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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에밀
작가 : 어이비
작품등록일 : 2016.8.22

어머니의 첫사랑과 만난 나는
그에게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특함을 느꼈다.
이제 나와 그, 어머니는 어떤 선택을 하게될까?

 
제9부 폭력과 학대의 두 얼굴
작성일 : 16-09-22 14:02     조회 : 588     추천 : 0     분량 : 6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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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속적인 폭력과 학대는 악으로 치부되지만

  간헐적인 폭력과 학대의 일상화로 우리는 혼란과 착각에 빠져있다.”

 

 

  준우는 사랑마을학교에 원래 있었던 아이처럼 빨리 적응했다. 텃밭을 돌보는 일은 지운, 나영과 함께 했다. 준우가 처음 사랑마을학교를 들어가던 때는 겨울이었지만 봄에 돌볼 작물을 결정하고 재배계획을 짜고 땅을 일궈야 했으므로 지운, 나영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다. 평일 오전의 수업은 수업마다 모둠이 달리 정해졌다. 사랑마을학교는 과목이 따로 있다기 보다는 교사가 수업 때 정한 책이나 주제를 한달 정도의 시간을 두고 함께 공부했다. 사랑마을학교에 들어온지 이년이 넘은 아이도 똑같은 것을 공부한 적이 없다고 하니 교재나 교과서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아이들은 평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계속해서 바뀌는 모둠별로 과제를 함께 해결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빨리 끝내면 오후와 저녁 시간은 자유였다. 텃밭가꾸는 모둠별로 텃밭을 돌보기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피아노 연주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지운이 덕분에 준우는 초등학교 때 잠시 배웠던 기타를 다시 연주하게 되었다. 매일 저녁에는 지운과 합주에 열을 올렸다. 몇 년전 어느 분의 기부로 사랑마을학교 식당 건물 이층에는 밴드 악기와 음향시설이 셋팅되어 있었다. 준우와 지운은 자유롭게 곡을 정해서 스스로 연습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말이 되면 이뤄지는 활동의 선생님들께 여쭤보면 되었다. 사랑마을학교의 주말은 교육기부를 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목공, 수예, 프로그래밍, 공예, 한국화, 악기 등을 배우고 배드민턴, 축구,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도 즐겼다.

  사랑마을학교에도 의무는 있었다. 평일 오전의 수업과 텃밭가꾸기, 식사 준비는 사랑마을학교 학생이라면 꼭 참여해야만 하는 활동이었다. 주말의 활동을 포함한 나머지는 자신의 상황과 취향에 따른 자율적 참여였다. 준우는 목공과 기타, 배드민턴 활동을 주로 했다. 준우가 설계한 삼나무로 만든 정리 상자와 책꽂이는 교육기부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멋지게 완성되었고 그대로 준우의 기숙사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준우 역시 다른 아이들이 완성한 작품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었다.

  사랑마을학교는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더 좋은 위치에 서기 위한 경쟁이 불필요했다. 교사는 아이들을 통제하고 평가를 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상황을 제시하고 조언을 해주는 역할로 존재했다. 사랑마을학교에는 평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마을학교 아이들은 매일 ‘하루나눔’이라는 일기와 비슷한 형식의 기록장을 작성했다. 이는 학교 홈페이지에 별도로 마련된 웹공간에 기입했다. 아이 스스로가 읽을 수 있는 대상을 설정할 수 있었다. 준우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체 공개를 해서 ‘하루나눔’도 함께 공유했다. 주로 그날 배운 것들, 활동과 그에 관련한 자신의 느낌, 소감, 앞으로의 계획이 간단하게 포함됐다. 아이들은 하루나눔을 쓰면서 하루를 정리하고 잠에 들었다. 이렇듯 아이들은 그동안 받았던 타인의 평가 대신 자기 스스로의 평가에 익숙해져 갔다. 누군가와 경쟁하고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의 만족을 깨닫게 하기 위해 봉구의 제안으로 이 제도가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모둠별 토론과 전체 발표를 위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공부했다. 시험을 보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답이 없었다. 무조건적인 암기는 불필요했다. 준우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사랑마을학교에서 폭력과 학대는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했고 몇 명되지 않은 아이들은 함께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 협력해서 ‘나’보다는 ‘우리’가 함께 행복한 것이 좀 더 긴 시간을 지나면 훨씬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임을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경쟁과 결과를 강요하지 않았고 모든 아이가 존중받았다. 그래서 사랑마을학교 아이들 사이에서도 폭력과 학대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물론 아이들끼리 사소한 다툼은 있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랑마을학교에서 폭력과 학대는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사랑마을학교에 들어오기 전 준우가 가정과 학교를 포함한 성장의 공간에서 폭력과 학대를 만나는 것은 빈번하게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약자였고 어른들은 강자였다. 어른들에 의한 폭력과 학대는 아이들의 관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적어도 준우가 경험한 성장의 공간은 대체로 그랬다. 물론 그렇지 않은 어른들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더욱 준우를 혼란에 빠지게 한 것은 폭력과 학대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 때문이었다. 폭력과 학대는 악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필요악'이라는 주장이 준우를 더욱 힘들게 했다.

