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뛰어 다닐 때 45분이지 거뜬히 올라 가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젠 나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오기로 무리하다간 이놈의 자존심 때문에 황천길로 직행이다. 뉴스에서도 자주 봤다. 홀로 쓰러진 등산객.
뉴스에 나온다면 이놈들이 뭐라고 떠들어 제길까?
분명히 기 승 전은 쏙 빼고 결인 섹시에 미쳤다고만 할 놈들이다. 알면서도 실수를 번복해온 가물치는 이번만큼은 신중해야 했다.
소주에 노래방에 색시에 호텔 아니 모텔 비까지… 벌써 신중해졌다.
“뭐! 한 달씩이나?” 깜짝 놀라는 고민의 안색이 벌써 어둡다.
“그래! 나도 준비해야지”
비장한 각오가 섞였는지 목소리를 내리 깐 나지막한 말투. 뭔가 불길하다. 눈을 지긋이 감으려 머리채를 잡아 당기는 고민의 고민하는 표정에서 가물치는 벌써 승리를 예감했다.
자신이 문수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고민이 자기가 오르는 걸로 잠시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 같다.
그냥 툭 튀어 나온, 아무에게도 강요 받지 않은 말 한마디의 실행을 고민이 하는 줄 안다. 이 놈의 술 때문에… 벌써 취했다.
“그래! 한 달 줄게. 그때 못 올라간다면 풀 코스다”.
그러나, 고민은 취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우두는 빼고”
가물치도 순간의 취기가 사라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무슨 소리고?”
당연히 얹혀갈 줄 알았던 우두가 펄쩍 뛴다.
“너는 임마 네 의사를 분명히 안 했잖아. 그냥 얹혀가려고”
아무리 정신 줄 놓인 주색잡기에 빠진 한량이라도 홀로 간 술집 앞에서는 망설여진다. 주머니를 뒤진다. 고민한다. 내가 미친 놈이라고 흥얼거리며 술 집에 들어가더라도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갈 때까진 주머니를 계속 매만진다. 알코올 힘에 정신 줄이 빠져버린 그 이후가 항상 문제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정신 줄이 빠지지 않았다.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놈에게 누가 내편으로 스카우트를 하겠는가? 또 배신할 놈인데.
“그래! 인정. 넌 제외. 새끼! 주관이 있어야지”
고민은 확실히 주관이 있는 것 같다. 제 주머니 귀중히 여기는 놈은 남의 주머니도 귀중히 여긴다. 물론 그렇지 않는 놈도 있겠지만.. 그 ‘있겠지’ 만에 해당되는 한 놈이 우두다. 제외 대상이고 벌써 제외됐다.
“오늘 술값은 내가 낼게”
고민이 벌써 계산대에 서서 히죽이 웃는다. 저 웃는 모습, 표정.
‘어! 제외 대상이 아닌데…’
‘그래! 내일 일어나도 갈 때도 없다. 쉴 때 실컷 쉬자’.
사표를 냈다는 말도 했고 이렇게 밖으로 배회한지가 벌써 꽤 오래 지났다. 현실에 대해 떠 올리면 떠 올릴수록 들이키는 술잔의 속도만 빨라졌다. 벌떡 일어났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지금이 몇 시지?
새벽 5시. 아~~
내가 미쳤지, 미쳤지, 미쳤지. 그건 분명히 오래 전에,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이야기였다.
이 이른 새벽에 차범근이 최경주가 왜 떠오르나? 손흥민이 박인비는 왜 또 떠오르나? 차범근이 손흥민이캉 맞짱을, 최경주캉 박인비캉 맞짱을.. 게임이 안 된다.
창업이던 취업이던 뭔가는 해야 한다. 오르는 내내 머리가 복잡하다. 그렇잖아도 복잡한 지금! 문수산 등정까지 끼어 들었다.
적막하기까지 느껴졌던 신선바위 아래에 불빛이 하나 둘 켜진다. 팔짱을 낀 채 아파트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을 쳐다본다.
해는 벌써 떴다. 하루도 벌써 시작됐다. 가물치도 모든 현실을 잊고 45분 목표 달성을 위해 신선바위에서 전지 훈련만 하기로 한다. 이유가 어떻던 오랜만에 신선바위에 올랐다.
곧 아침 햇살에 사라지게 될 하나 둘 켜져 가는 아파트 불빛들. 밤새 이슬에 젖은 나무 잎에서 비릿하면서도 향긋한 향기도 난다. 잘 올라 왔다는 생각을 잠시, 잠시 사라지게 하는 이슬에 젖은 거미 줄들. 성가시다는 생각도 잠시. 모두 잠시 나타났다 다시 사라
진다. 겨우 500발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선 산에 500 발자국 흔적만 남겨서는 문수 산을 45분만에 오를 수는 없다. 새벽 운동치고는 성에 차지도 않는다. 산 아래 야음 호수가 보인다. 호수공원 둘레 길을 걷기로 했다.
오랜만에 와서인지 한가지 빼먹었다. 잉어들에게 줄 간식거리. 근처에 가서 뭐라도 사려다가 잠시 호기심이 생겼다. 만약에 아무것도 던지지 않아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궁금해졌다. 가물치가 지나칠 때마다 잉어가 물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동그란 눈으로 동그란 입을 쪼아 벌리고 앙탈을 부렸다. 아니나 다를까 빈손으로 쳐다보는 가물치에게 오늘은 한 놈도 입을 벌리지도 동그란 눈으로 쳐다 보지도 않는다. 이놈들이 가물치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한 마리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옛정을 잊은 것 같다.
한 마리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 잉어들에게 가물치란 인간은 호수를 지나치다 한낱 간식이나 던져주는 인간이었던가를 떠올리니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지금처럼 몇 발만 옮기면 밥도 반찬도 모두 차릴 수 있는 편한 지금이 아닌 그 시절. 꽁꽁 얼어붙은 우물 깨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아궁이에 가마솥에 떨거덕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밥 먹어라’하시던 어머니. 그 분의 손 내음이 그립다. 이른 새벽부터 저놈의 잉어 때문에 어머니 산소에나 가야겠다는 마음에 호수공원을 걷는 내내 가물치는 눈을 비비며 걷는다.
다행히 아침 햇살이 눈을 부시게 한다.
이른 아침에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중년의 남정네가 눈물을 흘리며 걷는 걸 보여 주기 싫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아이들이 힘들고 무서운 일이 생기면 꼭 엄마를 찾듯이 지금 가물치도 힘든 현실 속에 머물고 있는 건 맞는 모양이다.
유유자적이며 먹이를 찾아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면서도 엄마를 떠올리는 걸 보면 많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게 확실한 것 같다.
집에만 들어가면 절대 외롭지 않는데도 청승을 떨고 있다.
“여보! 밥 줘”
어릴 때나 지금이나 가물치는 ‘엄마’에서 ‘여보’ 로 바뀐 것 말고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엄마! 다녀 올게요”
아들이 대신 엄마라고 부르며 대충 밥을 먹고 가방을 울러 맨다.
“마저 먹고 가”
아내가 아들을 따라 나간다. 가물치가 그런 모자를 쳐다 본다. 세월이 참 빠르긴 빠르다는 마음을 가지고 멀뚱히 모자를 쳐다 본다.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마셔서인지 출근 길이 가벼웠다. 문수 산 몇 분만에는 벌써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여보! 수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