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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이별을 준비하는 다섯 가지 방법
작가 : 멀이
작품등록일 : 2018.12.10

[일상물/잔잔물/결혼 이후로 시작하는 이야기/시한부남주/와 지켜보는 가족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은 아가사 당신이니까요.”
“나 나쁜 사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 있어요, 당신.”
“별말씀을.”

시원스레 응수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튼 레슬리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어디 도망을 안 가죠.

“누가 들으면 도망갈 준비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도망갈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저런. 아가사 말은 바로 해야죠. 나는 남겨질 사람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죠. 앞으로 나아가기. 순간 부는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공기마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설풋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레슬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뒷말을 짐작이라도 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표정에 가벼이 입을 맞춘 레슬리는 누가 들을 새라, 조그맣게 속닥였다.

“세상 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겠어요? 몇 없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랍니다, 나는.”
“말은 참 잘해요, 레슬리.”
“그럼. 사업가인데.”

그래서, 레슬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가사는 짙은 녹음 속에 잠긴 자신의 남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멋진 준비를 하는 중인가요?”
“그럼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12화
작성일 : 18-12-25 14:52     조회 : 207     추천 : 0     분량 : 7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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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

 

 죽음이 낯선 것은 아니다. 아가사는 늘 죽음의 곁에서 그를 보며 살았기 때문에. 몰락한 귀족 집안의 영애는 보호받는 것보단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더 익숙했다. 그런 그에게 죽음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닌, 늘 상시 그를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은 그녀의 손과, 사고방식에 강하게 남아 백작부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후에도 때때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곤 하였다. 지금 이때처럼. 습관적으로 자신의 손을 감싼 장갑을 마주 두드리던 몸짓이 부드럽게 손을 잡아끄는 손길에 막혔다. 의아한 시선을 올리자 눈을 감고 졸고 있는 줄 알았던 남편이 익숙하게 손깍지를 끼며 작게 웅얼거렸다.

 

 “예쁜 손 그만 괴롭히고, 좀만 자둬요. 한참 남았는데.”

 “당신이 자는데 내가 어떻게 자요. 좀 더 자요. 도착하면 깨워줄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창백하다 느껴지던 피부는 세월을 덧입을수록 그 빛깔이 점점 또렷해지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음은 당연하게 찾아와 그를 삼켜버리겠지. ‘나는 준비를 하는 중이랍니다.’ 언젠가 햇빛이 가득 내리는 녹음의 한가운데에서 말하던 이의 얼굴을 기억한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이가 바로 옆에 있는데, 자신은 그 죽음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던가?

 

 하루, 또 하루. 착실히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어쩌면 안심을 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늘 곁에 있어 당연하게 여겼을 수도. 문득, 레슬리의 쉬는 모습을 본 적이 꽤 오래 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그가 쉴 때는 같이 쉰다지만 오롯이 홀로 쉬는 경우는.

 

 미안한 마음을 담아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만가만 정리해준 아가사는 남편의 품에 안긴 아이와 남편의 자세가 똑같은 것을 깨닫곤 소리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사실 죽음이 찾아온다 한들 뭐 어떤가. 지금 우리는 여기서 아직 살아가고 있는데.

 

 헤어짐이, 이별은 그 누구에게라도 공평하게 찾아오지 않는가. 레슬리의 말마따나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다른 이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 차분히 시간을 음미할 수 있는 기회가 당연한 것은 아니니. 턱을 괸 채 자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아가사는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잘 자요, 좋은 꿈꾸고.

 

 ❦

 

 「레슬리가 쓰러졌어요. -아가사.」

 

 ❦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다. 어둑한 침실의 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조금씩 어둠에 익어가는 시야 끝에는 불편하게 앉아 졸고 있는 자신의 부인이 있었다. 이거 좀 좋지 못한 신호 같은데. 그저 편안히 자고 있었다면 부러 앉아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같이 누워있었을 테니.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지른 레슬리는 아가사의 잠을 깨울까,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혹시 몰라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침대를 벗어나 아가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잠은 좀 편하게 자고 있지. 익숙하게 안아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에 눕히려던 몸은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만나 덜컥 굳어버렸다.

 

 “-깼어요?”

 “레슬리?”

 “아무리 그래도 좀 누워서 자고 있지. 얼굴이 너무 안 좋잖아요.”

 “지금 누가 누구한테 말하는지 알아요?”

