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이별을 준비하는 다섯 가지 방법
작가 : 멀이
작품등록일 : 2018.12.10

[일상물/잔잔물/결혼 이후로 시작하는 이야기/시한부남주/와 지켜보는 가족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은 아가사 당신이니까요.”
“나 나쁜 사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 있어요, 당신.”
“별말씀을.”

시원스레 응수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튼 레슬리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어디 도망을 안 가죠.

“누가 들으면 도망갈 준비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도망갈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저런. 아가사 말은 바로 해야죠. 나는 남겨질 사람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죠. 앞으로 나아가기. 순간 부는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공기마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설풋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레슬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뒷말을 짐작이라도 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표정에 가벼이 입을 맞춘 레슬리는 누가 들을 새라, 조그맣게 속닥였다.

“세상 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겠어요? 몇 없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랍니다, 나는.”
“말은 참 잘해요, 레슬리.”
“그럼. 사업가인데.”

그래서, 레슬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가사는 짙은 녹음 속에 잠긴 자신의 남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멋진 준비를 하는 중인가요?”
“그럼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13화
작성일 : 18-12-25 14:54     조회 : 204     추천 : 0     분량 : 343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5. 사랑하는 시간

 

 겨우내 노랗게 죽어간 잔디가 다시 천천히 싹을 틔울 무렵, 또 한 해를 보낸 윌리엄은 학교를 졸업했다. 정확히는 유치부를 끝낸 것이지만, 그게 그거지. 한 해가 지났다고 그새 더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다 부모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오랜 시간이 남지 않은 것은 그도 알 수 있었다.

 

 “너 진짜 괜찮아?”

 “데브. 앞으로 한 번만 더하면 만 번이야. 괜-찮-아!”

 

 죽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죽상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윌리엄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아이는 아이답게 커야 한다며 걱정하는 엄마 앞에서는 편안하게 있으려 노력하지만, 바깥에서는 이미 소백작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을 윌리엄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몸이 안 좋다는 것은 자라면서 충분히 느끼고, 스스로 깨달아 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불행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잖아. 어른들께는 예의바르게 행동하라는 가르침만 아니었어도 이미 몇 번은 말로 싸웠을 텐데. 갈색 고수머리를 벅벅 헤집은 윌리엄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오랜 친구를 향해 손가락을 세우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또 누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하지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단 말이야.”

 “그냥, 돌아다니다가….”

 

 들었다는 말이겠지. 다정한 친구는 무심코 던지는 말에 상처받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본인이 그랬기 때문에. 집이 훤히 보이는 나무둥치 아래에 다리를 펴고 앉은 윌리엄은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어차피 언젠가 주위 사람은 날 떠나잖아. 좀 빠른 것뿐이야. 슬퍼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우리 아빠는 살아 있단 말이지. 아주 무례한 질문이야.”

 

 사랑하는 이가 떠난 후에 얼마나 슬프겠니, 하는 위로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오늘내일한다고 안쓰럽게 바라보는 시선과 물음은 달갑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가르친 것이 그의 어머니이기도 했고.

 

 “알아, 아는데. 그 괜찮아가 아니라 다른 괜찮아, 야.”

 “뭔 소리래.”

 

 데네브, 애칭 격으로 데브라 부르는 친구는 윌리엄 옆에 앉을 생각이 없는 모양인 듯, 주위를 슥 살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숙제 안했잖아. 그거 괜찮냐고. 오늘까지 안 해가면 다락방 전부 청소잖아.”

 “…망했다.”

 

 윌리엄 렌체스터. 방년 8세, 인생의 큰 시련을 만났다. 그 이름은 바로,

 

 “윌리엄! 너 또 수업 땡땡이!”

 “아 좀! 이모! 나도 좀 쉬자!”

 “얼씨구, 네 엄마를 좀 보고 말을 해라. 야, 어디가!”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집에 찾아온 에디스 로넨이었다.

 

 “아빠한테!”

 

 집 안에서 가장 청정구역을 꼽자면 당연히 아빠가 생활하는 곳이라는 것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윌리엄은 권력이 가장 높은 이를 향해 우다다 달려갔다. 여기라면 누가 뭐라 안 하겠지!

 

 “아빠!”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침대에 비스듬하게 앉아있는 인형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싸, 다행이다. 아빠가 깨어 있었다. 이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어!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당당하게 걸어들어간 윌리엄은 레슬리의 옆자리에 딱 달라붙었다.

 

 “우리 아가가 여기 온 걸 보니. 뭐 또 사고 쳤니?”

 “아빠는 내가 맨날 사고치는 애로 보여? 정말?”

 

 자신이라면 껌뻑 죽는 아빠 아닌가. 애교 가득한 얼굴로 올려다보니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을 끌어안는 손길이 뒤를 이었다. 윌리엄을 쫓아 복도를 달리던 에디스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는 부자의 모습에 제자리에서 발을 쾅쾅 굴렀다.

 

 “야, 레슬리. 네가 인간적으로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

 “큰 사고 친 거 아니면 좀 봐주지? 애잖아.”

 “퍽이나! 숙제 안 했다고! 조만간 수도 올라가서 학교 다닐 녀석이 이렇게 뺀질거리면 안 된다고!”

