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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이별을 준비하는 다섯 가지 방법
작가 : 멀이
작품등록일 : 2018.12.10

[일상물/잔잔물/결혼 이후로 시작하는 이야기/시한부남주/와 지켜보는 가족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이상형은 아가사 당신이니까요.”
“나 나쁜 사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 있어요, 당신.”
“별말씀을.”

시원스레 응수하고 집으로 향하던 발길을 튼 레슬리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해야 어디 도망을 안 가죠.

“누가 들으면 도망갈 준비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어. 도망갈 사람은 당신 아니에요?”
“저런. 아가사 말은 바로 해야죠. 나는 남겨질 사람이고, 앞으로 가는 사람은 당신이에요.”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죠. 앞으로 나아가기. 순간 부는 바람은 모든 소리를 잡아먹고 공기마저 멈춘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정적을 가져다주었다. 설풋 고운 눈매가 일그러지기가 무섭게 레슬리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싫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죠.”

뒷말을 짐작이라도 한 모양으로 가라앉은 표정에 가벼이 입을 맞춘 레슬리는 누가 들을 새라, 조그맣게 속닥였다.

“세상 누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겠어요? 몇 없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랍니다, 나는.”
“말은 참 잘해요, 레슬리.”
“그럼. 사업가인데.”

그래서, 레슬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가사는 짙은 녹음 속에 잠긴 자신의 남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멋진 준비를 하는 중인가요?”
“그럼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11화
작성일 : 18-12-25 14:50     조회 : 217     추천 : 0     분량 : 6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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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

 

 나무 1의 열연이 빛나는-어디까지나 아가사의 주장대로-연극이 끝나고 수도로 올라간 셋은 윌리엄이 가장 그리워했다는 음식을 먹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렌체스터 백작저를 찾았다. 아가사는 간혹 일처리를 위해 오갈 때가 있었으나 레슬리는 자리를 비운 이후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기에 백작저의 사용인들은 절로 분주히 집 안을 누볐다.

 

 “굉장히 민망하네요, 이거.”

 “왜요, 뭐 어때. 특별 서비스라고 생각해요.”

 

 살도 빠지고 낯빛도 안 좋아지긴 했지만 멀쩡히 움직일 수는 있는 사람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은 호시탐탐 레슬리를 위한 것을 대령하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 소동에서 벗어난 윌리엄은 이미 행복하게 식사를 마치고 간식을 먹으며 자신의 방과 오랜 해후를 나누고 있었다.

 

 “여보, 난 정말 무서워요.”

 “자기가 살던 집이면서 무섭긴 뭐가 무서워. 괜찮아요.”

 “안 괜찮아….”

 

 집이 이렇게 불편했던 적이 있을까. 레슬리는 결국 사용인들의 공세에 밀려 저 어딘가로 반쯤 끌려가버렸다. 순식간에 비워지는 주변에 아가사는 잠시 펜을 내려놓고 미간을 가볍게 눌렀다 뗐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키던 알버트는 웃으면서 답했다. 그러겠지요.

 

 내려두었던 펜을 다시 들고 종이로 시선을 내리는 것과 동시에 거세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끌려간 남편이 도망쳐 왔나? 의아한 시선이 서로 맞닿고, 주인의 내심을 짐작한 충실한 집사가 문을 열자 그 바깥에는 오랜 친우가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에디, 너 어떻….”

 “야! 수도에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말도 없이 왔다가 말도 없이 가려고? 네 남편 생각해서 찾아가지도 않았는데 얼굴은 재깍재깍 비춰야 할 것 아냐!”

 “말 좀,”

 “그리고 또 홀랑 내려가서, 뭐 언제 오게. 레슬리 죽고 나면 장례식에서 만나게?”

 “님?”

 “레슬리도 마찬가지야. 걔랑 나랑 십 년은 만났으면 좀! 어? 벤자민 그 자식은 촐랑촐랑 내려갔다 왔다는데. 너희 설마 나 따돌리니? 그래?”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겸사겸사. 아, 너 새로 사업 들어간다는 거, 그거 때문에.”

 

 이제야 생각이 났다며 박수를 짝짝 치고 주위를 환기시킨 에디, 에디스는 아가사의 앞에 있는 책상을 탕 짚으며 뒷골목 악당과 같은 미소를 만들었다. 우리 이야기 좀 해볼까?

 

 “그거 벌써 시작한지는 1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이디어만 있으면 뭘 해, 자본이 있고 기술이 있어야지.”

 “맞는 말인데 되게 뼈아프네.”