 “…나 얼마나 누워있었는데?”

 

 말끝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아가사가 지난 시간을 통틀어 눈물을 보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묻어나는 울음에 당황한 것은 도리어 누워있던 레슬리였다. 부인, 나 좀 봐요. 자기야, 여보? 아가사. 침대에 걸터앉아 아가사의 볼을 가볍게 쓸어주고 눈물을 닦아내며 부르는 말에도 아가사는 침묵을 선택했다.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난 자기가 울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는 당신을 달래준 적이 손에 꼽는 걸 어떡해. 울음을 참아보려는지 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뜨는 것에 작게 혀를 찼다. 조만간 핏물이 배어나올 것 같은 입술을 살살 쓸어주고 힘없이 딸려오는 이를 품에 안고 도닥거리자 조금씩 슬픔의 크기가 공기 중으로 번져갔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옷가지를 움켜쥔 손을 떼어내려 했으나 완강히 버티는 통에 맥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풀어 내린 머리칼을 쓸어주며 조용히 숨을 고르던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떨어진 이는 눈물로 얼룩진 볼을 거칠게 쓸었다.

 

 “그러다 상처 나는데.”

 “입 다물어요.”

 “네, 부인.”

 

 여전히 눈물을 가득 매달고 애써 숨을 고르는 제 아내가 안쓰럽고 애달파, 레슬리는 다시 아가사를 끌어안고 발갛게 물든 눈가에 입술을 묻었다. 나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일어나질 못하는데 그게 뭐가 괜찮아. 나 정말 당신 죽는 줄 알고-.”

 “결혼 전에도 가끔 있던 일이라 미처 말을 못했네요. 결혼하고는, 나름 멀쩡했는데.”

 “내가 뭘 잘못했나, 실수했나, 정말 죽을 거 같아서 유언장을 썼나, 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일어나서 하는 말이 ‘깼어요?’ 당신 진짜 미쳤어요?”

 “뭘 그렇게 생각해요. 내 건강이 그대 실수는 아니지. 나 아홉 살? 부터는 계속 이랬어요. 점점 깨어나는 시간이 늦어지는 것뿐이죠. 응?”

 “그러다 못 깨어나면?”

 “……죽는 거죠. 일어난 사람 앞에서 미래의 남편 이야기 할 거예요? 여기 현재의 남편이 있답니다, 아가사?”

 

 우리 알고 있었잖아요. 내가 죽을 것을 알았잖아요. 늘 대비하고 있었잖아요. 언제 어떻게 찾아올 죽음에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당연하게 상처 줄 수 있는 말이 입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차곡차곡 쌓여갔다. 알고 있음에도, 직접 겪는 것은 늘 새로워서, 그렇게 다짐을 하고 중심을 잡아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거 같아요. 지금 당장은 못할 것 같아요. 이렇게 불안해 미치겠는데, 내가 어떻게,”

 “아가사.”

 “어떻게 당신을 보내. 이제 처음인데, 이제 이걸 앞으로 몇 번을 겪을 텐데.”

 

 정신을 잃는 시간이 길어지고, 잦아지고. 1년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은 아가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이었지. 나흘을 내리 깨어나지 못했고, 자신의 주치의는 더 이상 쓸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 단언했다. 독을 버텨낼 수 있는 몸은 계속해서 약해질 것이기 때문에.

 

 끈질기게 살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쉽게 찾아오지 않기에 기적이라 하던데. 다시 소리죽여 울면서 간헐적으로 파르르 떠는 어깨가 눈에 밟혀, 그 위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괜찮아요. 익숙해지면 익숙해지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무조건 해내야 하는 숙제가 아니잖아요. 사실 나도 익숙하진 않아요.”

 “…….”

 “그냥 난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랑 함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보는데. 여보, 자책하지 말아요. 슬퍼하지 말라고는 안할게요. 그냥, 자책하지만 말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야. 응?”

 “당신 일인데 내가 어떻게 자책하지 않아요? 어떻게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아?”