 

 어서 그 아이를 내게 넘기렴. 무섭게 까딱거리는 손에도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이는 꽤 뻔뻔하게 덧붙였다. 우리 예쁜 아들 괴롭히지 말아주겠니, 친구야?

 

 “아빠고 아들이고 진짜 똑 닮았어. 아가사 난 네가 필요해….”

 “나 불렀어?”

 “안녕하세요, 에디스 이모. 요 앞에서 만나서 같이 왔어요. 엄마가 파이 구워주셨거든요.”

 

 이제 막 외출에서 돌아온 차림의 아가사는 한 손은 치맛자락을, 한 손은 데네브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본가에 볼 일이 있다며 아침 일찍 길을 나섰던 아가사는 어수선한 집 안의 분위기에 살풋 미간을 찡그렸다.

 

 “누가 사고 쳤어?”

 “이쯤 되면 사고의 대명사는 윌리엄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네.”

 

 렌체스터 가의 최고 권력자가 돌아온 집은 잠시 들썩거리다 얌전히 정리되었다. 아들, 가서 나머지 숙제 하렴. 파이는 다 하고 오면 줄 거야. 에디, 수고했어. 좀 쉬어. 데비, 같이 파이 먹자. 잘라올게. 그리고,

 

 “여보?”

 “네, 불렀어요? 자기?”

 “내가 윌리엄 무조건 감싸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아니-, 그렇다고 막 혼낼 수도 없고.”

 “응?”

 “혼내야죠. 그럼요. 다음엔 그렇게 할게요. 약속.”

 “좋아요. 그럼 반성하는 의미로 파이는 아들하고 같이 먹어요.”

 “세상에. 아가. 제발 빨리 숙제를 끝내주렴.”

 

 아빠가 도와줄까? 장난스럽게 나온 말은 매섭게 쏘아붙이는 눈빛에 절로 수그러들었다. 숙제는 혼자 하는 거지, 그럼 그럼. 아군에게 배신을 당한 얼굴로 충격 속에 잠겨 있던 윌리엄은 터덜터덜 책을 가져와 레슬리의 옆에 펴놓고 반쯤 뒹굴거렸다.

 

 “아빠, 아빤 엄마 못 이겨?”

 “당연하지. 아빠는 엄마를 이겨본 적이 없단다.”

 “힝.”

 

 제 아내를 닮아 햇빛 아래에서는 잘 자란 밀의 빛깔을 닮은 머리칼을 살살 쓸어준 레슬리는 슬쩍 윌리엄의 책으로 시선을 내리고 작게 속닥였다. 그건 헬리오스-.

 

 “레슬리?”

 “네, 아가사?”

 “나와요.”

 “아가, 미안하다. 도와주지 말라는 구나.”

 

 냉큼 침대 옆에 세워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난 레슬리는 아들을 향해 곱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방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어떻게 아빠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절규가 귓가를 파고드는 것 같았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의 부인에게 더 잘 보여야 하는데 어쩌니. 전적으로 힘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지팡이를 짚은 손이 얕게 떨리는 것이 보였지만 레슬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가사도, 레슬리도 아무 말 없이 빈손을 맞잡았다. 이번엔 며칠 만에 일어났을까? 허리를 숙여 느슨하게 시선을 맞춘 레슬리는 장난스럽게 눈매를 휘어 웃곤 아가사의 볼에 스치듯 입술을 붙였다.

 

 “이걸로 화가 풀릴 것 같진 않네요.”

 “여보, 내가 오늘 지금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난 게 아니라 눈을 뜨니까 그대가 이미 나갔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얌전히 죽도 먹고 과일도 먹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아닐 텐데?”

 “세상에. 오랜만에 마음이 맞았나요?”

 

 속닥거리는 탓에 번져가는 숨결이 짧게 겹쳤다. 꿈결에서도 잊기 어려운 아가사의 향수가 코끝을 가볍게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눈꺼풀 뒤의 눈동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을 바라보며 레슬리는 안도와 기쁨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냈어요?”

 “좋은 꿈 꿨어요?”

 “나름대로.”

 “나도 나름대로.”

 

 언제나와 같이,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조용하고, 애달프도록 사랑스러운.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9 19화 2018 / 12 / 25 193 0 2578   
18 18화 2018 / 12 / 25 218 0 6627   
17 17화 2018 / 12 / 25 199 0 4158   
16 16화 2018 / 12 / 25 210 0 7392   
15 15화 2018 / 12 / 25 218 0 4872   
14 14화 2018 / 12 / 25 187 0 5869   
13 13화 2018 / 12 / 25 205 0 3439   
12 12화 2018 / 12 / 25 212 0 7264   
11 11화 2018 / 12 / 25 216 0 6853   
10 10화 2018 / 12 / 25 195 0 4401   
9 9화 2018 / 12 / 25 190 0 3991   
8 8화 2018 / 12 / 17 201 0 5322   
7 7화 2018 / 12 / 17 180 0 5883   
6 6화 2018 / 12 / 17 201 0 5370   
5 5화 2018 / 12 / 17 203 0 6925   
4 4화 2018 / 12 / 13 214 0 5960   
3 3화 2018 / 12 / 13 198 0 5155   
2 2화 2018 / 12 / 11 207 0 6451   
1 1화 2018 / 12 / 10 373 0 5700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꽃구름처럼
멀이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