너, 나한테 컬러링 선물해줄래? 미진이가 벨소리는 보내줬거든.”
“그래? 알았어~! 컴퓨터로 네가 좋아하는 걸로 보내줄게!”
남자는 웃으며 재빠르게 대답했다.
자신이 또 뭔가 해줄 수 있어서 꽤나 좋은 모양이었다.
참, 바보 같군 그래!
노인은 피식 웃음이 났다.
이 순간은 노인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VR 영상인 셈이었다.
노인은 버튼하나를 누르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 남녀는 그 시공간과 함께 얼어붙듯 멈춰졌다.
사실, 임금의 허락 후 처음으로 온 건 이곳이 아니었다.
처음 장소는 이보다 앞선 구월의 어느 주말, 인천역 앞이었다.
여러 벤치 중 하나에 앉은 여자 셋이 보였다.
소연아!
내 눈은 그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곱슬머리에 프라다 가방을 메고, 회색, 검은색 줄무늬 상의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어떤 멀대같은 사내가 그 앞을 지나쳤다.
휴, 저때, 저 저...
난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을 쉬었다.
곧이어 흐린 기억 속 동아리 선배들과 동기들이 파릇파릇하게 내 앞을 이러 저리 스쳐지나갔다.
후훗, 참 어렸네, 다들!
나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으며 조용히 웃었다.
이날은 내가 소속된 사진동아리에 그녀가 들어오고 2학기의 첫 야외 촬영 날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첫 눈에 사랑하게 된 날이었다.
곧, 무리가 다 모여 인천역을 떠났다.
“다른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지팡이는 내게 물었다.
“아니, 조금만 저 무리를 따라 다녀보고 싶어!”
그러자 지팡이는 내게 의자모양의 이동수단을 만들어주었고, 그 시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투명 막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 무리를, 정확히는 그 속의 소연과 그 멀대를 곁에서 잠시 지켜보았다.
그 무리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카메라를 들이댔고, 점심때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그러고 있으니 뭔가, 찍어놓은 영상물을 모니터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된 느낌이었다.
오후엔 영종도로 가, 마저 사진촬영을 했고 놀이기구도 탔다.
그 멀대와 소연은 디스코 팡팡에 나란히 앉았다.
“장군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하신가요?”
괜히 그 모습을 보자니 창피함이 스멀스멀 올라와, 내 얼굴을 빨개 트려 놓은 것이다.
지팡이는 내 심박수가 올라가니 진단모드가 되어 날 진찰했지만 당연히 별 문제가 없었다.
“괜한 진료 안 해도 괜찮아!”
난 지팡이를 자제시켰다.
그리고 난 몇 시간 뒤의 부평역으로 갔다.
만취되어 일행에게 업혀오는 낯익은 여자가 보였다.
소연이었다.
그래! 저거야! 저 안쓰러운 모습에 더 끌렸던 것 같아!
나는 그 멀대가 그녀를 대신해서 그녀의 표까지 사고 있는 상황에서 이젠, 그들이 탄 전철 안으로 넘어갔다.
그 멀대는 취한 소연을 계속 바라봐주었다.
급행이라 계속 다음 역은 구로라고 떠있는데, 흠뻑 취한 소연은 왜 계속 구로냐고 물어보며 정신을 못 차렸다.
지금 봐도 그 모습은 내겐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 구로에서 멀대가 내리고 난, 자연스럽게 그 자리로 가 멀대 대신 그녀의 모습을 또 조용히 바라봐주었다.
“민혁아~”
날 그 멀대로 착각하는 건지, 소연은 날 취한 눈으로 가끔씩 이름을 부르며 웃어주었다.
그러곤 바로 고개를 숙였지만...
난 그녀가 신림역 그녀의 가족이 있는 좁아 보이는 집까지 가는 동안 지켜보았다.
같이 간 동기들도 각자 집으로 가야했기에, 전철역에서 전부 흩어졌다.
혼자 남은 그녀의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 뒷모습은 참으로, 그 뒷모습은 뭔가에 찌든 모습이었다.
그 시절엔 몰랐지만, 이미 그녀의 사정을 아는 지금의 나는 그녀가 참 애달프기 그지없었다.
마치 바람이 불어오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꽃잎 같았다.
바로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저 바라볼 뿐 잠금 버튼을 그럴 용도로는 누를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녀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 팔을 뻗었지만, 차마 내 양손은 그 뽀얀 얼굴엔 닿을 수는 없었다.
내 양손은 멈춰진 그녀의 볼 앞에서 덜덜 떨기만하다가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취한 그녀는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지금의 난, 그 멀대와 다른 게 뭐야?
갑자기 화가 났다. 눈물도 났다.
어차피 여긴 이미 내가 관여할 세계가 아닌데도,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난 그때처럼 무능력하구나...
그때도 그냥 무능력한 놈이었다.
그래서 그때 그녀를 힘없이 보내주었다.
아니, 그녀 곁에 머무를 능력이 없던 내가 세월의 강물에 떠내려갔을 뿐이었다.
그 수많던 기회들 속에서도 난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멀리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는 소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차올랐다.
실은, 처음부터 이미 난 그녀를 가질 수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빠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