 “그렇게 따지면 당신이 그 전을 포함해서 윌리엄이랑 생사를 오갈 때 나한테 했던 말은 뭐가 되나요? 분명 그대가 먼저 그렇게 말했어요. 자책하지 말라고.”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당신이 죽을 뻔한 건 내 잘못이 맞지만. 현명하게 제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레슬리는 자신이 끌어안은 사람을 더 힘주어 끌어안고 어깨 위에 제 이마를 얹었다. 나른한 몸은 다시 잠이 들면 또 언제 깨어나지 못한다, 일러주는 것만 같아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고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우는 모습을 그날 처음 봤어요. 지금껏 아가사 당신이랑 살면서 우는 모습을 열 번도 못 본 것 알아요? 그마저도 소리도 안 내고.”

 “운다고 해결되는 일이 없잖아요.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그대가 참 강해서 좋은데 그래서 또 서운할 때가 있어요. 기대도 괜찮은데, 많이 못 미더운가 싶고.”

 “결혼 전을 아는 사람은 지금을 보면 놀랄걸. 난 이미 많이 기대고 있어요. 그래서 더 상상이 안 가는 거예요. 당신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서.”

 “내가 장담해요. 그대는 또 잘 살아갈 거야. 걱정하지 말아요.”

 

 아직, 그리고 당장 닥쳐올 일도 아닌걸. 속삭이며 맺은 말을 끝으로 레슬리는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다 아가사를 품에 안고 다시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일단 우리 좀만 더 자고 이야기 할까요? 점점 푸르게 변하는 주변을 보건데 이미 새벽에 들어선 시간 같았지만, 뭐 어떤가. 지금 꼭 해야 할 일은 일단 쉬는 것이었으니. 가물거리는 시야 끝으로 다정한 온기가 느껴졌다.

 

 “…….”

 “깼냐?”

 “난 분명 부인이랑 있었는데 왜 눈을 뜨니까 네가 있지?”

 “네 부인은 윌리엄 학교 데려다 주시러 가셨다. 곧 올 거야.”

 “그래? 그럼 이만 좀 가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일주일동안 안 깨어난다고 편지 받고 왔더니 잘만 살아있네. 난 또 죽은 줄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잖아.”

 “아직 네가 할 일이 없는 것 같으니까 이만 가라. 장의사 데려왔으면 같이 돌아가.”

 “장의사는 두고 가려고. 언제 송장 치울지 모르니까.”

 “퍽이나.”

 

 가라.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손을 들어 휘휘 젓고 눈을 감았음에도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눈을 뜨고 왜, 입모양으로 묻자 헛웃음이 돌아왔다.

 

 “너 며칠 주무셨는지 아냐?”

 “일주일이라며.”

 “일주일동안 못 일어나고,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었어. 그리고 사흘. 부인이 알버트한테 전보를 넣었고, 알버트가 다시 나한테 말을 하고 내려오기까지 한 번을 안 깨더라. 부인은 지금 너 일어난 줄 몰라.”

 “삼일을 더 잤다고.”

 

 전과 마찬가지로 잠깐 눈을 깜빡인 것 같은데 시간이 손 안에 움켜쥔 모래알처럼 깜짝할 사이에 빠져 나갔다. 더 자주, 더 오래. 마치 죽음과도 같은 잠은 체력을 깎아먹으며 더 오랜 시간 그에게 엉겨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놀랬겠네.”

 “놀라기만 했겠어. 유언장도 가져와달라고 말하는데, …야, 아직은 죽지 마라. 오래오래 살아라.”

 “안 죽는다. 아가사 오면 말 좀 해줘. 일어나 있게.”

 “봐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인 줄은 몰랐다. 그리 중얼거린 소리가 잦아들고, 다시 고른 숨소리가 이어졌다. 이번엔 또 얼마나 자려고. 벤자민은 눈길을 돌려 문가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친구의 부인이자, 새로운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인줄 아나 보죠, 본인이.”

 “청초해 보여서 괜찮네요. 꽃이라도 장식해줄까 봐요.”

 “그거 괜찮네요. 일단 유언장 한 부는 책상 위에 올려뒀습니다. 밀봉한 상태라 열어보시면 안 되는 건 아실 테고. 알버트가 사람 더 보내준다고 했으니 집안일은 걱정 마시고요.”

 “다시 수도로 올라오라는 말은 안 하던가요?”

 “부인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겠답니다.”

 “어머나, 믿음에 고맙다는 인사는 내가 따로 할게요.”