 “우리 쪽에 비슷한 것을 만들던 사람이 있어. 상용화되기 전에 전쟁이 끝나서 어디에 팔아먹을까 고민하던 눈치더라고. 인재는 뭐다? 돈이다. 낚아챘지. 이제 나 필요하지 않아?”

 “우리 쪽도 자본하고 기술은 있어. 겨우 그거가지고 넘어갈 것 같아? 나를 더 설득시켜봐.”

 “음, 좋아. 일단 몸체를 만들 만한 철을 구할 수 있는 광산이 북쪽 크라넨에서 나왔어.”

 “그리고?”

 “석탄 말고, 다른 것을 원료로 쓸 수도 있어.”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느냐, 물어오는 시선에 아가사는 펜을 내려두고 턱을 괴어 에디스를 올려보았다. 충분하지.

 

 “그런데 더 검토해봐야 하는 건 알지?”

 “좋아. 당장 계약서 쓰자고 하고 싶지만 사람 된 도리로 좀 참아볼게. 이제 본격적인 근황을 물어보자. 윌리엄은 어디 있어?”

 “자기 방에.”

 “그래, 그럼 십년지기 친구이면서 코빼기도 안 비추는 그놈은?”

 “명색이 내 남편인데, 그놈은 너무하지 않아?”

 “알게 뭐람. 친구도 아냐, 그 자식은.”

 

 남편의 친구가 남편보다 자신과 더 친하게 지내는 것에 대해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이성간이었다면 대번에 스캔들로 난리가 났었겠지만, 에디스의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로 그저 그런 여자들끼리의 우정으로 포장되는 이 현실 말이다. 생각에 잠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디스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 그 위에 앉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황궁이 반타작이 났지. 아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남편 있는 시녀랑 통정을 해? 의회에서는 황적에서 제명시킨다고 펄펄 뛰더라니까.”

 “저런. 그런 놈은 목에 밧줄 묶어서 전시라도 시켜야 하는데.”

 “난 가만 보면 네가 참 대단한 것 같아. 아, 맞아. 제너시스 백작이 철도 사업 건으로 의회랑 한판 붙었다가 이겼어. 덕분에 우리 사업은 좀 수월해질 것 같아. 그 백작은 못 가진 것이 뭐가 있을까?”

 “결혼 하면서 백작 위는 남편한테 넘어가지 않았어?”

 “넘어갔지. 알 사람은 다 알걸? 지금도 아리엘 제너시스가 뒤에서 움직이는 것.”

 

 애초에 그게 조건이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면, 말 다했지. 앉은 자리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듣지 못했던 수도의 모든 이야기를 늘어놓던 에디스는 생각났다는 모양으로 다시 박수를 짝짝 쳤다.

 

 “맞아. 백작부인이 너 보고 싶대. 아마 사업 관련 이야기일 거야. 그리고 아마 레슬리 사후에 관련한 작위 문제도.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묻더라고.”

 “제너시스? 왜 날 보고 싶다는 걸 너한테 이야기할까?”

 “네 잘난 남편님이 너 해코지할 것 같은 사람은 애초에 편지도 못 전하게 하니까?”

 “미안한데 중간 검토는 내가 다 한단다, 에디.”

 “아, 그럼 미안. 네가 영지에 내려가 있으니까 직접 연락할 길이 없어서 그랬겠지.”

 

 아무튼.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방문해도 좋다고 그랬어. 의자에 편안히 기대어 앉아 탁자를 톡톡 두드리던 에디스는 짜증이 날 정도로 반짝거리는 바깥의 날씨를 가만히 지켜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비 온다고 하더라.”

 “날이 이렇게 맑은데?”

 “응.”

 

 어느새 다시 서류를 뒤적거리며 펜을 든 아가사는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바쁘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손끝에 진하게 물든 잉크자국과 눈 밑을 거뭇하게 채우는 그림자는 이 상황이 아주 많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보여, 에디스는 잠시 말을 잊고 자신의 친구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왜, 뚫어지겠어.”

 “수도는 왜 왔어? 윌리엄 때문에?”

 “겸사겸사. 레슬리도 볼 일이 있다고 하고, 오랜만에 외식이나 할 겸. 매번 우리가 해먹었으니까.”

 “사용인은?”

 “있는데 집안일은 우리가 많이 하고 있어.”

 “집안일 하기 싫어서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니?”

 “상황 따라 하는 거지.”