  준우가 일곱 살이 되던 무렵,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의 병설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승희는 두고두고 준우에게 운이 좋았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준우는 몇 개월간 유치원 교사의 행동으로 괴로움을 느꼈다. 몇 차례 학부모 항의에도 교사의 기이한 폭력과 학대는 계속됐고 결국 학부모들의 반 교체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유치원 교사의 폭력을 준우가 직접 당한 것은 아니었다. 유치원 교사가 폭력과 학대를 가하는 대상은 늘 특정한 서너명의 아이로 정해져 있었고, 그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학대를 준우가 속한 반 아이들은 항상 지켜봐야 했다. 유치원 교사의 규칙과 지시를 수행하지 않으면 자신도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면서 안도와 공포가 함께 느껴졌다. 처음으로 공포감을 느꼈을 때 준우는 집에 가서 승희에게 자신이 경험한 것을 얘기했다.

  - 준우야. 설마 선생님이 아무 잘못도 없는 애한테 그러겠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야. 너도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

  그 후 준우는 승희에게 다시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해당 유치원 교사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자 승희도 학부모들의 연락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그동안 왜 말 안했니? 그 선생, 나쁜 사람 같이는 안보였는데. 그런 일 있으면 앞으로 꼭 엄마한테 말해야 한다. 근데, 그 애들도 뭐, 썩 좋은 애들은 아닌 것 같더구나. 친구 잘 사귀렴. 뭐, 그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부모들도 꽤 있던데.

  승희 역시 여느 부모들과 다르지 않았다. 자기 아이가 피해자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 우리 일상 속에 퍼져있는 폭력과 학대를 견디어 여기에 무뎌지는 것도 자신의 아이가 경쟁에서 살아남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아이가 피해를 당하지 않으면 눈을 감아버리는 학부모들이 대부분이었다.

  유치원 교사의 폭력과 학대는 단순히 욕설을 하고 아이들을 밀치거나 때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늘 자신의 반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려 했고 자신의 권위로 아이들을 억압하려 했다. ‘주사놀이’는 그녀의 기이함을 보여준 극단적인 사례였다. 주사기에 다양한 색상의 물감을 탄 물을 넣어놓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직접 그 주사기를 아이들에게 찌르기도 했다. 규칙을 어기고 자신의 지시에 불응하며 장난치는 아이들을 마치 단두대 앞에서 죄인을 다루듯이 앉게 하고 마음의 병이 있어서 이 주사를 맞으면 낫는다는 식이었는데, 아이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처벌의 권한이 있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처벌(혹은 치료)의 대상임을 반 아이들에게 공개하고 주사기를 찔러 처벌(혹은 치료)을 행함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아이들을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대상 학생을 특정 학생으로 한정한 것이 그 교사가 이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겠거니 준우는 생각했다.