 

 레슬리가 잠에 들고 난 직후보다 조금은 더 차분해진 모양새가 그 시간에 익숙해졌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이런 건 익숙해질 필요가 없는 건데.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는 것은 꼼꼼하게 틀어 올리지 못한 머리를 반쯤 늘어뜨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건넨 벤자민은 몸을 돌렸다. 뒤따라 나오는 이의 표정은 예상 외로 어떤 감정을 찾기는 조금 요원해보였다.

 

 “무슨 일 있으시면,”

 “에디한테 연락할게요.”

 “-네. 그러세요. 알버트랑. 다음에는 레슬리가 대화를 오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신도 믿지 않는 주제에 기적을 바란다는 것은 우습지만, 진실로. 벤자민은 진실로 다음에 그를 부를 때에는 기적이 찾아오기를 소망했다. 벽이 만들어내는 짙은 어둠에 가려진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용히 감내하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벤자민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요?”

 

 뭘? 눈으로 되물으며 아가사는 방금 나온 문을 닫고 나무 데크를 자박자박 걸어 내려갔다. 절정을 맞이했던 여름이 한풀 꺾이는지, 무겁게 흩날리는 바람은 조금 선선한 것도 같았다. 여즉 집 앞에 서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이를 향해 어깨를 으쓱인 아가사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야 해요.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지독한 여름이 저물고 있었다. 해를 가리며 길게 드리우는 구름이 하늘을 유영하고 바스락거리는 풀잎의 바람이 발목을 스쳐 내달렸다. 언젠가의 여름에 흙먼지를 날리며 머물기로 했던 것 같았는데. 아득할 정도로 멀게 느껴지는 시간을 찬찬히 되새긴 아가사는 조금 더 단단한 얼굴로 희게 웃었다.

 

 “그리고, 괜찮을 것 같아요.”

 

 피할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다잡아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없는 생활은 아직도 상상이 가질 않지만 언젠가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면 조금 더 즐겁게, 행복하게. 조용히 소망했다.

 

 ❦

 

 늘 곁에 존재하던 이의 부재를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실 몇 없을 것이다. 아무리 미워하던 이라도 순식간에 사라진다면 생각은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테니. 언젠가 요양을 하러 자신이 살던 곳으로 내려온 귀부인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환자를 대할 때에도 자신의 생활은 지키라고. 한없이 그에게 매달린다면 결국 자신의 시간마저 잃게 될 것이니.

 

 그 당시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 말은 다시 이렇게 되돌아와 그에게 맞는 해답을 전해 주었다. 간호와 일상을 분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아가사는 도와주겠다는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애써 그 둘을 떼어 놓으려 아등바등 힘주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윌리엄을 학교에 보낸다. 그 후에는 자신의 일거리를 마무리하고, 혹은 처리하는 사이사이에 잠시 레슬리의 상태를 살핀다.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오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다시 아침이 될 때까지는 자신이 옆에서 지켜보며 잠자리에 든다.

 

 마음 같아서는 옆에 달라붙어 이것저것 신경 쓰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그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 못했다. 직접 신경 쓰는 시간은 줄었음에도 아가사는 되도록 집 안에 머물며 빠른 보고를 듣길 청했다. 그가 노력한 최대는 겨우 이 정도였다.

 

 장난삼아 꺼낸 말을 진심으로 실행에 옮길 모양으로 꽃을 보내오는 벤자민 덕에 레슬리의 침대 주위에는 화려한 꽃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꽃집을 통째로 옮긴 것이 아닐까. 그 많은 꽃들을 받고 아가사가 헛웃음과 함께 뱉은 말이었다.

 

 꽃에 파묻힌 이의 옆에서 모처럼 일찍 일을 끝낸 아가사는 조용히 책장을 팔랑이며 고여 가는 시간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 따사롭게 비치는 햇살이 장식된 화병을 만나 온 세상을 하얗게 빛내는 탓에 잠시 손으로 눈을 가리고 초록빛의 잔상을 되짚었다. 안경을 바꿀 때가 됐나. 중얼거리며 손을 치운 시선의 끝에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푸른 여름이 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잘 잤어요?”

 

 나는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눈을 끔뻑거리며 시야를 맞추려는 이를 향해 농담을 던지자 작은 웃음이 돌아왔다. 어머, 안 믿나 보네? 계속 누워있던 탓에 혈관이 비쳐 보이는 볼을 가볍게 어루만진 아가사는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맞췄다.

 

 “어서 와요.”

 “다녀왔어요.”

 

 오랜 여행의 끝을 알리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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