 

 이 친구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주변머리만 빙빙 돌면서 말을 꺼낼까? 가늘게 뜬 시선이 책상 너머의 사람에게 닿았다. 괜히 찔리는 것이 있는지 황급히 도망가는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애먼 바깥을 다시 바라볼 뿐이었다.

 

 “너 뭐 아는 것 있지.”

 “내가 아는 게 뭐가 있겠어. 그래, 식사 잘하고. 가기 전에 연락은 한 번 주라.”

 

 아이고, 바쁘다. 전혀 바빠 보이지 않는 모양새로 빠르게 일어나 주변 정리를 마친 에디스는 숫제 도망가는 것처럼 후다닥 문으로 달려가 손을 흔들거리며 방에서 쏙 빠져나갔다. 뭐 알고는 있는데 말을 안 할 정도면, 레슬리가 시켰나.

 

 가능성이 높은 것은 생일 운운하던 말과 가장 가까운 것일 텐데. 그동안 안 챙겨준 선물이라도 챙겨줄 모양인가 보다. 아가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이 생활 자체가 선물처럼 다가와서 딱히 선물이 필요하다고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준다는 것을 마다할 건 아니니까. 안경 아래의 입매가 고운 호선을 그렸다.

 

 “엄마-.”

 “응? 아들 다 놀았니?”

 “아빠가 식사 하재요.”

 

 시간이 벌써 그만큼 지났나? 책상 위의 시계를 바라보자 훌쩍 지나가있는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저런. 모처럼 시간을 냈는데 다시 일에 파묻힌 부인에 대해 별 말하지 않은 남편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겠다. 아가사의 남편이 죽는 것은 사교계에서 이미 기정사실처럼 퍼진 말이었기 때문에 아가사는 해가 갈수록 렌체스터 백작가를 포함한 그 주변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차츰 늘어나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놓고 자신에게 총총 다가오는 아이의 손을 잡은 아가사는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며 아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케이크를 먹었는데, 아빠가 한 게 더 맛있어! 데브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 데브 불러도 괜찮아? 아빠랑은 맨날 놀아서 재미가 없는데, 엄마 바빠?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질문에 결국 두 손 두발을 다 들었을 무렵, 도착한 식당은 두 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한껏 채워져 있어, 한 사람의 말을 막기는 꽤 충분했다. 짐작이라도 했는지 살갑게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는 행동에서 아가사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남편의 볼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잘못했죠?”

 “네, 잘못했습니다. 우리 아가가 워낙 호기심이 많아서.”

 

 요리사를 도와 이것저것 만들고 있는 와중에, 위험할까 신경은 쓰이고 말은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엄마를 불렀다는 깨끗한 인정을 하며 레슬리는 순순히 두 손을 들었다. 항복.

 

 “그건 그렇고, 윌리엄이 데브 이야기를 계속 하는데 불러올까요? 어차피 그 집에서는 매일같이 노니까.”

 “크레이브씨 부부한테는 그럼 내가 말해둘게요. 알버트가 데리러 가면 되겠지. 그렇게 해요, 여보.”

 “좋아요, 그럼 아드님은 친구랑 놀게 두고, 부인은 나랑 잠깐 데이트 하실까요?”

 “언제는 데이트 안하는 사람처럼 그래요?”

 “밖으로는 잘 안 나갔던 것 같아서?”

 

 장난기를 가득 담긴 눈매가 곱게 호선을 그리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손길은 다정하게 다가왔다. 딱 봐도 무언가를 숨긴 것만 같은 모양새인데? 가늘게 흘기는 눈매를 손끝으로 문질러 펴준 레슬리는 퍽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면 알아요.

 

 ❦

 

 “왔…. 야. 내가 부인은 데려오지 말랬지!”

 “딱 봐도 뭐 하던 중이었네. 비켜요.”

 “그냥 알려주려고 온 거니까 그냥 넘어가주지?”

 “부인은 증인이 안 된다고 이 사람아-.”

 “에디스 불렀다. 됐냐?”

 “그래요, 유언장 쓰시려고 나도 데려온 거예요?”

 

 갑작스레 쏟아진 비에 젖은 옷을 털어내며 친구와 입씨름을 하고 있으려니 스산한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차마 자신의 옆을 바라볼 용기가 없어, 애먼 벤자민을 노려본 레슬리는 슬금 아가사의 손을 잡았다가 거세게 뿌리치는 것에 입술을 달싹였다. 화났어요?

 

 “안 나겠어요? 왜 갑자기 유언장을 바꾸려고 하는 건데.”

 “원래 유언장은 정신 멀쩡할 때 쓰는 거래요.”