 

  준우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하고 만난 담임은 국어가 담당교과인 사십대 후반의 남교사였다. 교실은 그만의 왕국이었다. 준우를 포함한 소수의 아이를 제외하고는 교사의 욕설과 체벌을 일상다반사로 받아야 했다. 날씨가 더워 선풍기를 켜는 것도 담임교사에게 허락을 맡아야 했으며 그의 수업시간에 아이들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과목이 국어였으므로 하루에 한번은 수업시간에 그를 만나야했는데 매시간 주어지는 말도 안되는 과제 - 빡지쓰기, 예습을 빙자한 선행교육의 강요, 누군가 대신 해주는지도 알 수 없는 동영상, 시화 제작 등- 를 내고 이를 수행평가에 반영하는 그의 교육방식은 준우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항의하는 학부모에게는 허리를 굽신하며 자세를 낮추는 그에게 끝까지 항의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요즘 아이들도 어느 정도의 체벌은 필요하다며 옹호하는 학부모도 있었다. 자기 자식이 크게 다치지 않는 한 자신을 대신해 몇 대 때리는 것을 용납한다는 것이다.

  - 어디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쳐다보나? 미쳤어?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거야?

  - 내가 시간 남아서 이러나? 다 니네 위해서다. 니네 공부 열심히하라고 분위기 만들어 주는거 아니야. 니네가 초등학생이야? 고등학교 안 갈거야? 나중에 뭐해 먹고 살거야? 지금 공부하란 말이야.

  - 이거 안 해오는 애들은 내일 남아서 세배로 하고 갈거야. 각오해.

  - 댄스? 밴드? 그런 동아리는 왜 하는거야? 방과후에는 남아서 공부하고 가, 그런데 가지말고.

  - 준우나 수진이 봐봐. 얼마나 착하나? 똑같은 급식먹으면서 저렇게 못하나?

  준우는 담임교사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이 제일 싫었다. 저항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 그 담임교사를 만족시키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러나 준우는 어렸고 어른들의 얘기에 저항한 적이 별로 없었다. 어린 시절, 선택적 함묵증으로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긴 했지만 그것은 준우의 의도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본능이었다. 준우는 담임교사 앞에서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이 그에게는 순종과 굴복으로 받아들여진 탓이었다. 의미없는 과제를 해서 가지 않으면 체벌을 받아야하고, 폭력과 학대를 받는 아이들을 지켜봐야하고, 그런 폭력과 학대 속에 지쳐가서 아이들끼리도 폭력을 휘두르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중학교는 매시간 수업을 하는 교사가 달라서, 그렇지 않은 교사들도 소수지만 존재했다. 그런 교사의 수업을 듣는 것으로 마음의 치유를 받았지만 전체적인 시스템을 극복하기에는 부족했다. 체육활동이 많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 많은 문제를 수반했다. 체육활동 중에 일어나는 아이들간의 크고 작은 다툼, 그로 인한 폭력들, 교사의 통제없이 방임되어지는 체육활동은 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체육활동 중에서 축구, 피구, 농구 등 단체로 승부를 위주로 하는 것이 많은 데 이런 활동은 능숙한 교사의 세련된 진행과 통제가 없으면 이 활동 자체가 정글이 되어 폭력이 난무하게 된다. 준우는 아직 열네살이었고 이러한 제도에 저항하기에 약하고 어렸다. 준우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우리 삶에서 본능적인 것들은 분명히 있다. 약자에 대한 폭력과 학대는 그런 본능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아이들과 노인들, 또 어떤 시대의 여성들, 특정한 계급은 무자비한 폭력과 학대 속에 살아왔고 그것은 사회를 유지시키는 밑바탕이 되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이러한 폭력과 학대가 당연시 되는 사회가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최대한 타인에 대한 폭력과 학대를 멈추고 배려와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다간 많은 성인들이 깨닫고 우리에게 전하려한 보편적 진리이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세대에서는 폭력과 학대는 일상적이었다. 이러한 폭력과 학대를 그리워하는 기성세대들도 있다. 그런 그리움은 폭력과 학대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분명히 옳지 않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나의 부모로부터 신체적인 폭력이나 학대를 당한 적은 없었지만 언어폭력에 의한 상처를 받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부모라는 그들의 책무를 다하려 했을 뿐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들 역시 과거 그들이 어렸을 때 존중받지 못했으며 당시 우리 사회의 교육이 그러했듯이 아이들을 경쟁과 줄세우기에 급급한 분위기에 몰아넣고 일상적인 폭력과 학대를 당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폭력과 학대는 당연했고 어쩌면 그러한 폭력과 학대를 친구들에게, 자신보다 약자에게 행하면서 그것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 시키며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그들을 용서하려고 한다. 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미 깨달았고 그들도 언젠가는 깨닫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용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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