 “원래 있는 유언장은 또 뭔데요, 그럼.”

 “제발 부부싸움은 나가서 해주실까요, 아가사? 여기 우리 측 증인도 하나 있거든요.”

 “그건 백작의 유언장이고, 지금 쓸 건 레슬리의 유언장이죠.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줄래요? 설명은 해줄 테니까.”

 

 응? 부드럽게 잡은 손은 놓지 않겠다는 것 마냥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잡은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대었다 떼어낸 레슬리는 주변이 조용해진 틈을 타, 제 부인을 빠르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자, 그럼 하던 것 마저 해볼까요?”

 

 황당한 시선이 섞여든 것도 같았지만 아마 처음으로 무시한 레슬리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빠르게 하고 끝냅시다.

 

 “재산 분할은 윌리엄이 스물다섯이 되기 전까지는 신탁으로 맡겨둘 거야. 부인의 몫은 윌리엄 몫을 제외한 모두.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부인이 전적으로 관리할 거고, 아 영지, 그건. 일단 공용으로 남겨 둘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네에, 그러시고.”

 

 오른손으로는 펜을 잡고, 왼손은 아예 단단히 손깍지를 낀 채 슥슥 유려한 글자를 써내려가던 레슬리는 얼추 완성된 자신의 유언장을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부족한데.

 

 “아, 부인이 시작한 사업은 백작가의 재산과는 별개로 구분할 거야. 그건 아가사 당신이 나중에 결정해요. 당신 몫이니까.”

 “백작가 재산으로 시작한 건데.”

 “초기 자금하고 투자한 금액만 제외하곤 그대 것이 맞죠. 대학 진학하고 싶으면 해도 괜찮아요. 지금 당장도 괜찮긴 한데, 지금은 그대가 싫다고 할 것 같고.”

 

 나한테 발목 잡히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말이 가볍게 나부꼈다. 당신의 가능성을 현실에 가둬두고 싶지도 않고. 다정한 눈웃음 너머에는 자신이 했던 말을 담아둔 확신이 비쳤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구긴 아가사는 익숙하게 아미를 꾹 누르는 손가락에 얼굴의 힘을 풀고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가끔 농담 삼아 내가 백작이었으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여성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직접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것도 금기시되던 시대가 이제야 겨우 저물어가고 있었으니.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은 그저 그런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 진짜 그럼 당장 대학 들어가요?”

 “하고 싶으면? 안 말려요.”

 “애정행각은 집에 가서 해주실래요? 빨리빨리 끝내고 집에 갑시다. 나 퇴근하고 싶어요, 고용주님들아.”

 “네가 그러니까 애인이 없는 거야, 벤자민.”

 “너는 그래서 파혼을 한 거야, 에디스.”

 “파혼과 애인이 없다는 건 다르단다. 정신연령은 윌리엄보다 낮은 녀석아. 난 내가 걷어찬 거고, 넌 걷어찰 사람이 없는 거고.”

 

 어디서 까불고 있어. 늘 그렇듯 당당하게 제 친구를 이겨먹은 에디스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부부를 바라보다 턱을 괴고 다리를 까딱였다. 제일 불편한 사람은 벤자민이 데려온 증인이겠지만, 뭐 어떤가. 비도 오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느릿느릿 고개를 흔들던 에디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가사의 눈길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으니까, 확실하게 정리하고 나와요. 기다릴게.”

 

 가족과 친족이 얻을 이익을 무시할 수 없기에 애초에 증인 선정에서 배제된 것 아니겠나. 모자를 쓰고 세워둔 우산을 챙긴 아가사는 또각또각 걸어가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훅 끼쳐오는 빗물 냄새가 코끝을 찌르르 자극했다. 갑작스레 쏟아진 비는 또 갑작스레 그친 모양이었다. 희미한 햇살이 섞여 든 공기 중으로 섞여 들어간 아가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아가사.”

 “응?”

 

 나가는 이의 발걸음을 붙든 레슬리는 제 친구들을 흘끗 바라보다, 그가 제 가족에게만 보여주던 미소를 그려냈다. 속이 안 좋아진다는 투덜거림이 언뜻 들리는 것도 같았으나 뻔뻔하게 표정을 유지하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늦었지만, 그리고 이르지만 생일 선물이에요.”

 

 한 번도 챙겨주지 못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챙겨줄 수 없을. 익숙하게 속내를 삼켜냈음에도 그의 부인은 용케 알아채, 가장 완벽하다 싶을 대답을 내주곤 하였다. 자주 짓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요. 최고의 선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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